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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경식의 문학기행 원문보기 글쓴이: 김경식
정선 역사문학기행
-정선아라리와 문학
김경식
1) 정선아라리의 고향 정선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노래이다. 슬프거나 기쁠 때에 우리는 아리랑을 불러왔다. 아리랑의 역사는 유구하며 종류도 다양하다. 많은 아리랑 중에서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이 유명하다. 이중에서도 우리 민족의 슬프고 구성진 민요에 충실한 아리랑은 단연 정선아리랑이다. 정선 사람들은 특별히 자신들의 아리랑을 아라리라 부른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정선을 나흘 동안 걸었는데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었다”는 산골로 표현하였다. 산세가 깊고 험한 정선은 인심이 좋고, 다른 곳의 이주가 쉽지 않았다. 이 고장의 정서가 아라리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인지 모른다. 결국 정선 지방은 우리민족의 보편적인 애환과 설움을 노래로 형상화 할 수 있는 아리랑을 잉태하게 된다.
정선의 이름은 자주 변했다.
고구려(잉매현), 신라(정선), 고려(삼봉, 도원)등으로 군명이 바뀌었다. 신라 때의 지명이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까지 불러진다.
정선은 강원도에서도 가장 산간오지이다. 그러나 읍이 4곳이다. 정선읍, 신동읍, 고한읍, 사북읍 등이다. 무연탄, 철, 금 등 지하자원의 보고였기에 예전에는 인구가 많았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 정선군의 인구 조사표를 좀 들여다보면, 이곳의 인구가 많이 줄었음을 알 수 있다. 정선군에 1948년 함백탄광이 1959년 사북읍 일대가 탄광개발이 본격화된다. 1973년 고한선, 1974년 정선선 등 산업철도가 개통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한 때 이곳의 인구는 10만 명 이상을 유지했다. 1970년 11만 , 1975년 13만 명, 1980년 13만 명, 1985년 13만 명, 1990년 8만 명, 1996년 5만 명, 2006년 이후 지금까지 약 4만 명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선군은 태백산맥의 중심부에 해당하며 대부분 험준한 산악지역이다. 최고봉인 함백산(1,573m), 가리왕산(1,561m), 백운산(1,426m), 노추산(1,322m), 석병산(1,055m), 박지산(1,394m), 중봉산(1,284m), 청옥산(1,256m) 등 1,0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많다. 이런 높은 산과 깊은 강이 만나 계곡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강은 도도히 흘러 남한강에 닿는다.
소설가 김원일은 그의 소설 <아우라지 가는 길>에서 이런 지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고 말하지,
강물이 산으로 오르지 못하기 때문이야,
물은 낮은 데로만 흐르니깐,
그러나, 사실은 산이 강을 넘지 못하지,
산이 강을 만나면 높이를 낮출 수밖에,
강에 이르면 산맥조차 끊겨 버려,
강을 건너 다시 산을 세워야 해,
그래서 강은 산을 껴안고 흐르는 거야, ”
-김원일 장편소설 <아우라지 가는 길> 中에서
조직폭력에 몸을 담고 살아가던 주인공 ‘마시우’의 고향이 ‘아우라지 가는 길’ 어딘가에 있는 듯하다. 자폐 청년 마시우가 바라 본 사람살이는 참으로 불행 그 자체였다. 그가 순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선의 산과 자연 덕이었다.
첩첩 산중을 휘감아 돌아가는 여울을 따라 도로가 생겼다. 조양강은 이들 개울의 중심이다. 조양강은 정선의 북서쪽을 흐르는 오대천과 북평면 나전리 부근에서 합류한다. 이 강이 만나 정선읍을 휘돌아 남쪽으로 흘러 동강(東江)이라 불리며 남한강의 본류가 된다. 평야는 대체로 조양강과 오대천 주변에 있을 뿐이다.
정선군 남면 거칠현동(居七賢洞 낙동1리)은 아라리의 본고장이다. 이 마을에는 고려가 망하자 고려의 충신인 7명이 찾아든다. 전오륜, 김 한. 김충한. 고천우. 이수생. 황의용. 변귀수 등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들을 칠현이라 불렀다. 고려의 신하로 조선의 왕을 섬길 수 없었기에 목숨을 걸고 도망친다. 강원도의 오지인 이곳을 은거지로 삼은 이유이다. 이들은 매일 산꼭대기에 올라 개성을 향해 절을하며 통곡했다. 망국의 한을 한시로서 쓰고 노래를 불렀다. 이 시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다가 '정선아라리'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들이 백이숙제처럼 고사리를 뜯으며 오르던 수양산을 대신하여 백이산(佰夷山)이라 불렀다. 이쯤에서 백이숙제의 고사성어가 궁금하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중국 상나라 말기의 충성과 절개의 의인 형제였다.
백이와 숙제에 관한 기록은 중국<사기>의 열전에 전한다. 백이와 숙제는 원래 상나라 서쪽의 변방에 살던 형제였다. 그들은 상나라 변방 고죽군의 후계자였다. 고죽군의 영주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두 형제는 서로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결국 그들은 끝까지 영주의 자리에 나서지 않았다.
또한 상나라의 서쪽에는 영주였던 ‘희발’이 상나라에 반역하여 함락시킨다. 그가 주나라 무왕이다. 무왕은 백이숙제를 죽이려 했지만 강태공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다. 이들은 무왕의 녹봉을 받고 살 수 없다며 수양산으로 입산하여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아간다.
이들을 찾아간 왕미자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 이곳도 주나라 땅이다. 주나라의 산에서 자라는 고사리는 왜 먹고 있는가?”
이 말을 들은 두 형제는 부끄러워 굶어 죽었다. 이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백이와 숙제는 충절과 절개의 화신이 되었다.
우리민족의 정서를 잘 표현한 정선아라리는 절망적인 현실을 노래로 부르면서 극복하려 했던 분들의 눈물겨운 현실의 삶이 담겨있다. 정선아리랑이 아리랑으로 유일하게 국가가 지정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
2) 정선아라리의 역사성과 현대문학
정호승 시인의 시 <겨울날>에는 정선아라리의 서정이 녹아 있다.
물 속에 불을 피운다
강가에 나가 나뭇가지를 주워
물 속에 불을 피운다
물 속이 추운 물고기들이
몰려와 불을 쬔다
멀리서 추운 겨울을 보내는
솔씨 하나 날아와 불을 쬔다
길가에 돌부처가
혼자 웃는다
정선 아라리 한가락이 울며 내려서
- 정호승 시인의 시 <겨울날> 전문
정선아라리는 슬픔의 노래이다. 울음보가 터트리는 아라리의 구성진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나는 유년의 어머니가 부르시던 정선아리리의 노랫가락을 회상하곤 한다. 아버지의 고향은 충북 제천시 청풍면 계산리였다. 1985년 충주댐 공사로 수몰되어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어머니는 1935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이 마을로 시집오셨다. 정선에서 시작한 조양강은 영월과 단양을 흘러 청풍에 닿으면, 도도한 남한강의 물결로 변했다. 남한강이 휘돌아 나가는 경치 좋은 마을이었지만 신혼생활은 고단하셨다. 강가에서 빨래를 하실 때면, 강 건너 마을의 친정을 그리워하셨다. 그때마다 뗏목꾼들이 강물을 타고 내려가곤 했다. 그들은 슬프고 처량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정선아리리’였다. 어머니는 그 노래가 좋았다. 자신의 처지를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독한 시집살이와 무심한 남편으로 인한 고단하고 고독한 현실을 잊게 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다.
1938년 사금 사업을 하시던 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는 생활고의 시작이었으며, 조상들이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성촌 마을을 떠나야 했다. 남한강변의 청풍을 떠나 산골 마을인 충북 괴산군 장연면 추점리의 생활은 곤고하셨다. 일제강점기 가난한 소작인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마을에서 1960년에 태어났다. 1967년 면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을 때에 우리 집은 부자가 되어 있었다. 1950년 1월 토지개혁과 아버지의 근면 성실로 소지주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나를 청풍집 아들이라 불렀다. 왕복 8km 통학 길은 아름다웠다. 지금도 친구들과 미루나무 신작로 길을 걷던 옛 추억들을 잊지 않고 있다. 당시에 어머니는 무엇이 그리도 서러운지 슬픈 노래들을 부르셨다. 그 노래가 ‘정선아라리’였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
조용하고 나직하면서 슬픈 그 노래는 부엌의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에는 언제나 계속되었다. 노래가 끝나면 언제나 긴 한숨을 쉬시곤 했다.
이런 정선아리리의 슬픈 가락이 싫어서 책보를 던지고 뒤란의 우물가에 서있던 늙은 살구나무 밑에서 오랫동안 앞산을 바라보던 기억이 아련하다.
훗날 알았지만 정선아라리는 울음으로 자기 정화를 할 수 있는 노래란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는 노래를 부르면서 울고 계셨던 것이다. 그 행위는 친정 걱정과 생활고를 벗어나려는 용틀임이었다.
정선아리리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한 개성 두문동의 72현 중에서 전오륜을 비롯한 6명이 정선에 은거하면서 처음에 불러 졌다고 전한다. 이들은 당시 여주에 살고 있던 목은 이색 선생과 연락을 취하였다고 하지만 문헌의 기록은 없다. 정선은 문인들이 찾고 싶어 하는 고을이다.
1995년에 정선아라리공원에 세워진 고은의 시비에는 정선에 관한 그의 시상이 담겨 있다.
아스라이 아스라이
성마령 넘어
어이 돌아오지 않으리
그대 정녕
정선 아라리 넋이거든
천 년 세 월
이 산 저 산 메아리로
어이 눈부시게
돌아오지 않으리
- 고은 시 <정선 아라리> 전문
정선을 소재로 소설을 쓰기도 했던 고은 시인은 정선에 큰 관심을 보였던 작가다. 이것은 정선아라리가 지닌 역사성과 한의 미학 때문인지 모른다.
고은은 정선아라리에 관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1960년대 말 내 니힐리즘이 무척이나 지쳐있을 때 내 전생 또는 고대의 기억인 것처럼 정선아라리에의 매혹이 나를 자주 달래 주었다. 정선아라리에는 적어도 그 본줄기에는 봉건시대적 근본주의가 끼어들지 않는 오랜 본래 면목의 자유가 들어 있는 사실을 짐작했을 때의 기쁨은 거의 구원에 가까운 노릇이었다. 그런 정선아라리의 첫 체험은 나에게 제주도 시대 이래 또 하나의 정신적 흑점으로서 어떤 빛깔로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정선은, 정선아라리로서의 미학은 내 문학의 바로 옆에 있게 된 것이다."
-2006년 아라리문학축전 행사에 보낸 고은 시인의 메시지 중에서
정선은 첩첩산중 마을이며 '아리랑의 뿌리'이다. 정선아라리 가사는 노랫말이기 전에 구비문학이다. 정선아라리를 소재로 쓴 시는 고은 <정선아라리>, 이동순 <아우라지 술집> 등 천여 편이 넘는다.
김원일 장편소설 <아우라지로 가는 길>, 고은 장편소설<정선아리랑>, 안정환 장편소설 <정선아라리요> 등 여러 장, 단편소설이 있지만 이곳을 문학기행으로 찾아 가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나마 2005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정선아라리문학축전>이 있어 위안이다.
비가 내리는 오래전의 어느 여름날 정선 아우라지를 찾은 이동순 시인은 술에 취해 정선과 우리민족의 통일을 노래했다.
시 <아우라지 술집>이다.
그 해 여름 아우라지 술집 토방에서
우리는 경월소주를 마셨다
구운 피라미를 씹으며 내다보는 창밖에
종일 장마 비는 내리고
깜깜한 어둠에 잠긴 조양강에서
남북 물줄기들이
서로 어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염이 생선가시같이 억센 뱃사공 영감의
구성진 정선아라리를 들으며
우리는 물길 따라 무수히 흘러간
그의 고단한 생애를 되질해내고 있었다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세 쪽이 나지만
삼팔선 깨어지면 한 덩어리로 뭉치지요
한 순간 노랫소리가 아주 고요히 강나루 쪽으로
반짝이며 떠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흐릿한 십 촉 전등 아래 깊어가는 밤
쓴 소주에 취한 눈을 반쯤 감으면
물 아우라지고 사람 아우라지고
우리나라도 얼떨결에 아우라져 버리는
강원도 여량 땅 아우라지 술집
-이동순 시 <아우라지 술집> 전문
정공채 시인은 정선을 좋아 했던 작가이다. 특히 아우라지 강을 좋아 했다.
그가 쓴 시 <아우라지>는 이제 노래가 되어 아우라지에 노래비로 서 있다.
1. 아우라지 강가에 수줍운 처녀
그리움에 설레어 오늘도 서 있네
뗏목타고 떠난 님 언제 오시나
물길 따라 긴 세월 흘러흘러 갔는데
(후렴) 아우라지 처녀가 애태우다가
아름다운 올동백 꽃이 되었네
2. 아우라지 정선에 애닲은 처녀
해가 지고 달 떠도 떠날 줄 모르네
뗏사공이 되신 님 가면 안오나
바람따라 흰구름 둥실둥실 떴는데
아리랑은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없는 우리민족의 노래다. 아리랑에 관한 기록들은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우리의 고서에도 남아 있지만 그 시원은 알 수 없다. 아리랑은 쉽게 표현할 수도 있지만 알면 알수록 복잡하고 난해하다. 이쯤에서 아리랑의 기원을 주장했던 다양한 설을 탐구할 필요를 느낀다.
낙랑설은 이병도 선생이 주장했다. 그는 낙랑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의 다른 이름이었던 '아라'가 아리랑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양주동 선생은 <아리령설>을 주장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광명한 고개>이름을 아리령, 어리령, 오리령으로 표시한 것에 착안했다.
아리낭(我離娘)설은 그럴듯하다. 김덕장의 설을 김지연이 소개한 설이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각 지방의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연인)와 떨어져 있음을 슬퍼하면서 “아리랑(我離娘)”하게 되었다는 설이지만 그 기원이 너무나 짧은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규태 선생은 여진족의 언어인 아린(고향)에서 그 유래를 찾고 있다.
아리랑 연구가 김연갑 선생은 메아리설을 역설한다.
메아리와 메나리 설은 뫼(山)리(메아리) 아리 아리랑과 뫼나리에서 메나리로의 유추를 확신한다.
매천 황현도 아리랑설을 설파했다. 매천야록에는 아리랑타령이 게재되어 있다.
아리랑(阿里娘)은 아녀(阿女) 즉 여인과의 사랑 노래에서 기인한다고 했다.
아리랑이 전국에 일시에 퍼지게 된 것은 경복궁 중수 공사때다. 7년간에 걸친 경복궁 복원 공사 때에 정선아라리는 타 지역 일꾼들이게 공감을 얻었을 것이다. 각기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1926년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아리랑>은 일제감정기에 한을 지니고 살아가는 민중들에게 강한 이미지를 심어준다.
동학혁명에 죽어간 많은 백성들과 의병으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한 진혼곡 형태의 슬픈 가락과 함께 의병출정가 같은 <춘천의병아리랑>이 불려 지기도 했다.
우리나 부모가 날기를재
성대장 주자고 날길렀나
귀약통 납날개 양총을메고
벌업산 대전에 승전을했네
마지막으로 정선아라리가 널리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1971년 강원도가 ‘정선(旌善)아리랑을 도지정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하면서 ‘강원도의 아라리’를 ‘정선의 아라리’로 집약시키고 특화시켜 시선을 집중 시킨 것에 기인한다.
정선읍에서 임계방면으로 차로 30분 거리에 여량 아우라지 나루터가 있다. 구절천과 골지천이 만나는 장소이다. 구절천은 북쪽 구절리에서 흘러나오는 개울이며, 골지천은 남동쪽 임계 방면에서 흘러오는 구절천과 남동쪽 임계에서 흘러나오는 개울이다. 이 둘이 만나 정선말로 물이 합한다는 뜻의 아우라지 강물이다. 아우라지 강변은 작은 산간마을이며, 평화롭지만 삶의 애한을 간직한 장소이다.
정선사람들은 아리랑을 아라리라 부른다. 아라리를 아마도 “내 심정을 알아 주리오”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널리 불러지는 민요가 되어버린 이곳 뱃사공의 아라리는 내게도 익숙하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날 좀 건네주게
싸릿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와 저리만 쌓이지
시장철 임 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를 나를 건네주게
아우라지를 자주 찾았던 신경림 시인은 이곳의 뱃사공의 삶의 애환을 담은
시를 썼다. <아우라지뱃사공>이란 시다.
정선아라리의 시작은 조선의 역사가 막 시작할 때다. 고려는 망했지만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다짐하던 몇 명의 고려 선비들이 정선으로 은거하면서 부터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고려의 수도 송도의 옛 추억을 생각하면서 한문 율시(律詩)로 지어 불렀다. 이를 정선 지방의 선비들이 한시를 쉽게 풀어, 감정을 살려 불렀을 것이다.
내게 정선의 추억은 사북탄광과 관계가 있다. 1985년 초겨울 나는 사북에 은거할 결심하고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1980년 봄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후에 폭압을 일삼던 정국에 치명타를 가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나의 삶은 부끄러움이었다.
불현듯 당시 생각했던 것이 1980년 봄에 터진 사북항쟁이었다. 그곳에서 나의 나약한 육체를 단련하고 싶었다. 목숨을 걸고 무엇인가 하고 싶던 청년시절이었다. 그날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백무산 시인의 시를 읽으며, 아름다운 산과 강변인 정선의 양면성을 확인하게 된다.
저 무심한 바람과 물이
인간의 몸을 지나
사랑과 열정이 되는 길이
따로 있듯이
저 허망과 좌절의 시간이
인간의 몸을 지나
인간의 시간이 되는 길이
따로 있으니
그날은 다시 우리의 미래다
그날 그 얼굴이
다시 우리의 미래다
길은 골백번 달라도
그날
그 빛이 북극성이다
세상이 천번 만번 바뀌어도
그날 그 빛이 인간의 시간이다
절망과 허망과 기계의 시간이고
통과 절망의 몸을 지나
인간의 시간이 되는길이
따로 있으니
-백무산 시인 <사북항쟁 25주기에 바치는 시> 중에서
정선아라리가 전국적인 아리랑의 상징이 된 것은 이 고장 출신 소리꾼들의 노고가 크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정선아라리를 외부에 알린 소리꾼은 고덕명. 김천유. 박순태. 정명노 등이다. 고덕명은 1866년 정선읍에서 태어나 10세부터 정선아리랑을 불렀다. 부친의 직업이 봇짐장수 였기 때문에 전국을 돌며 정선아라리를 불러 그의 이름을 알렸다. 이후에 김천유도 그를 따라 다니며 아리랑을 불러 유명해졌다. 1896년 정선 북면에서 태어난 박순태에 의해 정선아라리의 음반취입이 이루어진다.
1920년 9월 박순태는 경복궁에서 열린 민요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입상한 상금을 받아 음반을 발행했다. 정선아라리의 음반으로는 최초였다. 그러나 그는 엿장수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3) 정선아라리 모음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후 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넘겨 주게.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울어
정선아리랑의 최초의 가사이다. 고려의 망국함에 벼슬하던 선비들이 이를 비관하고 송도 두문동에 은신하다가 정선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부른 가사이다.
정선의 구명은 무릉도원 아니냐.
무릉도원은 어데 가고서 산만 충충하네.
이 가사의 기원은 고려 공민왕 때라고 한다. 고려 충렬왕 때까지 정선의 읍터는 남면 증산이었다. 이곳은 무릉도원처럼 산자수명했고 인심이 좋았다. 읍터를 지금의 정선읍으로 옮기자 이런 가사가 쓰여졌다.
아질아질 성마령
야속하다 관음베루
지옥같은 정선읍내
10년간들 어이 가리
아질아질 꽃베루
지루하다 성마령
지옥같은 이 정선을
누굴따라 나 여기왔나
이 가사는 지은이가 있는 아라리다. 오횡묵 군수의 부인이 지었다는 노래다. 오횡묵은 조선말엽의 정선 군수로 선정을 베풀었다. 정선의 높고 험한 성마령과 관음베루를 보면서 한탄하는 가사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몇 년 살다 떠날 때에는 정이 들어 울었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싸이지
잠시잠간 임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이 가사는 1930년대 여량면 여량리의 한 처녀와 유천리의 한 총각의 사랑이야기다. 초가을 큰 비가 내려 나룻배를 건널 수 없는 처녀 총각의 애타는 마음을 당시 뱃사공이던 지유성은 이러한 사연을 눈치 채고 그 슬픔을 대신 불러 주었다고도 전한다.
금전을 주어도
세월은 못사나니
알뜰한 세월을
허송치 맙시다.
청춘도 늙기 쉽고
늙으면 죽기도 쉬운데
호호백발 되기 전에
부지런히 일하세
1920년대 정선읍 내에 살던 조실부모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10살 때부터 머슴살이를 했다. 결혼하여 10년을 열심히 살아 부자가 되었다. 복은 근면한데 있다는 것을 신조로 삼아 이 노래를 지어 불러 정선의 근면아라리가 되었다.
시집 온지 사흘만에
바가지 장단을 쳤더니시
아버지가 나오시더니
엉덩이 춤만 추네
시어머니 죽어지니
안방 넓어 좋더니
보리방아 물 줘노니
시어머니 생각나네
-고부간의 갈등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가사이다.
오동나무 팔모반에
사기잔을 놓고서가는
손 오는 손님들 만족히나
들고 가시오.
삭달가지를 똑똑 꺾어서
군불을 때고서
중방 밑이 다타도록
놀다가 가세요
-정선의 후한 인심을 표현한 아라리 가사이다.
신발 벗고 못 갈곳은
참밤나무 밑이요
돈 없이 못 갈곳은
행화촌(杏花村)이로다.
술 잘먹고 돈 잘 쓸 때는
금수강산일러니
술 못먹고 돈 떨어지니
적막강산(寂寞江山)일세
-후회아라리이다.
세월아 네월아
나달 봄철아
오고 가지 말아라
알뜰한 이팔 청춘이
다 늙어를 간다.
월미봉 살구 나무도
고목이 덜컥 된다면
오던새 그 나비도
되돌아 간다.
-세월이 가고 늙어지는 것을 한탄하는 아라리이다.
높은산 정상 말랑에
단독이나 선나무날과야 같이로만
외로이만 섰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진다고 슬퍼말아라
공동묘지 가신 낭군은
명년에도 못온다.
-과부로서의 신세타령과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라리이다.
물 한 동이 여다 놓고서
물그림자 보니는촌살림 하기는
정말 원통 하구나
강물은 돌고돌아
바다로 나 가지요
이 내몸은 돌고돌아 어디로 가나
현실의 불안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미래를 표현한 아라리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 주오(후렴)
강원도 금강산 일만 이천봉
팔만구 암자 유점사 법당 뒤 칠성단 모두 모여
팔자에 없는 아들 딸 낳아달라고
섣달 열흘 녹음에
정성을 말고
타관객리 외로이 난 사람
괄시를 마라
세파에 시달린 몸 만사에 뜻이 없어
홀연히 다 떨치고 청려를 의지하여
지향 없이 가노라니
풍광은 예와 달라 만물이 소연한데
해 저무는 저녁 노을 무심히 바라보며
옛 일을 추억하고 시름없이 있노라니
눈앞에 왼갖 것이 모다 시름 뿐이라
가수 하춘하가 불러 유명한 정선아리랑을 이 고장 사람들은 다음 가사를 개작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뜩찮게 여기고 있다. 원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런 아리랑을 엮음 아리랑이라 부른다.
우리댁의 서방님은 잘 났던지 못 났던지
얽어매고 찍어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헐게
눈에 노가지 나무 뻐덕지게 부끔떡 세 쪼각을
새뿔에 바싹 매달고 엽전 석냥 웃짐지고
강릉 삼척으로 소금사러 가셨는 데
백복령 구비구비 부디 잘다녀 오세요.
<후 렴>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람구암자 자자 봉봉에 칠성단을 모아놓고
겉돈벌라고 산제불공을 말고서
힘대힘대 일을하여 자수성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