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67)
◇ 앉은뱅이 노 참봉
물불 안 가리고 돈 모은 노 참봉…마흔이 되자 천석꾼 부자 되는데
어느날 이유없이 두다리 마비
용하다는 의원 찾아 갔더니…
천석꾼 부자 노 참봉이 탄 가마가 억새밭이 파도처럼 흔들리는 오솔길을 까딱까딱 가고 있었다. 가마 속 노 참봉은 한평생 살아온 게 꿈만 같다.
어린 시절, 하늘은 높고 나뭇잎은 노랗고 빨갛게 물들고 억새는 꽃처럼 하얗게 하늘거리면, 다른 아이들은 고추잠자리를 잡고 홍시를 따 먹으며 풍성한 가을을 만끽했지만 어린 노 참봉은 덜덜 떨었다. ‘다가오는 겨울에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노 참봉 어릴 때 이름은 풀소매였다. 눈물 콧물을 훔치느라 소매가 항상 풀을 발라놓은 듯 번들거렸기 때문이다. 조실부모하고 큰댁에 들어간 풀소매는 새경도 없는 머슴이 되어 죽도록 일하다가 뛰쳐나왔다. 어린 나이에 다리 밑 거지 생활도 하고, 대장간 풀무질해 주고 화덕 옆에 쪼그린 채 가마니 덮고 겨울을 나기도 했다. 장터에서 소매치기하다가 포졸에게 잡혀 옥살이도 했다.
풀소매는 터득했다. ‘돈이 있으면 임금도 부럽지 않고 돈이 없으면 죽은 목숨과 다름없다.’ 그래서 돈 되는 일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엄동설한에 주막집 아궁이 옆에서 자다가 꼭두새벽에 쫓겨나 담 밑에 쓰러져 동사한 취객을 발견하고는 허리춤에 찬 전대를 풀어 달아난 적도 있었다. 남의 집 월담도 마다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외장꾼 마누라에게 샛서방이 있다는 것을 풀소매는 눈치챘다. 외장꾼이 집을 떠난 날 밤, 풀소매는 외장꾼 집 근처에서 숨어 지켰다. 삼경이 가까워오자 샛서방이 그림자처럼 외장꾼 집에 스며들더니 사경이 되자 살며시 나와 골목을 돌아나갔다. 미행 끝에 김 초시 둘째아들을 붙잡은 풀소매는 갖은 협박으로 큰돈을 우려냈다. 그뿐인가. 새벽녘에는 외장꾼 마누라를 협박해 돈을 우리고 치마까지 벗겼다. 천하의 노랑이 풀소매는 부자가 되었다.
마흔이 되자 아무도 그를 풀소매라 부르지 않았다. 의젓한 노 참봉이 된 것이다. 천석꾼 부자에다 벼슬까지 사 임금도 부럽지 않은 노 참봉인데, 호사다마라고 이유 없이 두 다리가 마비됐다. 하인에게 업혀 동네 의원을 찾고 가마에 실려 이 고을 저 고을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 백약을 써봐도 무효, 노 참봉은 앉은뱅이가 됐다.
노 참봉을 태운 가마가 억새밭을 지나 용천골 주막집에 들어섰다.
“주모, 가장 싼 밥이 뭔가?”
“시래기국밥이구먼요.”
가마꾼 하인 둘은 멀건 시래기국밥을 먹고 노 참봉은 양지머리 쇠고기국밥을 먹은 후 용하다는 용천골 황 의원을 찾아갔다. 이미 기다리는 줄이 긴데 한 여자가 황 의원의 도포 자락을 잡고 대성통곡이다.
“의원님, 우리 남편 좀 살려주십시오. 병이 나으면 집을 팔아 약값을 갚겠습니다요.”
“부인 사정은 딱하지만 나는 땅 파서 약재를 꺼내나. 밀린 약값이 삼백냥이 넘었어.”
황 의원이 도포 자락을 낚아채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다.
“황 의원!”
우렁찬 고함 소리에 황 의원이 문을 열었다.
“여기 오백냥이 있소이다. 저 여인에게 약을 지어주시오.”
천하의 노랑이 노 참봉이 오백냥을 내놓았다. 가장 놀란 사람은 황 의원도 그 여인도 아닌 가마꾼 하인 둘이다. 황 의원은 그 여인에게 약 한재를 지어준 후 기다리는 사람들을 제쳐두고 노 참봉을 불러들였다.
“어디가 편찮으시오?”
“아무 이유 없이 지난 팔월 보름부터 일어설 수가 없소이다.”
황 의원이 일어서더니 노 참봉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디까지 일어서는지 봅시다.”
“어, 어, 어-!”
노 참봉이 벌떡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갈 때 가마꾼들은 빈 가마를 메고는 앞장서서 훨훨 걸어가는 노 참봉을 뒤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