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경제학과 교수는 택시를 타고 자기가 근무하는 대학으로
가자고 하면 기사가 자꾸 교수냐고 묻고, 그렇다고 하면 무슨과
교수냐고 또 묻고, 그래서 경제학과라고 하면 내릴 때까지 이
나라 경제에 대한 기사의 강의를 들어야만 하기 때문에 늘 전공
을 물리학이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그의 술책은 북한 핵에 엄청
난 관심을 가진 택시 기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잘 먹혔다.
" 물리학이라 …… 혹시, 핵물리학자 아니시요?"
"아, 아닙니다. 그냥 이론물리학자입니다" 라고 했지만 택시 기
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 핵이 얼마나 심각한 위협인지에 대
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더란다. 그후로는 천체물리학으로 전공
을 바꾸었다고 한다. 기자들은 곧잘 취재를 위해 직업을 위장하
고, 작가들 역시 작가라고 밝혔을 때 겪게 될 부작용을 우려해
이런저런 '대체' 직업을 갖고 있다.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존재.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끝없이 변화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게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장면은 바로 우리의 일상일 것이다.
일상에서는 누구도 '컷' 이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삶은 때
로 끝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것만 같다. 그럴 때 누군가 이렇
게 말해주면 참 좋을 것이다.
"자, 다시 갑시다."
( 김영하 ,「 연기하기 어려운 것 」 중에서 )
"안나 아르카디예브나는 책을 읽었고 이해도 했지만 읽는다는 것,
즉 책에 쓰인 타인의 생활을 뒤따라간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녀는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안나 카레리나 1」)
파묵은 이 대목을 길게 인용하면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주인공의
시선에 따라 풍경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소설
은 '심리적 3차원'의 세계라고 천명한다. 파묵의 이 언급은 폴 오스
터가 영화와 소설을 각각 2차원과 3차원에 비유했던 아네트 인스도
르프와의 인터뷰를 연상시킨다. 오스턴는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
만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해 컬럼비아대학교 영화
학과장인 인터뷰어를 도발한다. 무슨 문제가 있냐니까, 영화는 '무
엇보다도, 2차원' 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은 영화를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벽에 비쳐
지는 평범한 그림인 영화는 현실의 환영이지 실제하는 물건이 아니
다. 그렇게 되면 이건 이미지의 문제가 된다. 대게 처음에는 영화를
수동적으로 보게 된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이 되면 우리는
영화 속에 흠뻑 빠지고 만다. 두 시간 동안 매혹당하고, 속임수에 넘
어가고 즐거워하다가 극장 밖으로 걸어나오면 우리는 그동안 본 것
을 거의 잊어버리고 만다. 소설은 전혀 다르다. 책을 읽을 때에는 단
어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노력해야 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그런 다음 상상력이 활짝 열리면 그때는 책
안의 세계가 우리들 자신의 인생인 듯 느끼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
다. 냄새를 맡고, 물건들을 만져보고 복합적인 사고와 통찰력을 갖게
되고 자신이 3차원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폴 오스터,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조 라이티 감독의 <안나 카레리나>를 보러 간 날, '영화의 전당' 중
극장에는 관객이 반쯤 차 있었다. 상영 중간에 휴대폰을 확인하거나
대놓고 문자메세지를 줄기차게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스럭거
리며 뭔가를 끝없이 먹어대는 관객까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를 보는 마음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안나의
마음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녀는 소설에 빠져들기를 거부하면서
도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반면 나는 영화에 빠져 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폴 오스터 말마따나 영화는 이미지로 저 멀리에
있고 팝콘 씹는 소리와 휴대폰의 푸른 빛기둥들은 현실로 가까이 있
어 끝까지 서로 섞여들지 않았다. 책을 든 안나는 '무엇이든 직접 체
험하고 싶은 마음'에 시달렸지만 나는 아무런 방해 없이 영화에 몰입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책과는 달리 영화는
어쩐지 한번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현실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마
치 모스크바행 기차처럼 무지막지하게 달려온다.
( 김영하, 「 2차원과 3차원 」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