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치에서 봄을 읽다 외 4편
김연종
서서히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밀려오는 요의尿意처럼
봄비에 쩍쩍 갈라지는 사타구니 계곡의 얼음장처럼
비 그친 뒤 더욱 흰 목덜미의 과부집 백목련처럼
춘화에 취해 오줌발 세우고 있는 만취한 전봇대처럼
몽롱한 오월의 안부를 묻고 있어요 붉은 구름 사이 절규하는 스무 살이 보여요 주름진 하늘은 내 이마에 빗금을 긋기 시작했어요 세상은 약간 찌푸릴 뿐인데 흐릿한 내 시야엔 왜 자꾸 비가 내릴까요 이제 장화를 신는 것도 모자를 벗는 것도 두렵지 않아요 수상한 구름은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아요 물음표 같은 우산을 쓰고 혼돈의 사선 밖으로 뛰쳐나가요 여전히 안경을 더듬거릴 뿐 저 흐드러진 지린내를 피하진 않아요 눈부신 아카시아가 망막까지 활활 타올라요 이제 갓 스물이라고는 말하지 마세요
카우치에서 아버지를 만나다
지워진 아버지를 수소문했다 마지막 숨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바람이 그를 데려왔다 영정을 불태우던 불꽃들이 내 주위를 둘러쌌다 나보다 더 젊은 아버지가 철없는 아이처럼 구시렁댔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가 유년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나를 꾸짖었다 논쟁을 벌이기에는 둥근 밥상머리에 차려진 서사가 턱없이 부족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도 군침이 돌았을 뿐이다 배부른 참새들은 방앗간을 그냥 지나쳤고 밭을 갈던 황소는 객장을 갈아엎었다 심장까지 파헤쳐진 아버지가 도처에 널려있다 밭고랑처럼 갈라진 손으로 단단한 내 등을 토닥였다 밭은 기침소리가 꺼져가는 촛불의 숨통을 조였다 사무치는 불꽃을 위해 장작을 쌓고 담장을 허물었다 사위어가는 촛불 곁에서 고드름처럼 녹아내리던 어머니마저 쓸쓸한 계정을 지웠다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나는 허물을 덮으려고 더 높게 담장을 쌓았다 하릴없이 지었다 허물기를 반복하는 동안 아버지는 더 새카맣게 타들었다
카우치에서 어머니를 만나다
당신은 호접몽처럼 날아 왔습니다 양 날개를 접고 앙상한 뼈와 거죽만으로 조금씩 나를 깨웠습니다 넉잠을 자고나서야 고치를 짓는 누에처럼 나는 여전히 두리번거렸고 당신은 물에 젖은 뽕잎을 닦고 있었습니다 젖은 뽕잎을 갉아 먹은 누에는 어김없이 병들어 두엄자리에 내던져졌기 때문이지요 더 이상 뽕잎을 먹지 않는 병든 누에를 위해 당신은 마른 뽕나무 같은 보건소를 들락거렸지요 아이나와 리팜핀 스트렙토마이신을 당신의 치마 품에 감추어 뽕잎만한 엉덩이에 주사 하였지요 싸늘한 알콜 솜의 감촉과 먹먹한 주사바늘 자국사이 어딘가에 늘 당신은 서성거렸습니다 점차 핏기가 돌아오던 누에가 넉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당신은 섶처럼 잘록한 유택으로 황망히 길을 떠났지요 산다는 것은 마지막 제 잠자리를 위해 고치하나 짓는 것이라며 더 이상의 명주실은 비단이 아니라 가시일 뿐이라며... 그 흔한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허공에 그려진 나비처럼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은 생일도 없고 기일도 없습니다 오늘, 세상에 남겨진 후레자식들이 억지로 끼워 맞춘 날짜에 당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당신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카우치에서 이를 뽑다
김연종
문고리에 실을 매달아 뽑은 이를 지붕에 내던졌다
해가 저물도록 굴뚝을 지켰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담벼락은 이미 분열 증세를 보였고 내 몸도 조금씩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간절히 빌었지만 까치는 얼씬도 하지 않고 구강세균만 득실거렸다
땅 속에 묻히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다 양식장을 탈출한 황소개구리가 황소와 개구리로 분리되었다 미라처럼 말라 죽은 개구리가 무척 편안해 보였다
피는 멈추지 않았고 물고 있던 솜뭉치가 붉은 페인트 통에 가득했다
불에 데인 상처를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객혈은 계속되었고 오줌 색은 점점 붉어졌다 엉덩이가 딱딱해져 더 이상 주사바늘 들어갈 틈이 없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서 꿋꿋이 자랐다
목줄 대신 넥타이를 목에 매달았다 비단 옷을 입고 기억의 환부를 도려냈다 처음으로 흰 쌀밥을 꼭꼭 씹어 먹었다
카우치에서 시를 읽다
김연종
손님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소파인지 침대인지 비스듬한 안락의자에 누웠다 천정은 높고 창문은 비좁았다 식은 커피 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종업원인지 바리스타인지 흰 가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뜨거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다 지난 풍경들이 연탄가스처럼 스며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묻힌 기억이 몽롱해졌다 균열은 몸을 둘러싼 지붕이 아니라 몸을 촘촘히 떠받들고 있는 기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구겨진 쪽지를 건네주며 생각나는 대로 읽고 보이는 대로 말하라고 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점자처럼 어른거렸다 내 유년시절도 먼지처럼 떠다녔다 물에 빠져 죽은 누이를 위해 지붕이 불타기를 기도했다 흰 연기가 꼬리곰탕처럼 끓어올랐다 썩지 않은 누이가 썩은 지붕에서 쏟아져 나왔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소화되지 않은 말들이 입속에서 오물거렸다 지금까지 내뱉은 말이 자유연상이면 치유가 될 것이고 자동기술이면 詩가 될 거라고 했다 상담료를 지불했는데 커피 대신 껌딱지 같은 책 한권을 주었다 단물이 빠지기 전에 책상다리에 붙여놓았다
*카우치 ; 정신분석에서 사용되는 안락의자, 자유로운 연상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침대모양의 평평한 의자이다.
김연종
2004년 문학과 경계 등단
시집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 <극락강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