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 생각: 오직 사랑, 그 위대한 인간 사치! ◈
66권의 성경을 단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오직 사랑’이다.
사도 바울은 이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풀어서 설명했다. 덧붙여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라는 말로 자신에게서 가장 소중한 건 ‘사랑’임을 선포했다.
오직 사랑만이 나를 드러내고, 나를 구원하며, 자신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게 된다는 말이다. 게다가 사랑은 자기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에게도 유익한 것임을 확신 있게 전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쓴 편지에서 돈 버는 길, 잘 사는 길, 행복한 길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랑 때문에, 사랑이어서 보이는 길을 보여주겠다고 한 것이다.
징이나 꽹과리가 울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왜 징과 꽹과리가 소리를 내는 것을 가지고 비유를 했을까? 사람은 징과 꽹과리처럼 울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사람이 소리를 내는 존재라면, 사랑은 필요 없다. 즉 징과 꽹과리처럼 소리만 내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징이나 꽹과리라는 것이 바울의 논리이다.
징과 꽹과리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 내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건 내가 징과 꽹과리가 아니라는 말이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필사적으로 사랑을 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친함과 좋아함과 사랑함’을 혼동한다.
좋아하면 친해진다. 그렇다고 친하다고 꼭 좋아하는 건 아니다. 싫어도 친하면 같이 지낸다. 이는 오래된 친구가 싫어도 친하다는 이유 때문에 헤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친한 사람들이 헤어지면 원수(怨讐)가 된다.
이처럼 좋아하기 위한 단계를 친함이라는 걸 내세우는 건 현상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친함은 상호적이다. 내가 좋아하고, 상대도 나를 좋아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친함의 밀도는 진해진다. 그러나 ‘오직 사랑’에는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건 오직 그 사람의 몫이다. 그걸 가지고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만약 좋아함의 결과로 인해 그와 친해진다면, 그저 즐기면 된다. 나는 이걸 ‘그 순간의 인간 사치(奢侈)’라고 부르고자 한다.
사실 인간에게 사치는 최고의 행복을 제공하는 최고급 인간관계임이 분명하다. ‘오직 사랑’은 그래서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사치이고, 이는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저녁 밥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