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번호라도 적어 놓았어야지요?” 전화번호는커녕, 사고 운전자의 아무런 인적 사항을 받지 않았다는 말에 놀란 친구는 외쳤다. 사실 나는 그에게 어떤 보상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받은 은혜가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고 직후, 나의 입에서는 “감사합니다!”란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테니스 라켓 줄이 끊긴 날이었다. 줄도 수리할 겸, 테니스장을 향해 자전거를 달렸다. 아름다운 도시들이 그렇듯, 브루하통하강이 연길시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 강 북편을 따라 곧게 뻗은 도로를 달리노라니 감사가 절로 나왔다.
그때였다. 옆 길에서 승용차 한 대가 불쑥 튀어 나온다. 한 길에 들어서려면 당연히 지켜야 할 일단 멈춤 선을 무시하고, 자전거 도로에 차 머리를 들이 민다. 힘없는 자전거는 뒤통수를 얻어 치이고 길에 나동그라졌다.
사고를 낸 운전자가 차를 멈추고 허겁지겁 달려 나온다. 미안하다. 다친 곳은 없는가? 병원에 가야 하지 않겠는가? 나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연이어 질문을 쏟아낸다. 몸 둘 바를 모른다.
십수 년 자전거를 타던 중 가장 큰 사고다. 대한민국 국토 순례 3천리를 달렸어도 이런 낭패는 당해본 적이 없었다. 십 년 넘게 토론토에서 자전거로 누비고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 연길에서도 7년째 자전거를 타지만, 이런 사고는 처음이다. 자전거의 기어변환기가 차에 받쳐 박살 났다. 안장이 휘어져 망가졌다. 비가 튀는 걸 막아주는 덮개도 너덜너덜하다. 자전거가 이러하니 그 위에 앉은 운전자는 어떨까?
말짱했다. 머리도 말짱! 팔다리도 말짱! 뼈도 말짱! 자전거는 심하게 부서졌는데, 그 위에 앉아있던 운전자는 별 다친 곳 없이 말짱했다. 나는 나둥그러진 자리에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섰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공중에 붕 뜬 그 순간, 나의 몸을 아버지께서 천사를 보내 받아주셨는가 하는 감동이 스쳐 갔다. 몸에 특별한 이상을 느낄 수 없었다. 자동차의 운전 실수로 자전거와 그 위에 탄 운전자가 들이 받쳐 나뒹굴었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상처를 찾지 못했다니. 기적이다.
초보 티가 나는 운전사가 내 앞에 처분만 바랍니다 서 있었다. 아버지 병환이 급하다는 소식을 받고 허둥지둥 가다가 이런 실수를 했단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당신 아버지 병환 생각하다, 남의 아버지 저 세상 보낼 뻔 했어요." 한 달 후 있을 외아들 결혼이 생각 나서 한 말이다.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신 것이니 그분께 감사하시라는 당부를 하고 그분을 보내드렸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친구는 피맺힌 나의 생채기에 소독제를 바르며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그 사람 연락처, 차 번호라도 적어 두어야지, 자동차 사고 후유증이 얼마나 무서운 데 그냥 보내느냐? 부서진 자전거 수리비라도 받아내야지. 등등
나를 들이 받은 운전자에게 아무런 보상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기적이 너무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가 너무 컸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이 생각났다. 그분의 위대한 손길을 체험하고 나니, 운전자의 실수나 자전거의 망가진 부분들은 너무 사소하게 느껴졌다. 내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그의 실수는 새 발의 피였다
망가진 자전거를 끌고 자전거 수리점까지 걸어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여름날은 무덥고, 사고를 당한 몸이어서일까 걷기가 힘이 들었다. 택시를 향해 도움을 요청해본다. 그냥 지나친다. 고장 난 자전거까지 싣고 갈 택시가 어디 있으랴. 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은혜를 거듭 감사하며 꾸역꾸역 걸어갔다. 더 이상 걷기 힘든 한계점에서 한 청년을 보았다.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그늘에 쉬고 있었다. 염치불구하고 그의 도움을 청했다. 오토바이 운전자의 도움을 얻어 자전거수리점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저렴한 수리비로 자전거는 수리되었다. 수리받은 자전거는 이전보다 더 새것이 되었다. 약사의 조언을 따라 스친 생채기에 빨간 소독제를 바른다. 문득 한 생각이 스친다. 나를 이곳에 파송하신 아버지, 그분 높이는 일에 아쉬웠던 요즈음, 이렇게라도 아버지의 이름을 높일 수 있었을까? 아무튼, 감사하다.
다음 날 새벽, 아버지 집에 갔다. 찬양 가사가 예사롭지 않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내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받겠네/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내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그의 실수는 새 발의 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