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행 대기실
최옥분
가창을 지나 청도로 가는 길목 산자락에 잘 지은 새 건물이 보였다. 입구엔 그녀가 가르쳐준 요양원 간판이 명찰처럼 달려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안내원에게 봉사를 왔다고 하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라고 한다.
3층에 내리니 요양원 특유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간호실에 가서 김 간호사를 찾으니 연락을 해줬다. 잠시 뒤 그녀가 와 반갑게 맞으며 안내를 했다. 복도를 지나는데 열린 방마다 회색빛깔의 노인들이 앉아있거나 누워있다. 짧게 자른 은빛머리카락, 세월의 두께가 겹겹이 쌓인 얼굴들은 남녀의 구분도 희미하다.
봉사 실은 비어있는 넓은 방이었다. 요양보호사들이 와서 의자와 탁자를 준비해 간이미용실이 차려졌다. 보호사의 안내를 따라 걸을 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줄지어 들어와 앉았고, 휠체어 탄 어르신도 여러 명이 대기했다.
차례대로 이발을 시작했다. 보호사들이 순서대로 컷 준비를 해주고, 머리카락도 털어주며 부지런히 도와줬다. 조금 늦게 보호사가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 한분을 모시고 왔다. 오래 기다릴 수 없으니 먼저 좀 깎아 달라고 한다. 돌아보니 그분은 고개도 못 가눌 만큼 수척했다. 대기하던 할머니들은 안 된다고, 순서대로 해야 한다며, 한 사람도 양보 하겠다는 할머니가 없다. 그분들이 컷을 하고 나들이 갈 것도 아닐 텐데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봉건적이고 가난한 시절에 여자로 태어나 갖은 고생을 다하며 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들이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이제는 빈 껍질로 남아 더 이상 내어 줄 것도 없이, 벼랑 끝에 선 그들은 한 치도 물러설 마음의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발을 하는 동안 할머니 얼굴을 처다 볼 새도 없이, 서너 시간이 지난 것 같다. 대기하던 할머니도 세 사람 밖에 남지 않았다. 잠시 허리를 펴고 탁자 위에 갖다 놓은 음료수를 마셨다. 얼굴에는 땀 과 머리카락이 범벅이 되었다.
곱게 생긴 할머니가 다가오더니 고생 했다며 귀가 닳도록 접혀진 만원을 손에 꼭 쥐어주셨다. 받지 않으려고 손사래를 쳐도 손을 꼭 잡고 고생 했다며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하신다. 코끝이 찡하다. 그들 모두가 내 어머니 아버지 모습이고, 내 고향 어른들처럼 보였다.
지난번엔, 절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 봉사 갔을 때, 새로 오신 할머니는 가족에 대한 원망을 끝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자녀들은 산자락에 공기 좋고, 시설 좋은 요양원에서 염불소리 들으며, 편히 계시라고 맡겨 놓으셨지만, 할머니는 낯선 곳에 가족과 떨어진 두려움과 슬픔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와 가슴이 아렸다.
오래전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추석에 친정에 갔다. 어른들은 온 여름 들판에서 농사지으며 태양에 그을린 구리 빛 얼굴, 빛바랜 머리카락에 모두 한복을 입고 다니시는 걸 보더니
“엄마! 나이가 많으면 여기 와서 살아야 돼요.?”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어린 아들의 눈에 낯 설은 모습들을 보며 궁금증이 들어 묻던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때는 요양원이란 단어조차 들어본 적이 없고, 자녀들이 부모를 돌보던 시대였다. 이제 그 어르신들은 모두 고향 산자락에 누워 계신다.
팔십 평생을 농사짓고, 고향을 지키시던 아버지도 기력이 떨어져 더 이상 시골에 계시게 할 수 없었다. 그해 가을걷이가 끝난 11월에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편히 모시는 방법을 의논 했다. 아버지에게 이제 농사를 그만 하시라며 자식처럼 돌보던 소도 팔게 했다. 논과 밭도 남에게 맡기시라며 강력하게 권유 했다. 고향을 떠나기 싫어하는 아버지를 남동생이 집으로 모셨다. 아버지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아들은 출근하고, 손자도 학교 가고, 며느리도 나들이 간 빈집을 지키는 날이 많아졌다.
아버지는 산골 길갓집에 대문도 없이 평생을 사셨는데 어느 해 겨울 도둑을 맞았다. 벼 타작을 해 마당에 가득 쌓아 놓은 벼 가마니를 한 밤중, 대문 앞에 트럭을 세워두고 반쯤 실었을 때, 아버지가 잠에서 깨어 방문을 여니 그들은 놀라 차를 몰고 달아났다. 경찰지소에 신고 했지만 잡지는 못했다. 그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 아버지를 뵈러 갔더니, 아버지께서는
“그놈들이 얼마나 살기가 어려우면 여기 까지 왔겠나. 그래도 내 먹을게 남았으니 다행이다” 하셨다.
그 후 대문은 달았지만 쇠로 밀고 닫는 정도였지 자물쇠 사용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던 습관이 아들 집에 와서도 혼자 계시다 무심코 대문 열고 나가시니 문은 자동으로 잠겨 버렸다. 아들은 열쇠를 들고 다니시라고 당부 했지만, 번번이 잊어버리셨다. 그런 일로 아들에게 전화하는 소동이 여러 번 있고나니, 바깥출입도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평생을 피우던 담배도 공동주택에서는 민폐가 되고, 천식기도 있으니 자녀의 권유로 끊으셨다. 아버지는 점점 말 수도 줄고 갇혀진 새처럼 창밖을 바라보거나 티브이가 유일한 친구였다.
가끔씩 아버지를 모시고와 우리 집에 일주일이라도 계시다 모셔드린다고 해도, 이틀 밤만 주무시고 나면 아버지는
“내 양식 갖다 놓은데 가야지”
하고 아들집으로 기어이 데려 달라고 하신다. 아마도 아버지는 집도 논도 소 판 돈도 하나뿐인 아들을 다주고 딸 셋에게는 아무것도 나눠 준 게 없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까.
어릴 때부터 남아 선호사상이 강한 유교풍습에 길들여진 딸들은 아버지의 결정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몸이 점점 쇠약해진 아버지는 2년 만에 요양원에 가시게 되었다. 나는 미용실을 하고 있었고, 언니도 동생도 아버지를 돌 볼 처지가 못 되었다. 육이오 참전 자격으로 보훈요양원에 가셔서 이년동안 계시다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요양원에 계시면서 고향집에 가보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씀했지만, 약해진 몸이 더 나빠 질까봐 차일피일 미루다 끝내 가시지 못하고 먼 길 떠나셨다.
아버지께 못 다한 마음을 담아 어르신들의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다듬어 드리고 나니 내 마음도 개운하다. 삶의 끝자락, 생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이승의 종착역이자 천국행 대기실에서 그들은 오늘도 자녀를 그리워하며 무심한 하루를 보내고 계실 것이다. 언젠가 그들을 싣고 갈 열차가 오는 그날까지 평안하시길 빌며, 요양원을 나서는 내 마음엔 시린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