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서약
저녁놀이 붉게 익어 가는 시간. 서울 어느 한 구석.
징, 꽹과리, 장구, 피리, 북 둥둥 울어 대는 풍악 소리에
어~ 얼~ 쑤~! 신바람 나는 장단까지 발걸음을 총총 내달리게 한다.
원삼, 족두리, 사모관대(사모를 쓰고 단령포를 입은 다음 각대를 띠고 목화를 신은 옷차림), 가마, 차일 ……
아! 어린 시절
마당에서 덕석 깔고 치렀던 혼례식.
어른들 틈새를 뚫고 시린 손 호호 불며 연지곤지 신부에게 영혼을 빼앗겼던 추억이 잠시 날 그 옛날에 머물게 한다.
해질녘 붉은 석양을 배경으로 한 전통 혼례 잔치.
적당한 조도와 기온이 하객들의 마음을 평온하고 여유롭게 한다.
하얀 차일 아래 대롱대롱 청사초롱, 녹색 잔디, 희고 둥근 테이블의 단조함이 혼잡함을 거부한 듯 알맞은 수의 축하객들을 안락하게 해 준다.
신랑신부를 거드는 정갈한 자태의 일손들마저도 혼례식을 정숙하게 이끌고 있다. 21c 오늘이 19c 현실인 양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혼례식 정경 이모저모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시대를 초월한 조화로운 연출에 난 한 점 소품이 되어 홀연히 밀려드는 그리움에 행복감이 솟구친다.
피아노 건반 아닌 상쇠의 걸출한 입담과 신명나는 꽹과리가 혼례식이 시작됨을 고한다. 교자에 탄 신랑이 의젓하다. “신부 납시오“ 가마꾼의 호령에 마당이 들썩들썩 즐거움으로 한데 어우러진 혼인 잔치 마당에 서서히 어둠이 깔리며 청사초롱이 밝혀진다.
행여 눈물 쏟을세라 손아귀에 쥐고 있던 손수건이 무용지물이 되고,
사모관대 단령포가 참으로 귀엽게 어울리는 신랑의 느닷없는 사랑 고백가 김건모의 <사랑해>.
해거름 혼인잔치를 희극미의 극치로 우레 같은 박수를 받는다.
서툰 음정, 박자에 더듬거리는 가사에도 아랑곳없이 끝까지 완창을 하는 신랑의 용기 있는 사랑 고백.
『 ……
사랑해, 사랑해
너를 내 자신보다 더……
꽃이 피면 나비가 되 줄게
비가 오면 우산이 되 줄게
내 품에 안겨서 넌 비를 피하렴
낙엽지면 친구가 되 줄게 ……
눈이 오면 지붕이 되 줄게
내 코트 안에서 넌 편하게 쉬면 돼……』
신랑 자신보다 신부를 더 사랑하겠다고,
그 무거운 사랑의 짐을 지겠다고 소리소리 지르면서도 싱글벙글.
스스로 사랑의 함정에 들며 무한한 사랑의 시혜자가 되겠다는 신랑의 지고지순한 순정 앞에,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받는 일이란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진정 축복받은 행복한 신부다.
붉은 단령포 속 꼬옥 맞잡고 있는 신랑신부의 두 손이 시선을 끈다.
왠지 가슴이 따뜻해지며 눈시울이 촉촉해 진다.
어떤 말보다 귀하고도 진한 사랑이 꼭 잡은 두 손에 혈류처럼 흐르고 있으리라.
사랑의 책임을 스스로 떠안고 절대자의 사랑을 닮고픈 신랑의 서약 앞에 오늘의 신부가 달빛처럼 서 있다. 거기 또 한 사람 29년 전 한 신부였던 내가 고즈넉이 서 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한결 같이 사랑하리라”
아직도 귀에 쟁쟁한 혼인 서약.
첫댓글 예스럽고-클레식하고-고전적이며-전통적인 혼례의 아름다움을 감상합니다.우리 것에 대한 아름다움.문화양식.그 전통혼례를 예전에 보았지요.큰 조카 며느리 혼례식의 하객으로.연지곤지 찍은 신부의 화안한 얼굴이 기억에 생생합니다.그런데 아울러 생각나는 건 끝나고 흰 드레스 촬영을 하던데요.마악 봄이 시작되던 잔디 위의 축하 물결들이 밀려옵니다.서양의 혼인식은 때로 충동적이고 결렬한 감정들이 보여지기도 합니다.영화속 장면이라 극단적 표현인지 모르지만 길에서 만나거나 며칠 감정이 동해서 급히 신부님을 찾아가 둘이서 결혼하지요.결혼식에 얽힌 장면들.그에 비해 우리 동양인들은 참 정적입니다. 찬란한 햇빛보다 감추어지고
조금은 분홍빛 마음들이 살짝 숨겨진 하얀 달빛이 어려있는 신부..아름답습니다.그리고 사모님의 동양적 실루엣 취향에 동감합니다.
결혼 서약으로 사랑을 맹세하는 것은 아니고
결혼 서약을 계기로 사랑을 키우고 열매 맺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순간의 약속이 남은 전 일생을 지배하는 것은
만약 일순간의 약속이 잘못되었을 때 전 일생을 지배할 것인가.\?
결혼을 계기로 출발 좋게 사랑이 무르 익기를 나는 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양보하고 협상하고
공동 관심사를 찾아 매진하는 것이 부부간의 정 일까요.
가장 큰 공동의 관심사는 자식이고 그리고 여러 가정사 겠지요.
결혼은 출발이고 희망입니다. 내 생각에는 약속은 어그러 질수 있거든요.
그래서 결혼은 조심하고 신중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신랑의 다부진 약속 부럽습니다.
너무 상업적이고 혼잡한 요즘 결혼식장에 비해 아주 여유있고 결혼식 내내 함께 참여하니 참 즐거웠습니다. 요즘 특색있는 결혼식을 하는 젊은이들이 꽤 있더군요.멋있고 큰 의미로 다가와요.
'혼인서약', 살다보니 유명무실 되어버린것같아요.자꾸 무뎌져만가는 결혼생활,결혼기념일때마다 서약을 하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