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추억하는 기록
- 구석본의 시들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얼마 전에 장률 감독의 “경주”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이 추억 속에서 보았던 춘화를 다시 보러 경주를 찾아 간 이야기이다. 조금 뜬금없는 설정이지만 이걸 통해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해 준 영화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욕망의 충족은 오직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아니 그렇다고 믿는다. 그래야 지금의 억압과 구속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욕망의 실현은 우리를 옭아매는 관계와 관계들의 힘과 그것이 만든 사회의 틀과 규율에 갇혀 끝없이 연기된다. 그래서 과거나 과거를 기록한 텍스트에는 그런 욕망의 실현이 가능했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래야 현재의 이 욕망의 상실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진에 집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음으로써 애써 미리 추억 속에 들어가 행복을 찾으려는 퇴행을 감행한다. 영화 속의 주인공 역시 무의식적으로 사진을 찍어 지금의 현재를 미리 기억으로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기억이나 그것의 기록인 역사는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다. 자신을 찾는 아내의 목소리와 기억 속의 물소리 사이에서 그는 비틀거릴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모두는 사라져 간다.
구석본 시인의 시들은 바로 이러한 기억과 욕망의 문제를 생각하게 해준다. 구석본 시인에게 기억은 욕망의 기록이다.
은빛 고요가 불타오르는 쟁반 위에
구워진 생선 두 마리가 놓여있다
한 생을 자글자글 태우던 허기,
정면 체위로 누워있다.
...(중략)...
알에서 깨어나
내 안에서 끊임없이 푸드득거리는 치어들,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채울 수 없는 허기로 자글자글 타오르는 나를
쟁반 위로 스르르 올려놓고 있다.
-「식사」 부분
구워져 식탁 위에 누워있는 고기는 “자글자글 태우던 허기”처럼 욕망의 상징이다. 욕망은 허기 즉 결핍을 채우려는 데서부터 온다. 하지만 우리의 근원적인 결핍은 채울 수 없기에 욕망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종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내가 아무리 “구워진 생선” 같은 대상들을 통해 나의 욕망을 충족하더라도 채울 수 없고 내가 다시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 나는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먹은 생선이 알을 낳아 만든 치어들의 욕망이다. 내가 먹은 생선은 사라짐으로써 욕망의 기억으로 남는다. 그 기억이 다시 나를 욕망하고 나는 그 대상이 되어 다시 먹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욕망은 단지 추억이 재생산하는 것이고 그 추억 속에 나는 욕망의 주체이며 동시에 대상이기 때문이다.
다음 시에서는 그러한 기억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수목원을 거닐다 나무에 걸려 있는 명패를 보았다. 굵은 고딕체로 개옻나무라 쓰여 있고 그 밑 작은 글씨로 ‘추억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 고 쓰여 있다. ‘추억이 약이 된다’ 멋진 나무야,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수액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였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그 명패를 ‘추억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로 읽기로 했다.
...(중략)...
약을 마신다. 정성껏 달인 추억을 마시면 온 몸으로 번지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나의 영혼이 조금씩 말라간다. 언젠가 완벽하게 증발하면 나 또한 누군가의 추억이 될 것이다.
봄날, 추억처럼 어두워져 가는 산길을 홀로 접어들어 가고 있는 나를 본다.
- 「추억론」 부분
시인은 나무에 걸려 있는 명패를 오독한 것으로부터 그리고 바짝 마른 한약재를 바라보면서 추억은 약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른 약재처럼 자신의 삶도 결국 추억으로 박재화되리라고 생각한다. 그 박제화 된 추억이 누군가를 위한 추억이 될 수 있다면 결국 우리의 시간들은 가치 있는 것이었다는 시인의 사유가 읽혀진다.
그런데 약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추억이 약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슬픔을 치유하는 약이다. 슬픔은 욕망의 좌절이 몰고 온 감정의 결과이다. 근원적인 결핍을 매우기 위한 우리의 욕망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욕망은 더 큰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채우지 못한 욕망의 빈틈이 우리를 슬픔이라는 정서로 이끈다. 추억은 바로 이 채울 수 없는 욕망의 빈틈인 슬픔의 치료제인 것이다. “어두어져 가는 산길을 홀로 접어들어 가고 있는 나”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슬픔을 견디는 것은 그것을 “추억처럼”이라는 부사어를 통해 수식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다음 시에서 이 점이 좀 더 분명히 나타난다.
바람과 살 섞으며 혹은 바람으로 살아온 한 생이
제 가슴 밑바닥으로만 가라앉힌 그리움,
돌멩이 같은 고치가 되어 애벌레를 품고 있어
조심조심 다뤄야 해,
그리움의 애벌레만은 끝내 죽이지 않아야 해,
눈동자 없는 눈으로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죽은 그리움을 소금물로 반죽하여
조금씩 떼어 준다
먹어,
허무의 핏물이 다 빠져야 제 맛이 나지만
오늘은 시간이 없어, 그래도 먹을 만할 거야,
그들 앞에서 내가 먼저 먹는다.
- 「그리움 먹기」 부분
그리움을 먹는다는 것은 추억으로 우리들의 욕망을 채우는 행위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추억이기 때문에 그것은 “죽은 그리움”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날 것의 생생한 신선식품이 아니라 “허무의 핏물이 다 빠져야 제 맛이 나”는 가공식품이다. 우리는 그 가공식품으로 허기를 달래고 욕망을 잠재우고 슬픔을 치유한다. 하지만 그것은 “먹을 만”한 거지 절대로 근원의 허기를 채울 완전한 음식은 아니다. 그리움은 단지 욕망의 대체물의 욕망의 희미한 기억의 불완전한 기록일 뿐이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이 희미한 기억으로 우리는 슬픔을 견딘다.
그런데 기억으로 슬픔을 견딘다는 것은 외로움을 동반한다. 사람들과의 기억이라도 그 기억을 대하는 주체는 나 혼자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기억하는 것은 그 기억이 아무리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 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 기억을 대면하는 나는 혼자이다. 그러므로 추억을 기억하는 사람은 고독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 그리움의 고독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당신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 어딘지 모르겠어, 안도 없고 밖이 없는 곳,
처음도 끝도 없는 곳,
구름이 모여 허공 속으로 수많은 가시를 퍼뜨리고 있는 곳
무지갯빛 가시에서 무지개가 솟기도 하는 곳,
날아오르는 새 떼들도 여지없이 가시가 되어
허공 속으로 박히고 있어.
누구랑 있어? 혼자야.
복사된 무수한 혼자.
얼마 후 구름 속으로 들어갈 거야
그리고 수많은 가시로 분해되어
마침내 허공 속으로 뿌리 내릴 거야.
- 「혼자, 꽃을 보다」 부분
왜 시인에게 전화를 한 당신은 혼자일까? 시인이 그 사람의 욕망을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서로의 욕망으로 소통하는 대상인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기억을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혼자이고 그 대상과 나는 분리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전화가 왔다는 것은 말로서만 서로를 전달해야 하는 기록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 세계에는 나와 타인은 분리될 수밖에 없다. 그의 기록과 나의 기록이 다르고 그가 복사한 자신과 내가 복사한 그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억하고 추억해야 한다. 그것이 슬픔을 치유하는 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추억이 슬픔을 치유하는 약이 된다면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의 기억이 지워지는 것이다. 구석본 시인은 그 두려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저 백지, 새와 구름과 나무를
한 세상의 풍경으로 지우고 있다.
더 깊은 곳에서는
지금 바람 한 점이 날개를 접고
자신의 냄새를 지우고 있다.
여자가 남자를 지우고 아이가 엄마를 지우는 것이
영롱하게 반사되고 있는 저 백지,
아무 기록도 없는 게 아니다.
지우고 지워진 흔적이 투명하게 쌓인 바닥이다.
- 「백지」 부분
백지는 기록된 것이 없는 종이가 아니라 “지워진 흔적”이다. 지워진 흔적이라는 이 아이러니가 이 시의 깊이를 만들어 낸다. 우리의 삶은 이 시의 구절들에서처럼 지우기의 연속이다. 우리는 사랑의 기억을 지워 상실의 아픔을 달래고 “자신의 냄새”와 같은 자신의 찌질한 삶의 흔적들을 지우면서 애써 힘든 시간을 잊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렇게 지운다는 것은 기록을 말소하고 기억을 망각하는 것이긴 하나 그것이 또 하나의 기록이고 흔적이다.
그래서 시인은, 위의 인용된 구절에서 빠져 있긴 하지만, 백지를 보고 “한 여자의 마지막 절규가 상형문자처럼 박혀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기록이 지워지고 추억이 사라진 흔적을 대하는 것은 이렇듯 공포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앞서 설명했듯이 우리의 욕망을 채울 추억이 사라져간 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백지는 바로 이 빈 공간이 주는 공포의 흔적이고 또 하나의 삶의 흔적이다. 욕망을 채울 수 없는 슬픔이 추억으로 대체되지 못하고 빈 공간으로 남을 때 그것은 공포가 된다. 우리가 치매를 그렇게 두려워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복잡한 현대 사회가 공포로 다가오는 것은 그 무시무시한 변화의 속도가 우리의 추억을 기록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디지털 카메라나 캠코더 등의 디지털 기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하지만 어떤 기기도 추억을 재현하여 슬픔이라는 욕망의 빈곳을 채울 수는 없다. 오직 시만이 그것을 아주 어렵게 그리고 조금씩 채워나갈 뿐이다. 구석본의 최근 시들이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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