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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으로 돌아갑시다(3092)//// 조헌주 시집 『새로이 고운 덫을 놓고 햇볕을 얹어 주었다』 해설
조헌주 시집 『새로이 고운 덫을 놓고 햇볕을 얹어 주었다』 해설 (2022. 상상인)
철학적 시선으로 바라본 삶의 본질
마경덕 (시인)
도심을 지나가며 보았다. 가을바람이 가로수를 스칠 때마다 은행잎과 벚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미화원은 뿔뿔이 흩어지는 낙엽을 쓸고 있었다. 쉬지 않고 떨어지는 낙엽을 쓸어 담는 일이 부질없어 보였지만 청소원은 비질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생각의 부스러기를 그러모아 시를 쓰는 시인의 모습 같았다. 낙엽 한 장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겨있을까.
‘은행잎’ ‘벚나무 잎’ 이란 명사와 ‘떨어지다’ ‘뒹굴다’ ‘바스락거리다’ ‘쓸리다’ 라는 동사와 ‘노랗다’ ‘빨갛다’ 라는 형용사와 ‘엎치락뒤치락’ ‘뿔뿔이’ 라는 부사와 가을을 연출한 주변이라는 접속사와 위치와 시간을 알려주는 전치사까지 들어있을 것이다.
공기 중에 떠도는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감지하는 시 쓰기는 지루한 작업을 반복하는 미화원의 행위와 다르지 않다. 발에 밟히는 하찮은 낙엽처럼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에게도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의미’가 생겨난다. 계절을 다 써버린 빈 나무들이 봄이 오면 새잎을 내밀 듯이 고갈된 언어의 맥락에도 새잎이 돋기를 기다리며 시인은 끈질기게 시를 쓴다.
위선환 시인은 “어떤 시는 불편해도 참으며 읽는다. 시인이 시에 집중했구나, 진지했구나, 야위며 앓으며 썼구나ⵈ 시와 시인이 함께 읽히는, 오히려 시인이 먼저 읽히는 시가 그렇다. 언어가 낭비되고 시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구태여 불편을 견디면서 그런 시를 읽는 것은 그 시를 쓴 시인의 태도에서 궁극이나 본연을 탐색하는 노력이 보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앓으며 야위며 가장 적합한 언어를 찾아내는 시 쓰기는 진지하게 내면을 살피며 본연을 탐색하는 일이기에 사물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나 인식은 대부분 작품에 반영된다. 시인이 추구한 시의 방향, 과거와 현재의 단서들, 드러난 문맥으로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시인의 말’을 살펴보면 “멋진 숲을 뒤로하고 낯선 도로를 건너 먹이를 찾아 나선 사슴처럼,/다시 돌아가야만 할 길을 나는 잃어버리고 말았다./잃어버린 길은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만 있었다.”고 한다. “멋진 숲을 버리는” 조헌주 시인의 결단력은 안일한 세상에서 바람이 거센 시의 바다에 본격적으로 다가가려는 행위로 보여진다. 안정된 곳을 버리고 낯선 곳을 모험하려는 선택은 다시 돌아갈 길을 염려하지 않는 시에 대한 열정이며 패기(霸氣)일 것이다. 잃어버린 길은 잃어버린 과거의 시간 속에만 존재하기에 시를 택한 삶의 방식은 스스로 돌아갈 길을 지우고 배수진을 치고 벌이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결국 미지의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위험한 도로를 건너 낯선 곳을 향해 직진해야 한다.
서두의 일면을 통해 시를 대하는 조헌주 시인의 진지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짐작할 수가 있다. 배우가 의도적으로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무는 순간 객석마저 무대가 되어버리듯 관습적이며, 제한적인 시의 반경을 깨뜨리는 예기치 못한 충돌을 독자는 기대하게 된다.
청소년의 행복에 관한 ‘인문학’을 강의하는 조헌주 시인은 ‘인간의 사상’이나 가치 탐구를 우선으로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무엇이 정답이며 궁극적인 행복이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탐색한다. “차가운 수학에 가깝다”는 철학은 빈틈없는 이론과 도리에 맞는 이치를 논리적으로 증명했을 때 세상을 설득할 힘이 생긴다. 개인적 가치관보다는 사회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시인은 풍요한 물질적 삶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향과 시선이 다르다.
우리의 삶에는 얼마나 많은 질문이 존재할까. 선택한 삶에 답을 맞추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선택이 오답이라고 믿는 또 다른 사람들과 섞여 갈등하고 대립한다. 크고 작은 사건들, 풀지 못한 오해들, 가려진 진실들, 골이 깊은 이념, 삶과 죽음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조헌주 시인의 저력은 인문학(人文學)에서 시작되고 인문학은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인자(因子)로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조헌주 시인은 곳곳에 산재한 “삶의 통증”을 담아내고 올바른 “삶의 가치”를 철학적 사유를 접목해서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고 있다.
아직은 정지화면
플랫폼에 배우들 몇몇을 마네킹처럼 세워두고 철마는 초조하여 바짝 당겨진 고삐에 콧김만이 뜨겁다 역장의 스탠바이 큐 사인에 상영관이 트레일러 위에 얹혀 천천히 움직인다 배우들이 서서히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지워져 가고 육중한 무게가 시계보다도 정확하게 마디마디 시간을 끊어내며 그 무슨 단조로운 무성영화처럼 기차는 간다
지구 위엔 수많은 궤도가 존재하지만 상영관과 지구 사이에 벗어날 수 없는 숙명처럼 정해진 두 줄 레일이 상영관의 이름과 영화 제목을 정한다
태양이 영사기인 한낮의 영화관은 암막이 필요 없다 영사기는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지만 상영관은 일정한 궤도에 따라 운행하는 이유로 눈이 부실만큼 영사기가 관객석에 역광을 비추는 경우도 있어 3D 영화관은 아니지만 검은색 선글라스가 필요할 때도 있다 막간의 휴식을 위하여 지구의 얇은 눈꺼풀이 셔터를 내려 갑작스런 정전처럼 영사기를 가리는 경우도 있는데 허스키한 폐의 비명이 철로에 갈리며 마디마디 끊어질 때는 휴식을 취하되 영화의 스토리를 놓치지 않으려면 눈은 뜨고 있어야만 한다
화면은 끝나지 않을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다가 중간 중간 지루한 사람들을 내려주고 새로운 관객을 받는다 젊은 여자는 무성영화 따위 재미가 없어 이어폰을 꽂은 채 눈을 감았고 눈물겨운 영화를 다시 보러 왔다는 할머니는 짧은 영화가 아쉬운 듯 보따리 하나 무릎에 놓고 눈물을 보인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블록버스터보다는 흐르는 자연에 감정 하나 하나 박아 넣을 수 있는 고전 영화가 좋아 나는 KTX 대신 통일호나 무궁화호를 탄다 젊은 날에는 야간 상영관도 찾아 상영관 복도에서 맥주도 마시며 영화보다도 시끌벅적한 잡담으로 시끄러웠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던 시절 영화의 피날레가 정동진이라는 자막과 함께 끝나면 모든 관객들이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관람객이 점점 줄어가는 영화제에서 큰 상 한번 받아보지 못한 이 예술 영화는 비둘기호처럼 블록버스터에 밀려 이제 곧 상영관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 「완행열차」 전문
‘빠르게 가는’ 것과 ‘느리게 가는’ 것이 한 시대에 공존한다. 사라진 것들을 소환해서 다시 보여주는 정동진 야외상영관으로 가는 길, 흘러간 한 시대가 다가오고 중간 중간 지루한 사람들을 내려놓는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순간 사라진 공간은 귀환하고 그 공간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발생한 순간순간의 의식은 유기적인 연속체로 이어진다. 역장의 스탠바이 큐 사인에 철로 위의 기차는 어느새 상영관이 되고 훌쩍 시대를 건너뛴 그리운 것들이 곁에 와서 훌쩍거린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여주는 “다채로운 장면”들이 환상적이다. 이제는 큰 역에만 정차하는 운행 속도가 빠른 고속열차로 낭만이 사라진 시대, 한때 느리게 달리는 완행열차는 청년들의 청바지와 기타소리와 함께 달렸다. 각 역을 들러서 가는 승차비가 저렴한 ‘비둘기호’와 ‘통일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우등열차였던 ‘무궁화호’도 고속열차에 밀려 현재는 전동열차가 없는 구간의 실질적인 보통열차에 지나지 않는다.
조헌주 시인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노리며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만든 영화 ‘블록버스터(blockbuster)’ 보다는 자연과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고전 영화가 좋다고 한다. KTX 보다는 통일호나 무궁화호를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대규모의 세트와 많은 인력과 편집 과정에서 다양한 특수 효과 등이 도입되는 대형 ‘블록버스터’에 밀려 영화제에서 큰 상 한번 받아보지 못한 이 예술 영화는 ‘비둘기호’처럼 이제 곧 상영관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점점 대형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우리는 크고 화려하고 편리하고 멋진 외모에 매료되어, 불편하고 소박하고 작은 것들을 외면하고 살아간다. 미처 보지 못한 맹점이 존재하기에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흘러간 시간을 철로 위에 태우고 함께 달리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와 소중함”을 이중적 구조로 조명한 작품이다.
아테네에서 그는
한 마리 성가신 등에*에 지나지 않았다
이승에서 떠밀린 그는
이제 독배를 마시고
새로운 여행을 떠나겠다 한다
호메로스를 만나러 간다고 한다
추한 얼굴에 맨발
지혜를 출산하던 산파
아테네의 등에는
그렇게 떠나갔다
추운 겨울 맨발로 서서
밤을 새워 고민했던 그는
산파이었기에
스스로 아이를 낳아주진 못했다
더딘 산고의 고통과 유산의 죄를
우린 산파에게 지웠다
하늘은 고통 없이는 아이를 주지 않았고
지혜는 고통과 함께 태어났다
― 「소크라테스에 대한 변명」 전문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해답이 떠오를 때까지 몇 시간이고 사색에 잠기다가 해답을 찾고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외모를 우선했던 아테네에서 못생긴 외모에 맨발로 누더기옷을 걸치고도 개의치 않았다. 그 이유를 물으면 오히려 당신들이 옷이나 신발에 길들여져서 불편한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윤리학을 철학에 도입한 ‘소크라테스’는 세상의 풍족한 물질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우선으로 두었을 것이다.
문학이 가진 기능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소등에 붙은 등에”라고 했다. ‘등에’는 소한테 붙어 소의 피를 빨며 소를 괴롭힌다. 문학은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세상이 택한 성공보다는 시인이 택한 실패가 더 삶의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궁핍한 살림살이 걱정보다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먼저였기에 시장이나 광장을 돌며 사람들을 붙잡고 저술보다는 대화를 통해 철학 활동을 하였고, 특히 상대방에게 계속 질문을 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을 썼다.
스스로 깨닫도록 돕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자연스럽게 묻고 대답하는 어릴 적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아버지는 ‘석공’이었고 어머니는 ‘산파’였다. 돌덩이로 포효하는 ‘사자’를 조각할 때 어떻게 이처럼 훌륭한 작품을 만드느냐 물으면, 아버지는 돌 속에서 사자의 울음소리를 듣고 꺼낸다고 했다. 산파였던 어머니는 엄마 배 속의 아기가 답답하다고 우는 소리가 들리면 아기가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것뿐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소를 괴롭히는 등에처럼 나태하거나 안일하지 않도록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며 세상을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은 우연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사형 선고에 묵묵히 복종하고 태연하게 독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 최대의 서사 시인 ‘호메로스’를 찾아가 또 어떤 논쟁을 벌이고 있을까. “하늘은 고통 없이는 아이를 주지 않았고/지혜는 고통과 함께 태어났다” 고 한다. 조헌주 시인은 산고의 고통과 유산의 죄를 산파에게 지우고 “경건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우리는 모두 태연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다.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
태초에 인간은 자유민이었으리라
문명이 자유에 족쇄를 채운 오랜 역사
아침이면 습관처럼
우리 스스로 노예의 사슬을 묶고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황량한 사막을
낙타처럼 줄지어 오아시스가 있다는
신기루를 향하여 걸어온 그 오랜 역사
다행히도 술의 기원이 먼저였으니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슬픔을 퍼올리며
기쁨으로 충만하여
용기를 돋우었으니
페르시아인들이 술을 마신 뒤에
중요한 일을 결정하였다는 것은
지극히 옳으며 인간적인 일이다
그리하여 술을 마시고 인간은 다시
태초의 낙원으로 회귀하고
낙원에서 돌아온 자는
아직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자를
개가 되었다고 비난한다
스스로 개가 되길 원했던
견유학파 철학자도 있었으니
개가 되는 것이 행복인지
인간이 되는 것이 행복인지는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 「술의 기원」 전문
인류는 B.C. 6000경부터 과실주를 제조하고 B.C. 4000년경부터 곡주를 제조한 것으로 추측할 뿐 인류가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문자를 사용하기 이전의 유적에서 술을 담는 항아리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술은 인류가 만든 음료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각 나라마다 기후와 특산물에 맞춰 고유한 음식 문화가 형성되고 자연스레 음주문화도 생겨났다. 하루의 노동에서 해방되는 시간, 술 한잔이 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술의 기원을 따라가면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온 역사가 있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로버트 더들리(Robert Dudley) 생물학 교수는 인간과 알코올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가설인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을 학계 최초로 제시했다. 한국주류산업협회에 실린 글을 인용해보면 가장 최초로 술을 빚은 생명체는 사람이 아닌 원숭이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원숭이가 나뭇가지의 갈라진 틈이나 바위의 움푹 파인 곳에 저장해둔 과실이 우연히 발효된 것을 인간이 먹어보고 맛이 좋아 계속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다.
시대별로 주종의 변천을 살펴보면 수렵, 채취시대의 술은 ‘과실주’였고, 유목시대에는 가축의 젖으로 ‘젖술’이 만들어졌고 곡물을 원료로 하는 ‘곡주’는 농경시대에 들어와서야 탄생했다고 한다. 술의 원료는 그 나라의 주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술로 만들 수 없는 어패류나 해수를 주식으로 하는 에스키모족들은 술이 없었다는 것이다.
“걸어 다니는 어원사전”의 저자 마크 포사이스 『술에 취한 세계사』 는 저자 자신이 열네 살부터 지금까지 해온, 음주에 관한 방대하고 실증적인 조사의 결과물로 만취야말로 인류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라고 단언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술꾼으로 진화했으며, 우주로 향하게 될 먼 미래에도 만취의 역사를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토록 인간과 술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술 취한 개다” 라는 속담이 있다. 술에 취한 사람을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주도(酒道)란 술을 마시거나 술자리에 있을 때의 도리(道理)를 뜻한다. 인간의 도리를 지켜 술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치면 약주도 독주로 변한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술을 과도하게 마시면 자제력을 잃게 되지만 적당한 양의 술은 인간의 영혼을 유연하게 만들어준다”고 했다. 공자도 소크라테스처럼 두주불사(斗酒不辭)형이지만 절대 취하진 않았다고 한다.
‘술’을 몹시 좋아한 페르시아인들은 매우 중요한 안건을 술을 마시면서 상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이 보는 앞에서 구토나 방뇨는 허용하지 않는 엄격함을 가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가 창설한 그리스 철학의 한 유파인 ‘견유학파’는 일체의 사회적 습관을 무시하고 문화적 생활을 경멸하며 “개와 같은 생활”을 주장하였다. 강인한 의지로 욕망을 억제하는 것에 의해 행복에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 학파의 가르침이었다. 걸식생활(乞食生活)을 실행한 통 속의 철학자라 불리는 ‘디오게네스’에게 나무통 하나는 넓고 편안한 거처였다.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스스로 개가 되길 원했던 ‘견유학파’ 철학자처럼 혹독한 수행으로 ‘개’가 되는 것이 행복인지 문화적 생활을 누리며 평범한 ‘인간’이 되는 것이 행복인지는 각자의 몫이며, 술을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도 각자의 자유의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누구나 한번 크게 아파서 소리치는 때가 있다. 그 진실한 절규를 모은 게 바로 역사” 라고 조세희 작가는 말했다. ‘술’ 역시 인간에게 가장 진실한 “절규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아이는 훔친 사과 하나를
남모르게 감추었다
사과의 향과 고운 빛깔에 취한 아이는
바로 먹지 못하고
내일이나 그 언제쯤 그 맛을 맛보리라 생각했었다
어느 날 잊었던 사과를 떠올린 아이는
서랍 모퉁이에서 썩은 사과 하나를 꺼낸다
그 향기롭고 빛나던 사과는 하얀 곰팡이가 덮여
쭈그러진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실망한 아이는 그날 먹었으면 좋았을
그날의 사과 맛을 그려본다
하지만 까닭 없이 불안한 아이
아이는 달콤하고 빛 고운 사과만을 골라
열심히 개미처럼
오늘도 창고만을 채운다
썩어버린 현재를 남몰래 감추고
언젠가 다시 만나길 기대하면서
― 「아이와 사과」 전문
‘훔친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미 내 것이 아니므로 감춰도 끝내 내 것이 되지 못한다. “사과의 향과 고운 빛깔에 취한 아이는/바로 먹지 못하고/내일이나 그 언제쯤 그 맛을 맛보리라 생각했었다” 에서 “생각했었다”에 주목해보면 말 그대로 실천에 옮기지 못한 생각만 있다. 생각은 생각에서 머문다. 숨겨두었다가 혼자만이 가지려 했던 계획은 무산되고 변질된 사과는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그 감추는 행위는 다시 반복된다. 썩어버린 과오를 감추고 오늘도 개미처럼 창고만을 채운다. 남보다 뒤처지거나 남보다 더 가지지 않으면 허기지고 불안한 사람들, 그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왠지 손해 보는 것 같아 무언가를 향해 남보다 먼저 앞서서 돌진해야 한다. 대출까지 받아 불법도박과 주식투자와 가상화폐와 부동산 투기를 하며 헛된 꿈을 키운다. 서랍에 숨겨둔 사과에 곰팡이가 스는 것도 모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산을 늘리는 것에만 급급한다. 투자금의 몇 배로 몸을 늘려 다시 만나길 기대하지만 그 결과는 불투명하다. 희망이 사라진 암울한 시대에 살아가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과연 “자신의 사과”는 있는 것일까.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자신’이며 ‘미래의 자신’과 이어진다는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에 동의하며 사라진 것들을 소환하지만 훔친 사과는 말 그대로 온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하는 훔친 사과일 뿐이다. 「아이와 사과」 는 한탕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인간의 탐욕과 현시대의 부조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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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방안의 한기를 내몰기 위해선
내 몸의 온기를 조금은 내주어야 한다
고요를 깨는 마른기침 몇 번과
마음속 온기조차도 조금은 내주어야 한다
방안이 오히려 나의 온기를 온종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너 마음에 작은 창 하나도 내지 못하여
상냥한 아침 햇살 맞이하지 못하고
황홀한 저녁놀도 들이지 못하여
노란 형광등 하나 밝혀두고
해바라기 그림도 하나 걸어 두었다
너는 나의 옷차림으로 하여 계절을 맞이하였고
어느 해 겨울엔 불면不眠을 노랗게 밝혀둔 채
새벽까지 부끄러운 연서를 쓰고 있었던 나를 지켜보았다
이제는 박제된 시간으로 봉인한 작은 꽃다발
창백하게 시든 사랑
나에게도 사랑하는 사람 하나 있었음을 알리듯
노란 가슴에 훈장 하나 매달려 있다
― 「고흐의 노란방」 전문
조헌주 시인이 벽에 걸어 둔 ‘노란 해바라기’ 그림은 한때 사랑하는 이에게 연서를 쓰며 느낀 기쁨과 설렘의 색이다. 차디찬 방을 데우는 노란색에는 아름다운 기억이 깃들어 있다. 세상과 차단된 공간에서 유일하게 세상으로 나가는 출구이며 ‘해바라기’ 그림 한 점은 자신에게 주는 위로의 메시지이다.
“너 마음에 작은 창 하나도 내지 못하여/상냥한 아침 햇살 맞이하지 못하고/황홀한 저녁놀도 들이지 못하여/노란 형광등 하나 밝혀두고/해바라기 그림도 하나 걸어 두었다”에서 알 수 있듯이 온기가 사라진 시린 방은 그림 한 점으로 “고흐가 사는 방”이 되어버리고 시인은 외롭게 살다간 ‘고흐’가 된다. ‘해바라기’ 그림과 ‘고흐’와 ‘시인’은 하나가 되어 그 방에 동거 중이다.
후기 인상주의 대표적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동료 화가인 폴 고갱을 함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작은 집을 빌려 노란색으로 페인트를 칠했다. 태양을 사랑했던 고흐는 태양을 닮은 ‘해바라기’를 그렸다. 그때 그려진 ‘해바라기’는 반 고흐에게 ‘태양의 화가’라는 호칭을 안겨주었다. 고흐는 ‘해바라기’ 꽃이 돋보이도록 탁자와 화병도 한 가지 색으로 단순하게 칠하고 물감을 두껍게 칠해 화병에 꽂힌 해바라기를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해바라기’는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격정적인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는 ‘영혼의 꽃’으로 그의 짧고 비극적인 삶과 예술을 반영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고갱에 대한 열광적인 환영, 그리고 환영의 의미로 태어난 ‘해바라기’, 이 작품이 완성되고 고갱과의 불화로 자신의 귀를 자르며 정신발작 증세를 보인 반 고흐, 그토록 고대하던 고갱과의 동거는 두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 ‘해바라기’ 속에 담긴 갈등을 숨기고 고흐의 ‘해바라기’는 여전히 시들지 않는 명작으로 남았다. 아름다운 곳에서 친구 고갱과 함께 살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희망에 가득 찼던 이 시기가 고흐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때였듯이 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던 기억도 시들지 않는 명작인 순간들이 있지 않았을까.
'슈베르트’는 인간의 원초적인 고독에 대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타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타인의 기쁨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상대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옆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라고 하였다. 노란 가슴에 훈장처럼 매달려 있는 것은 흘러간 시간이며 사랑의 흔적이기에 시인은 쓸쓸한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며 시든 꽃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관심 밖으로 밀려난 존재의 이면을 ‘클로즈업’함으로써 살아야 할 단서를 찾아내는 시인은 이 세상의 슬픔과 맞서 ‘내성’을 키우고 있다.
겨울에는 선線들만이 살아남는다.
황태 덕장에 내어걸린 겨울은 한여름 찌운 잉여의 살들을 마른 바람이 새긴 결 따라 살뜰히도 뾰족하니 잘도 빼내어 말렸구나.
시냇길 옆으로 난 마을 길 따라 듬성듬성 난 바람결 따라 녹이 슨 대문들 지나 메마른 형태들로 흩어놓은 쓸쓸한 겨울의 추상抽象을 본다.
닫힌 대문 밖에 내어놓은 아이처럼 이름 모를 화분 하나 풀이 죽어 놓여있고 풍성한 잎새에 가려 한여름엔 보이지 않던 고단하게 늘어진 전깃줄이 전봇대를 힘겹게 부여잡았다. 빨랫줄에 널린 몇 마리 참새들 바람에 일렁이며 외로이 펄럭일 때 높은 나무 덩그러니 심장처럼 박힌 까치집은 언제나 겨울엔 더 커져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 동심 묻은 앳된 낙서가 폐가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은 햇살 받아 따사로운데 고운 감 두어 개 담장 너머로 오지 않을 아이들을 기다리고 메마른 다리로 여윈 가지 움켜쥔 산새 하나 집을 지킨다.
모두가 숨죽인 적막한 겨울. 눈은 순결하게 대지를 덮고 그 위에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쓸쓸한 이야기를 흔적으로 남겼다. 간밤에 마을까지 내려온 노루는 냇가를 따라 다시 산 위로 사라졌고 먹이를 찾아 눈 위를 서성이던 새 발자욱은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첫 새벽 기차 타러 일터로 떠난 어느 가장의 정직한 발걸음은 해 뜬 늦은 오후에야 사라질 것을 안다. 쓸쓸한 생각을 일으키는 바람. 생각조차 깎아내고 깎아내어 한 줌의 독백 가슴에 남긴다. 나의 유년의 이른 아침 머언 일터로 떠난 아버지의 발자국은 항상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나 있었다.
겨울도 이제 끝나갈 무렵. 얼어붙은 대지에서 메마른 선으로 주고받았던 감정의 언어들을 밟아가며 지난至難한 생명들끼리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던 이곳에 다시 눈이 내린다. 아직 선명했던 발자국. 한 점 두 점 내려앉는 눈이 삶의 흔적들을 말없이 몰래 지우고 연민의 그림자 하얗게 덮인 자리에 새로이 고운 덫을 놓고 햇볕을 얹어주었다.
― 「겨울의 기억」 전문
눈에 덮여 “형태와 선”만 남는 겨울, 황태 덕장은 추위로 ‘명태의 살’을 말리고 있다. 바람의 손길에 조금씩 줄어든 명태는 황태가 되기 위해 기꺼이 ‘피와 살’을 말린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은 모두 야위고 허물어지고 스러져버렸다. 추위 하나로 무릎 꿇게 하는 ‘자연의 힘’이 치열하다. 눈은 수북하게 쌓여도 ‘겨울의 뼈’는 앙상하게 드러난다. 이 파리한 창백함 속에도 뜨거운 생명이 꿈틀거린다. 고적함이 느껴지는 눈 덮인 대지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침묵하지만 조헌주 시인은 눈 덮인 그 아래 살아있는 것들의 호흡을 듣고 있다. 자연현상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그 과정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마을까지 내려온 ‘노루’는 산으로 돌아가고 눈밭을 맴돌던 발자국은 남아있다. 배고픈 ‘노루’가 마을로 오기까지 다짐한 결심은 왜 그냥 돌아섰을까. 배고픔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인 것일까. 그 망설이던 발자국이 또 다른 길을 내고 있다. 짐승이 마을로 내려오고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따라 봄이 오는 것처럼 첫새벽 마당을 가로질러 일터로 떠난 “아버지의 발자국”도 아이들에겐 희망이었을 것이다.
대문 밖으로 내쫓긴 아이처럼 풀죽은 무언가를 키우던 화분과 고단하게 늘어진 전깃줄, 빨랫줄에 널린 몇 마리 참새들, 높은 나무에 덩그러니 심장처럼 박힌 까치집ⵈⵈ 고요와 소란함, 차가움과 뜨거움, 어둠과 빛, 봄을 잉태한 겨울, 사라짐 속에 감춰진 생명력, 유년의 기억과 현재의 시간, 이처럼 이중적 구조로 짜인 “시의 골격”이 미쁘고 단단하다. 찬찬히 시를 따라가면 황량한 겨울이 맑은 소리로 여음을 남긴다. 고적한 백색의 풍경을 세밀하게 그려낸 시인은 겨울의 매서움을 알고 있기에 겨울의 꼬리에 잇대어올 봄을 현재의 장소에 가설하고 “내면에 안착한 상처”를 슬쩍 보여준다. 이 서사를 부추기는 힘은 유년에 겪은 선험적 경험이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감정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숙성된 경험으로 쓴다”고 했다. 겨울의 심장에 자리한 이 고요한 파문은 “사라짐과 기다림”이라는 두 개의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겨울의 쓸쓸한 한때를 세밀화처럼 그린 「겨울의 기억」 은 시의 깊이와 “시인의 저력”을 충분히 증명한 작품이다.
잠들어 있을 때 모든 살아가는 것들은
연민의 이불을 덮고 잔다
아기도 어른도 노인도
착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오늘 치열하게 싸웠던 적군도 아군도
도둑도 거지도 부자도 대통령도
아빠도 엄마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여자 친구도 그녀의 남자 친구도
노숙자도 고단한 여행자도
승려도 목사도 신부도 수녀도
강아지도 고양이도 어항 속 물고기도
초원의 사자도 산속의 토끼도
모든 감정과 생명 활동을 멈추고
쓸쓸하고 평화롭게 지상에 머리를 누이고
깨어있는 것들에게 말없는 위로를 받는다
빠짐없는 하늘의 그물은
고단한 생명들의 영혼을 위로하여
눈물로 연민의 이불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덮는다
―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전문
얼마 전 이태원 ‘핼러윈’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압사를 당하는 큰 사고가 있었다. 그 장소를 목격하거나 그 자리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사람들과 그들을 구조했던 사람들은 모두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이야기했다. 나는 살아서 ‘다행’이라기보다는 나만 살아서 ‘미안’하다, 구조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죄책감’이 든다고 했다. 죽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뛰고 달리고 웃고 울고 말하고 노래하던 그 모든 동작들은 죽음속으로 사라져 미동도 없다. 누구도 깨울 수 없는 ‘깊은 잠’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인생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 여겼다. 플라톤은 철학을“죽는 연습”으로 규정했다. 이 깊은 잠을 살아있는 자들은 냉정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이 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롭게 지상에 머리를 누이고 깨어있는 것들에게 위로를 받는다. 죽음은 자취를 지우며 사라지고 슬픔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빠짐없는 하늘의 그물은/고단한 생명들의 영혼을 위로하여/눈물로 연민의 이불로/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덮는다‘고 한다. 하늘의 그물을 빠져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은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영면에 드는 영원한 안식인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응하며 살아내야할 남은 자들의 이야기이다. 성찰의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어느 노시인은 시의 깊이에 대해 “살아서 내가 체감하는 깊이는 고작 내 키가 묻히는 깊이일 것이다. 죽어서 내가 체감하는 깊이 또한 고작 사지를 펴고 누워서 흙이 되는 깊이일 것이다 ⵈ 아직은 눈 뜨고 죽음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그 깊이는 한정할 수 없다. 그렇게 한정할 수 없음이 나와 세계와 언어가 함께 묻히는 깊이이다.” 라고 하였다.
“그림자 하얗게 덮인 자리에 새로이 고운 덫을 놓고 햇볕을 얹어주었다”는 조헌주 시인은 시 속에 밝은 ‘에너지’가 충일하다. 불가능을 긍정으로,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는 그의 ‘에너지’는 암울한 주변을 환기시킨다. 앞으로 기회도, 시간도 넉넉하다. 갈수록 시는 더 깊어질 것이 자명하다. 미국의 시인인 ‘랠프 에머슨’은 “얄팍한 사람은 운을 믿고, 환경을 믿는다. 그러나 강한 사람은 원인과 결과를 믿는다”고 했다. 결과는 노력의 산물이다. 시 쓰기에 요행은 없다. 조헌주 시인은 또 어떤 대상과 철학적 사유를 결합해 그만의 시를 엮어낼 것인지 기대가 크다.
조헌주 시인
충북 음성 출생으로 2018 『시사문단』 시 부문, 2021 『월간문학』 동화부문 신인작품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제17회 대한민국 환경문학대상, 제11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에서 수상하였다. 저서로는 에세이 인문학과 함께하는 청소년의 행복찾기』 『하나 사랑 그리고 별』이 있으며 중부매일 신문에 [조헌주의 철학 오디세이]를 연재중이다.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청소년의 행복에 관한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출처] 조헌주 시집 『새로이 고운 덫을 놓고 햇볕을 얹어 주었다』 해설 (2022. 상상인) / 철학적 시선으로 바라본 삶의 본질|작성자 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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