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 생각: 실밥과 꼬인 호스! ◈
성큼 오지 말아야 할 여름이 서두른다. 사람들은 지금쯤에서 한동안 멈추기를 바랄 것이다.
극단으로 치닫는 이상 기온 현상으로 느긋하게 봄을 맞는 건 어느새 사치가 되어버린 지금, 고등학교 국어 시간을 통해 알게 된 “신록예찬(이양하)”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돌아서면 싹을 틔우고, 꽃을 터트리다가 금방 싱그런 얼굴을 들이미는 때, 그렇게 한동안 멈춰 있기를 나도 원하는 바이나 불가능한 일 앞에서 헛심을 쓸 정도로 한가롭지는 않다.
얼마 전 유리에 손가락 사이를 베어 딱 한 바늘을 꿰맸다. 이전 같았으면 소독 후 연고를 바르고 일회용 반창고면 되었을 텐데, 교회에 주치의가 계신 관계로 병원으로 갔다.
아침님이 꿰매면서 나에게 말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세요!”
난 그렇게 예수를 상기했으니 이 또한 은혜가 아니던가!
한동안 손을 쓰면 안 된다는 말도 들은 것 같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만큼이나 쉽게 잊혀지고, 세수를 할 때만 불편하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뒤부터 꿰맨 손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덧나서가 아니라 이쪽 살과 반대쪽 살을 붙든 실이 당기는 힘에 의한 통증 때문이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리가 어떤 세력에 의해 제지를 당하는 것에서부터 오는 통증, 이건 아프다고 표현하지만 실은 불편함에 가깝다.
결자해지! 꿰맨 분에게 가서 실밥을 떼어냈다. 불편함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사라진 것 대신에 들어선 건 이른 아침에 식물에 물을 주다 만난 장면이었다.
긴 호스를 이리 끌고 저리 끌며 물을 주다 보면 갑자기 물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호스가 꼬여 물길을 막아버린 탓, 꼬인 부분을 풀면 다시 시원하게 물줄기를 쏟아낸다.
그러나 꼬인 호스는 반드시 반복하여 꼬이고, 여지없이 물길을 차단한다. 꼬인 부분을 아무리 주무르고 달래도 마찬가지다.
문득 호스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인 사람은 반복하여 꼬인다. 변화되었고 치료되었으며 심지어 성령을 받았다는데, 물길이 차단된 호스처럼 예외 없이 꼬여서 소통이 쉽지 않다.
실에 묶인 살과 살은 결국 통증을 통해 해방을 요구하고, 비로소 실을 잘라주면 통증을 씻은 듯이 사라진다.
하지만 실밥을 끊으면 그만인데, 호스는 자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던가!
통증은 불편함이라 실밥처럼 잘라내야 하는 걸까?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중얼거렸다. “주님 자꾸만 꼬이는 호스 대신 비로 물 주시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