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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시절’을 건너는 삶의 방식
이정훈
1. 생태적 위기, 그 긴 터널 끝은
지금 우리는 프로스트Robert Lee Frost(1874~1963)의‘가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가보지 못한 길’을 걷고 있다. 현시점에서 21세기 환경과 생태문제에 다시 생각해 본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기후 문제와 미세먼지, 플라스틱 오염 등 환경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조차 ‘기후문제’가 아닌 ‘기후재앙’이라고 말하기까지 하는 현 시기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지금까지 그 어느 시기보다 급격한 기온상승과 해수면 상승 등으로 우리 삶의 터전을 위협하며 황폐화 시키고 있다. 이런 환경재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누적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이자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러한 환경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환경 친화적인 일자리 창출이나 저탄소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정부 정책들이 대중들의 일자리나 삶의 질이 희생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른바 ‘환경정의environmental justice’에 입각하여 그러한 사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일부 대기업이나 기득권에 그 수혜가 돌아가지 않도록 정부는 분배 정의를 강력히 실현해야 한다. 나아가 ‘기후정의climate justice’차원에서 선진국과 저개발국 간의 기후변화에 관한 상호협력과 기술지원이 확대되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후변화는 때로는 새로운 질병이나 바이러스의 출현을 초래하고 있으며, 최근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유행 역시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서 ‘사회적 거리 두기’와 격리 생활로 우리 일상을 완전히 혼란에 빠뜨리며, 역동적인 삶의 흐름을 방해하는 초유의 사태를 낳게 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관측되는 메마른 강줄기와 불타는 삼림지역, 북극 빙원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거대한 융빙수 물줄기는 점점 병들어가는 지구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들이다. 또한 바다와 갯벌이 해양쓰레기와 적조현상으로 황폐화되고 삼림과 초원지대가 개발에 의해 사막화 되면서 우리의 환경은 폐허로 변한 황량한 사막을 연상케 하고 있다. 인류의 유토피아는 이 사막을 지나면 그 어디쯤 있는 것일까? 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이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1939)에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이 ‘황량한 시절’을 건너가면, 사막 저편으로 마치 우리가 그리던 낙원이 실제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무작정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작가의 시선도 화이트아웃처럼 시계視界 불명한 ‘쫓겨나갈 땅’에서 미래의 삶을 공동체적으로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게을리 한다면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곳이 ‘쫓겨난 땅’으로 언제 변할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생태적 위기의 터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제 우리만 오염되지 않고 안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전파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환경문제 역시 더 이상 일국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적 문제로서 인식되고 있다. 재앙에 관한 전 지구적 연대와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비단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뿐일까?
2. 야만적 도시,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
오늘날 생태환경 문제는 비단 지정학적 문제를 넘어 문학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많은 작가들 역시 이러한 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하며 그 대안을 모색하려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시단에서 우리 삶과 환경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몇몇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너무 오래 번쩍거렸다
독 오른 코브라처럼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무딘 칼날을 이어가는
전선이 어지럽게 얽혀 현악기처럼 운다.
설계도에서 자지러지는 나무를 보게 된다.
군데군데 어미 산에 버짐이 피는데
나무를 심자는 홍보가 칡넝쿨 같다
개발과 환경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주해 온 수목들이
헛 부른 가로에서 이 빠진 햇살을 받으며 잠시 반짝 거린다
물과 공기도 사먹는 지경에 생을 사먹을 날이면
탯자리를 잃은 나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목을 매는 현수막이 나무 등걸에 펄럭인다.
공해와 냉온에 강한 품종으로 한계를 시험하는 사람들
지느러미 같은 불빛이 아파하는 나무와 뜬눈으로 밤을 샌다.
공생이란 치장을 끌고 뱀살 같은 지하도로 빨려드는데
둥글게 말린 노숙의 그림자가 찌든 가로수를 닮았다
- 임인택「나무들을 도시에서 죽다」부분(『문예연구』2020년 봄호)
이 시에서 우리는 삼림 파괴의 의도가 인간들의 욕망과 욕심을 채우는 데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원래 자라던 곳에서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힌 채 도시로 옮겨진 나무의 이미지는 일상적 삶의 근원이 뿌리 뽑힌 노숙자 이미지와 너무나 닮아 있음을 본다. 노숙자 역시 공동체적 삶에서 소외되고 추방된 채 도시의 거리로 내몰리게 된 사람들이다. 이 시는 “개발과 환경의 소용돌이 속에서” “탯자리를 잃은” 나무라는 대유법을 통해 생태계 일부의 훼손이나 파괴가 그 자체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근원적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준엄하게 가르치고 있다. 자연환경의 파괴는 생태계 전체의 파괴로 이어지며, 그 결과는 부메랑이 되어 우리 인간을 궤멸시키려 들 것이다. "사람은 도시에서 살고 나무는 도시에서 죽는다는 화두가/오목가슴에 얹”(「나무들을 도시에서 죽다」)히는 현실이 화자에겐 안타깝고 애잔한 맘으로 오래토록 마음 한구석에 남는 것이다. 도시와 나무(숲) 그리고 인간은 조화를 이루며 더불어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생태환경이 훼손되고 있는 도시 내면의 풍경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인간이 거처하는 도시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도 그곳의 사회 구성원 모두는 공평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 그러한 도시에는 천차만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어엿한 직장에 다니며 높은 소득으로 물질적 행복을 누리면서 나름대로 시간과 여유를 즐기려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고용 불안정과 궁핍한 삶 속에서 불안해하며 하루하루 근근이 버티는 우리의 이웃들도 있다.
한쪽 날개가 부러진 햇살이 폐허의 난민촌으로 추락했다
추락한 햇살을 씹어 먹으며 바람은 안간힘을 다해 날갯짓했다
안간힘을 그러모아 비대해진 슬픔이 다시 무명들의 꿈으로 파고들었다
구겨지고 찢긴 이력으로 노동은 오래 앓다가 밥을 끊었다
문턱 없는 불안 문턱 있는 계급은 늙거나 낡거나 죽지도 않았다
세치 혀의 무게만한 거리를 두고 부역자와 조력자는 수시로 흥정을 했다
더러워서 무서워서 돌아앉았던 자리마다 수치로 축축하다
- 김사이「자리」전문(『창작과비평』2020년 봄호)
사투 끝에 꿈과 희망을 포기한 난민촌은 오늘날 사회양극화 현상의 선명한 현주소다. “구겨지고 찢긴 이력으로 노동은 오래 앓다가 밥을 끊었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분배 정의의 실패로 사회빈곤층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패배와 열등감에 빠져 몸져눕게 되는 일이다. 또한 “문턱 없는 불안 문턱 있는 계급은 늙거나 낡거나 죽지도 않았다”는 구절은 우리 사회에서 계층 간의 수직적 이동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가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실을 추구하듯이, “부역자와 조력자는”불의한 것들과 암거래를 하고 있다. 세상 보통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자 처세술이다.
이러한 도시 내면의 풍경은 백무산이 『폐허를 인양하다』(창비 2017)에서 말하고 있듯이 ‘패닉’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나는 패닉에 열광한다//내게 고귀함이나 아름다움이나/사랑이 충만해서가 아니다/내 안에 그런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그런 따위로 길이 든 적도 없다 (…) 패닉만이 닿을 수 없는 낙원을 보여준다/나는 그 폐허를 원형대로 건져내어야만 한다”(「패닉」). 화자가 말하고 있듯이 우리가 겪는 세상은 사막과 같이 황폐화되고 메말라버린 폐허의 세계인 것이다. 시의 화자는 그 폐허를 원형 그대로 건져냄으로써 자본 문명의 세계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와 연관시켜 일상적 도시의 속살을 좀 더 자세히 들추어 보면 획일화되고 규격화된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치킨점이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커피점이다 두 집 건너 한 집이 편의점이다 두 집 건너 한 집이 김밥집이다 거리마다 전봇대 간격이 일정하다 시내버스 발차 간격이 일정하다 아파트단지 동과 동 사이 햇빛과 그림자 간격이 일정하다 담보 대출 상환날짜가 일정하다 가로수들 푸른 봉분을 하나씩 이고 발목 묶인 가로등의 간격이 일정하다 그렁거리는 가로등의 눈망울 주말에도 영세한 작업장엔 파우스트를 그리워하며 실을 잣는 여공들
- 서영처「도시의 규격」부분(『창작과비평』2020년 봄호)
도시경관이 보여주는 일정한 패턴은 시나브로 우리 삶을 무미건조하며 단조롭게 만든다. 그러한 현실은 주민들의 영혼을 잠식해가며 그들로 하여금 생존의 노력을 따분한 일상이 되게 하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마저 단조롭게 만든다. 또한 그것은 사회구조 변화나 시대의 흐름을 직시하는 눈을 가리고, 비판의식을 사그라지게 만든다. 이러한 경우는 실을 잣듯이 반복적인 노동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한 도시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정형화된 도시경관을 반복적으로 재생시키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시의 화자가 암묵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전언을 주의 깊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공시적共時的인 도시의 모습은 그 자체로 눈앞에 펼쳐지는 현재 시간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통시적通時的인 다른 시간의 층위 속에서 중첩되며, 대립과 갈등 속에 기묘하게 얽혀있는 모습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이인범과 윤재철의 시를 살펴보자.
구멍가게에선 시간이 제각각이다. 왜곡되었다. 반항적이다. 초라하다. 19세기 흙과 나무, 20세기 콘크리트와 통신망, 21세기 알고이듬과 복제가 어설프게 뒤범벅 어우러진 도시의 골목집들은 난해하고 적막하고 까닭없이 서로 적대적이다.
이인범「구멍가게」부분(『문학들』2019년 겨울호)
주인 떠난 빈집
대문에는 출입금지 노란 테이프 두르고
철거 예정 딱지 붙은 집
이미 갇혀버린 좁은 마당 한켠에
70년대생 늙은 감나무
(…)
들여다보는 사람 하나 없이
이별은 발밑에 와 있는데
70년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아무 의심 없이 내려섰던
지층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 했는데
감나무는 이별을 모른다
단지 이 겨울 지나며
이 도시 어딘가 숨어 사는 텃새들
마지막 사랑처럼 날아와 입 맞출
주황색 감 가득 매단 채
윤재철「방배6구역」부분(『창작과비평』2019년 겨울호)
구도시와 신도시가 실제 공간 속에 혼재되어 있듯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하부구조는 시간을 초월하듯이 옛것과 새것이 함께 섞여 있고 뒤범벅되어 있다. 이러한 도시적 구성 요소는 서로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는 경우도 있지만, 이인범의 시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서로 함께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적대적”이며, 무질서 속에 난해하게 보인다.
윤재철의 「방배6구역」에서 나무의 이미지는 임인택의「나무들을 도시에서 죽다」에 나오는 나무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이 시에서 나무는 도시재개발 과정에서 곧 철거될 집과 함께 사라질 운명이지만, 세상과 이별을 모르는 채 묵묵히 제 할 일을 수행하는 선승禪僧 같은 이미지를 주고 있다. 자본주의 세상과 세속 도시 사람들에게 마치 자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까치밥을 매단 채 마지막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귀한 생명체로서 ‘황량한 시절’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3. 현재적 삶에 대한 저항의 몸짓
그렇다면 정형화되고 틀에 박힌 도시적 삶 속에서 시인들은 어떤 삶의 방식으로 길항하고 있는가? 다시 김사이의 시를 살펴보자.
가난한 목숨들은 불행의 지분이 많다
불행은 구경꾼들처럼 떼로 덤비기도 하지만
옆구리를 찔러 자빠뜨리기도 한다
슬픔 한방울까지 쪽쪽 빨아 배를 불린다
나는 녹이 슬어 삐걱거린다
(…)
나는 누구의 무엇이 부재가 아니라 나였어야 했다
머뭇거림과 두려움 사이에 망각의 강이 흘러
오랜 세월을 외면한 나는 뿌리 없는 씨로 떠돌았다
불행의 눈동자에 갇히니 삶이 대기발령이다
그늘의 딸로 태어나 그늘진 몸에 알록달록한 무늬들
나를 걸어 잠근 이번 생은 글러먹었다
오롯하게 내 죽음을 누리는 것
스스로 죽어가는 시간에 내가 마침표를 찍는 것
글러먹은 생에 대한 저항으로
-「저항의 방식」부분(『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한다』, 창비 2018)
“오랜 세월을 외면한 나는 뿌리 없는 씨로 떠돌았다”는 구절에서 야만스런 도시적 삶과 불화不和하며 고군분투해 온 화자의 인생 여정이 느껴진다. 이 시에서 화자는 자신을 옭아맨 생을“글러먹은 생”이라 결론지으며, 생과 이별의 마침표를 찍고서 자신의 죽음을 누리려 한다. 불공평한 인간의 시간을 외면하고 부평초 같은 삶을 살아온 화자가 가난 때문에 야기된 불행으로부터 이생을 마감하고 종지부를 찍고자 함은 패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나름대로 세상을 재구조화하고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한편 이와는 달리 이러한 세상에서도 일말의 기적을 노래하고자 하는 시인도 있다. “녹색은 기적이다/부유하는 먼지와/불구가 된 흙과/폐기된 배설물과/추방된 독극물과/배제된 토사물을 먹고/허공 신전의 푸른 기둥을 올렸다”(백무산「땅을 딛고 일어날 뿐」,『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 2012). 백무산은 이 세상의 모든 오염물질과 폐기물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싹을 틔우는 식물을 희망이라고 노래했다. 녹색은 숲이요, 풀과 나무요, 우리가 지켜내야 할 삶터다. 연꽃이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우듯이, 온갖 악조건 속에도 희망의 씨앗, 생명의 풀씨를 싹트게 하는 대자연의 위대함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건져내고자 했다. 그러한 시인의 희망은 이후의 작품인 「풀의 투쟁」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틈은 반짝 희망이었다가 갈라지고 갈라져/사막을 만들기 시작할 때/틈을 내는 투쟁의 손도 갈라진다//틈에는 풀씨가 내려앉고/풀은 흙에 뿌리 내리는 것이 아니라/풀이 흙을 만들어간다/틈이 자라 사막을 만들어갈 때/풀은 최선을 다해 흙을 만들어 덮는다”(「풀의 투쟁」『폐허를 인양하다』). 세상이 아무리 황량해지고 사막화 될지라도 다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땅, 녹색의 땅을 만들고자 할 때 가냘픈 식물인 ‘풀’이 주체가 되어 일어선다. 여기서 풀의 이미지는 저항하는 노동자이자 대중의 모습이다. 자본과 난개발이 인간의 고귀한 정신과 공동체의 삶터마저 위협할 때, 이를 과감히 해체하고 창조하여 새롭게 생명이 숨 쉬는 땅,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터전으로 만들고자 결연히 세계와 맞서는 것이 화자가 바라는 삶의 방식이며,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를 사는 민중들의 저항 방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박한 연대 같은 희망’과 달리 ‘꺼지지 않는 촛불 같은 희망’을 여전히 가슴에 품고 ‘황량한 시절’을 건너는 시인도 있다.
나는 오늘도 혁명 중이라
꺼지지 않는 촛불을 들고 너에게로 간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 살고 있다는
서초동 향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아
사람의 말들을 땅에 내려놓으면
하늘의 그물이 우리의 가슴을 담아 올려 반짝거린다
(…)
만물을 관통하는 윤회의 시간은 모두에게 다르지
나는 무엇과 같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시간은 사랑을 바꾸기도 하는데
사랑은 시간을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지금도 울고 있는 당신에게 간다
그물로 연결된 눈물이라서
-이도윤「그물」부분(『창작과비평』2019년 겨울호)
화자가 말하고 있는“사람의 말들을 땅에 내려놓으면/하늘의 그물이 우리의 가슴을 담아 올려 반짝거린다”라는 구절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주기도문을 연상케 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너’는 의지하고자 하는 절대자도 될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참된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여러 사람의 간절한 바람은 하늘도 감동시킬 수 있는 만큼, 모든 이의 희망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혁명으로서 뭇 사람의 마음속에 오래토록 살아 있는 불꽃이다. 비록 ‘사랑’이 시간을 바꿀 수 없을지라도, 꺼지지 않은 혁명 같은 ‘촛불’은 낡은 사랑과 사람을 바꾸며 전진한다. 또한 사랑은 이 시대의 야만적인 모습과 결별하기 위해 “지금도 울고 있는 당신에게”아름다운 연대의 모습으로 가게 하는 원동력이자 힘의 근원이다.
4. 인류세와 자본세를 넘어서
지구의 장구한 지질학적 시간대에서 살펴볼 때, 인류가 살아가는 시간은 아주 짧은 미미한 시간대에 속한다. 하지만 그 찰나 같은 시간대에 인간이 남긴 족적은 결코 작지 않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출현 이후 세계는 찬란한 물질문명과 눈부신 과학발전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이면에 감춰진 병든 산과 강, 바다 그리고 대기야말로 우리 삶터인 지구의 민낯이자 당면한 과제다. 뿐만 아니라 사회 양극화 현상과 실업 문제, 세대 간 갈등은 이러한 환경 문제 속에 새롭게 태어난 ‘파생상품’이었다. 오죽하면 학자들이 이러한 시기를 다른 지질학적 시대와 구별하기 위해 ‘자본세資本世, Capitalocene’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이제 우리는 정치가나 환경론자가 아니더라도 이 같은 환경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머릿속으로만 이해하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은 무감각한 기성세대가 아니라 지구환경 변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해 용기 있는 세대가 되어야 한다. 익히 알려진 ‘환경 소녀’그레타 툰베리Greta Tunberg가 작년 ‘유엔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을 향해 날린 쓴 소리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기득권층의 말뿐인 구호나 실천 없는 다짐보다는 그들의 고착화·화석화된 사고를 깨부술 수 있는 젊은 세대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공간이자 터전인 대지가 참으로 소중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각종 오염과 유해물질로 우리의 환경은 사막처럼 불모지로 변해가고 있다. 작가들도 바로 그런 환경 속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푸른 숲이 사라지고 대지가 메말라가는 황량한 시절을 우리는 함께 건너고 있다. 이 시절은 소낙비를 피하듯이 잠시 지나면 그치는 시기가 아닐 것 같다. 이 시기 너머 저편에 우리를 기다리는 곳이 낙원이 될지 폭풍의 언덕이 될지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삶터가 훼손되면 우리의 생각, 사고도 사라지고 인류도 멸종할 것이다. 그 이후는 다음 시가 답이 될 것이다.
돼지들은 이미 삶을 반납했다
움직일 공간이 없으면 움직일 생각도 사라졌는지
분홍빛 살이 푸대처럼 포개져 있다
트럭에 실려가는 돼지들은
당신에게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가
-나희덕「이도시의 트럭들」부분,『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
이정훈 문학평론가, 2018년 계간 『문예연구』신인문학상(평론 부문)으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노동현실과 인간존재의 경계에서: 백무산 시의 변모과정」, 「인간과 자연의 공진화(共進化): 이문구의 작품 세계」 등이 있음. 한국작가회의 회원.
첫댓글 이정훈 평론가의 평론은 처음 읽었는데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참 멋져보입니다.
여기저기 발표한 글
읽어보면 깜놀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