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69)
◇ 허 생원의 유산 상속
세상 부러울것 없던 허생원…포목점에 불이나 전재산 잃고 부인까지 저세상으로…
주위 도움으로 다시 가게 열고 자식 열다섯만 되면 시집장가 보내
세월 흘러 백발된 허생원…칠남매 불러모아 돈 달라 하는데…
허 생원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포목점은 손님이 끊이질 않고, 아들 다섯 딸 둘 칠남매는 쑥쑥 자라고, 마누라는 아직까지 미색을 잃지 않아 허 생원은 첩살림 한번 차린 적이 없다.
호사다마, 포목점에 불이 나 비단이고 안동포고 싹 다 잿더미가 된 것은 고사하고 옆집 지물포 뒷집 건어물전까지 태웠다. 설상가상, 발 달린 아이들은 가게에 딸린 살림집에서 뛰쳐나왔지만 두살배기 막내를 구하러 뛰어들어간 부인은 물에 적신 치마로 막내를 싸서 밖으로 던지고 자신은 화마에 휩싸였다.
다행히 허 생원은 살아오며 주위에 인심을 잃지 않았다. 모아둔 돈으로 불난 이웃집에 보상하고 나자 빈손이 됐지만, 목수들이며 포목 도매상들이 외상으로 가게와 집을 지어주고 물건을 넣어줬다. 석달 후 번듯한 포목점을 다시 열며 허 생원은 눈물을 흘렸다. 불이 나서 그런가, 장사는 불티가 났다.
문제는 아이들이다. 문지방이 닳도록 매파가 들락거렸지만 허 생원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청상과부 누님을 불러들였다. 포목점 주인에 바느질 솜씨 하나로 혼자 살아온 누님이라, 아이들은 대감 손자들보다 옷이 좋았다. 어미 없는 자식이랄까 고기 떨어지는 날이 없으니 얼굴도 달덩이처럼 훤했다.
어미 정을 모르고 자랐으니 제 각시 제 신랑의 사랑에 빠지라고, 허 생원은 아이들이 열다섯만 되면 시집장가를 보냈다. 칠남매 모두 혼인시키며 세간을 주고 나니 허 생원은 백발이 되고 누님도 ‘호호 할매’가 됐다. 허 생원은 혼자 남았다. 외로워졌다. 맏이는 어쭙잖은 벼슬을 한다고 대구에 가 일년에 한번 낯짝을 볼까 말까. 농사짓는 막내가 그래도 한 장 터울로 닭백숙도 하고 호박죽도 쒀서 허 생원을 찾았다. 그 사이 것들은 가뭄에 콩 나듯 발길이 뜸했다.
어느 해 늦가을, 고뿔을 심하게 앓던 허 생원이 반쪽이 돼 자식들을 불렀다. 아들 다섯 딸 둘이 다 모였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허 생원이 입을 열었다.
“너희 칠남매 키우고 시집장가 보내며 세간 내주느라 내가 빚을 많이 졌다.”
아버지가 재산을 나눠주는 줄 알고 온 칠남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허 생원은 숨이 차 말을 끊었다가 겨우 이었다.
“장사도 옛날 같지 않고 몸도 이 모양이라 너희에게 손을 벌린다. 빚쟁이들한테 시달려서 못 살겠다. 다음 달 보름에 와서 내게 보태줄 금액을 적어다오. 돈은 내년 유월까지 마련해 오면 된다.”
다음 달 보름, 오형제는 왔지만 딸년 둘은 오지도 않았다. 세간을 가장 많이 가지고 나간 맏아들은 고개만 숙이고, 함께 온 맏며느리가 “아버님, 이이가 원체 고지식해서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하며 이백냥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점촌에서 유기점을 하는 둘째는 백팔십냥을 적어 냈다. 안동서 소금 도매상을 하는 셋째는 삼백냥을, 예천에서 대부업을 하는 넷째는 백오십냥을 적어 냈다.
함창에서 농사를 짓는, 세간도 가장 적게 받아 나간 막내는 천냥하고도 이백냥을 적어 냈다.
“막내야, 내가 네게 내어준 세간이 천이백냥이 안 되는데….”
“아버님, 그간 제가 논 두마지기를 더 샀습니다.”
얼마 후 허 생원이 이승을 하직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집안 어른 다섯이 상주 일곱을 앉혀놓고 허 생원의 유언장을 집행했다.
광목 자루 다섯개를 놓고 먼저 맏아들에게 하나를 건넸다. 맏상주가 열어보니 이천냥이 들어 있었다. 깜짝 놀랐다. 둘째 상주가 받은 자루엔 천팔백냥, 셋째는 삼천냥, 넷째는 천오백냥, 막내는 만이천냥이 들어 있었다. 각자 적어낸 금액의 열배다.
딸년 둘은 물론 빈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