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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과의 전쟁, 그 놀라운 역사'라는 부제의 이 책을 읽으면서, 인류의 진화사를 '결핍'이라는 측면에서 읽어낸 관점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광대한 자연 앞에서 미약했던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결핍'을 느끼고 이를 보완하려는 노력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다. 크게 두 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목차 중에서, '결핍이 우리는 만들었다'라는 제목의 첫 번째 항목은 원시인류에서부터 현재의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관한 일반의 상식이 과연 옳은가 라는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흔히 인간만이 불을 피우고 언어를 사용할 수 있으며,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안다는 점 등을 그 특징으로 꼽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양한 동물들 중에서도 불을 사용하고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의도적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예가 발견되었기에 과연 그것을 인간과 동물과의 차이점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부분은 바로 직립보행이며, 무언가 결핍을 느꼈을 때 그것을 보완하는 수단과 방법을 만들어냈기에 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실상 이러한 내용들은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상식적인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인류학적 탐사자료와 DNA를 통한 유전자 분석이나 동위원소 측정으로 인한 시기 측정 등으로 보완하면서 내용을 이끌어가고 있다.
최초의 인류라고 추정되는 호모 하빌리스 단계를 거쳐 호모 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이 존재했지만, 그들이 진화의 과정상 사라진 것은 결국 자신들에게 닥쳤던 '결핍'을 이겨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인류의 진화 단계에서 습득한 지혜를 축적해서 자신에게 닥친 '결핍'을 이겨낸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아 현재의 인류를 이룰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즉 '결핍의 압박 속에서 호모 사피엔스는 횃불처럼 이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찾아 헤맸고, 점점 번성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들을 인류 화석의 해부학과 DNA 분석, 그리고 지질학에 기댄 지구의 기후 변화 등을 통해서 다채롭게 설명하고 있다. 인류의 쇠퇴와 번성은 화산이나 지진 등의 자연 재해에 의해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닥친 '결핍'을 이겨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생존과 멸망으로 나뉘어졌음을 강조한다.
특히 저자는 '들어가며'에서 뉴기니의 식인 풍습으로 인한 유전병의 실체를 제시하면서, 결국 인류의 식인 풍습도 식량의 '결핍'을 보완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그 결과 뇌에 이상이 생겨 무력하게 죽어가는 유전병이 도래했다는 것을 이끌어내고 있다. 단순히 인류의 진화 과정만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과학적인 탐사 결과를 토대로 그것을 보완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첫 번째 항목은 인류의 진화 과정을 다양한 고고학적 유물과 그에 관한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두 번째 항목에서는 '결핍은 역사를 만들었다'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 역시 과학적 논거를 곁들여 소개하고 있다. 다만 이미 알고 있는 중국사를 정치사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나 천재지변 그리고 지구상의 기후 변화 등을 접목시켜 철저히 과학적인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인류의 4대문명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황하문명'을 비롯하여, 인류 초기부터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러한 서술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이해된다. 베이징 원인을 비롯한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신석기시대부터 서술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저자는 역시 '결핍'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식량의 부족과 생존의 필요에 의해 작물을 재배하고 토기를 비롯한 도구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동물을 길들여 마침내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역사에서 은허 유적지를 통해서 상나라부터는 역사로 인정되고 있으나, 그 이전의 하나라까지는 여전히 역사와 전설의 중간에 걸쳐있다고 논의되고 있다. 저자는 하나라 우임금이 홍수를 다스렸던 치수(治水)에 대해서 논하면서, 폼페이에 버금가는 '라자유적'의 홍수 매몰 흔적의 발굴 결과가 하나라가 역사에 실재했을 것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후 상나라와 남북조시대 그리고 명나라와 청나라로 이어지는 중국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화산과 천재지변 그리고 전지구적인 기후변화로 인해 왕조의 흥망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그동안 인물이나 정치제도에 초점을 맞춰 설명해온 역사 기술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왕조에서는 천재지변을 군주의 능력으로 받아들였기에, 저자의 설명이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다고 이해되었다.
특히 청나라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는 '아편전쟁'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양귀비를 경쟁적으로 재배했던 당시의 풍조에서 비롯되었다고 논하고 있다. 즉 식량으로 삼을 수 있는 곡물 대신에 돈이 되는 양귀비를 과잉 재배하면서 중국 사회가 아편에 중독되는 현상이 발생했고, 이를 이용한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 청나라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결핍'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인류의 진화 과정을 설명하고, 다양한 측면에서 이를 적용할 수 있는 중국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결핍이 우리의 몸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었으며, 지금도 인류 역사는 결핍과의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분명 인류의 진화 과정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결핍과의 전쟁’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설명이 충분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의 상황에서 인간들이 결핍을 보완하는 것을 넘어서 과잉 생산을 통해 욕구를 채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잇다. 그래서 앞으로 진행될 모든 인류의 행동이 과연 ‘결핍’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를 고민할 시점이 되었다. 최근 결핍이 아닌, 인류의 과잉 욕망으로 인해 지구의 환경이 파괴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이 지질학으로 ‘인류세’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끝내는 그러한 욕망이 인류의 종말로 향할 수 있다는 경고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결핍'과 그것을 충족하는 것만을 강조한다면, 인간의 환경 훼손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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