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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崔南善) |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참여.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1925, 1927). 역사를 통하여 본 조선인(1928), |
이광수(李光洙) | 민족개존론(1922), 민족적 경륜(1924), |
김성수(金性洙) | 경성방직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 1919. 10) 설립하여 취체역(取締役). 1920년 4월 동아일보(東亞日報) 창간 |
기타 | 민원식, 최린 |
나. 전개
⑴ 1923년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
① 배경
제1차 세계대전동안 일본의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미츠이, 미츠비시 등 일본의 대기업들이 한국에 진출하여 한일간 무역관세의 철폐 움직임이 있었고 국내기업은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② 전개
물산장려운동은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과 상통하는 것으로 1920년 조만식이 평양에서 조직한 평양물산장려회를 비롯하여 1923년 1월 21일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가 조직되어 자급자족, 국산품애용, 소비절약, 금주・금연 등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③ 활동
물산장려회는 “입자! 조선인이 짠 것을, 먹자! 조선인이 만든 것을. 쓰자! 조선인의 손으로 된 것을”이라는 구호아래 일제를 배격하고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운동을 평양・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 각지로 번져 갔다. 자작지급회(자작회, 학생계), 청년회, 부인회, 토산애용부인회(토산장려회), 소년단 등이 호응하여 거국적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④ 결과
물산장려운동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큰 성과를 거주지 못했다.
④ 결과
물산장려운동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큰 성과를 거주지 못했다.
⑤ 한계
수요증대를 해소할 생산시설의 확충이 미흡했고 국산품 가격의 상승으로 상인・자본가・지주 들에게 이윤이 돌아간다고 비판과 사회주의(급진주의)계열의 반대가 있었다.
⑵ 1923년 민립대학설립운동
① 배경
기미독립운동이후 교육열이 높아져 교육 확대 및 보통교육이나 기술교육이 아닌 고등교육의 필요성이 인식되었다.
② 전개
1920년 조선교육회를 중심으로 1922년 11월 이상재(李商在)를 대표로 하고 이승훈(李昇薰), 조만식(曺晩植), 김성수, 윤치호, 한규설, 이상설, 백남운, 한용운, 허헌, 유진태(兪鎭泰)등 47명이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결성하고 1923년 3월 30일에는 한규설(韓圭卨), 이상재(李商在) 등 91명이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결성과 함께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아래 민립대학설립을 위한모금운동을 전개했다.
③ 일제의 감시와 탄압, 전국적인 가뭄(旱魃) 및 수해 등으로 모금 활동이 저조했고 일본이 대학설입요구를 무마하기 위해 1924년 서울에 관립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여 극소수의 한국인을 입학시킴으로써 고등교육열을 무마하여 실패했다.
⑶ 문명퇴치 운동
① 배경
일제의 우민화정책으로 한국인의 문맹률(文盲率, illiteracy rate)이 증가하자 기미독립운동 이후 언론계를 중심으로 문맹퇴치(文盲 退治)와 농촌계몽(農村啓蒙) 운동을 병행하여 전개되었다.
② 전개
⒜ 야학운동
1920년대 전반에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우리말 교육으로 민족・항일의식을 고취했으며 일제는 1면1교주의(一面一敎主義)를 표방하여 야학을 철폐했다.
⒝ 문자보급운동
조선일보는 1929~1934년까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표어를 내걸고 전개햇으며 한글교재를 배부했다.
⒞ 브나로드(V narod, 민중속으로) 운동
동아일보는 1931년 7월부터 1935년 6월 일제 조선총독부의 금압조치로 중단될 때까지 브나로드(V narod, 민중속으로) 운동을 전개했다. 브나로드 운동은 미신 타파, 구습 제거, 근검・절약 등을 추구하는 농촌계몽에 큰 역할을 하였다.
⑷ 민족기업의 성장
1920년 회사령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되자 경성방직회사(1919년 김성수), 부산 백산상회(안제), 평양메리야스공장, 평양고무신공장 공신양말(이진순), 삼공양말(손창윤), 평양 정창고무공업사(최규봉) 등 민족기업이 등장하였다. 정창고무공업사 공장장 이병두(李丙斗)는 고무신을 개발하여 환영받았다.
2. 학생운동
가. 6.10 만세운동
사회주의 계열은 순종(李坧)이 사망하자 1926년 6.월 10일 순종 인산일(因山日)에 만세시위 재현하고자 했으나 사에 발각되어 학생운동단체가 주도 학생들을 중심으로로 전개되었다. 6.10 만세운동에서도 좌우협동이 이루어져 민족협동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나. 광주학생운동
1929년 11월 3일부터 전개된 학생운동으로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반경 광주발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 광주중학생 3학년 후쿠다 슈조(福田修三)・다나카 히데노리(田中秀憲)・스에요시 카츠미(末吉克己) 등이 광주여고보 3학년 여학생 박기옥(朴己玉), 이금자, 이광춘등을 희롱하자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동생 광주고보 2학년 박준채박준채(朴準埰)가 일본인 학생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이 싸움은 광주고보와 광주중학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만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했다. 일본인 학생을 혼내준 사건에서 비롯됐다.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충돌에서 경찰, 학교, 언온 등이 편파태도를 취하자 학생들의 반일 감정이 폭발하여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대되어 식민교육 반대하는 운동에서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했다. 광주학생 항일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신간회가 후원(변호사 파견 등)했으며 전국 각 학교 동맹휴학하거나 지원금 모금하고 지원단을 파견했다. 신간 광주학생운동의 홍보를 위해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일제는 '민중대회'를 빌미로 신간회 간부중 좌파측 인사들을 검거됐다(민중대회사건). 항일 학생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이 날은 원래 학생의 날로 불렸지만 지난 2006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광춘과 박기옥
3. 사회운동
가. 신간회
⑴ 성립 및 구성1927년 2월 15일 언론계대표 신석우, 안재홍, 이상재, 천도교대표 권동진, 불교대표 한용운, 공산당대표 한위건 등 비타협주의적 우익대표와 사회주의대표 등 28명이 이상재를 회장, 홍명희를 부회장으로 하여 결성
⑵성격
1920년대 후반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결성한 반일통일전선조직으로 중앙조직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우세했고 비회조직에서는 사회주의세력이 우세한 조선총독부가 묵인한 합법운동단체
⑶ 창립시 강령(1927년 1월 19일)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1.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1.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⑷ 복대표대회(復代表大會)와 지도부의 개편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정기대회를 개최할 수 없자 인접지회가 합동으로 대표를 선출하여 정기대회를 대신하는 복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신간회강령및 규약을 채택했다(1929년 6월). 지회에서는 ① 회장제의 중앙집행위원장제로의 개편, ② 지방연합기관 설치, ③ 행동강령 제정, ④ 기관지 발행, ⑤ 단체가입제의 실현 등의 요구가 제기되었고, 그결과 1929년 6월 28일 각 지역에서 선발된 34명 가운데 27명의 복대표가 참가한 복대표대회가 개최되어 ①항의 요구를 승인하여 허헌(許憲)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했으며, 이전과 달리 사회주의자들이 본부 임원에 대거 진출했다. 또한 ②항의 요구도 관철되어 1929년 8월 25일 함경북도연합회, 11월 30일 평안남도연합회가 각각 결성되었다. 다른 도(道)에서도 연합기관 결성이 시도되었으나 일제의 집회 금지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허헌 집행부는 당시 일어난 '갑산 화전민사건', '광주 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여론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특히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929년 12월 13일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대대적인 반일시위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민중대회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허헌 집행부의 다수가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다.
⑸ 활동
① 조선인에 대한 착취기간 철폐
② 일본인의 조선이민 반대
③ 타협적 정치운동 배격
④ 조선인본위의 교육제도 실시
⑤ 사회과학과 사상연구의 자유보장
⑥ 식민지교육정책의 반대
⑦ 광주학생운도사건에 조사단 파견
⑹ 해소
1931년 5월 15일 두 번째 전체회의에서 해소론이 표결에 붙여져 찬성 40, 반대 3, 기권 30으로 해소안 가결
나. 농민의 소작쟁의(小作爭議)
1921~1935년간에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농민들의 삶이 피폐해지면서 소작권 박탈 위협, 지조(地租) 및 수리조합비의 부담구 등도 원인이 되어 농민들은 대지주를 상대로 50% 이상인 고율 소작료 인하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소작인조합, 농민조합, 농우회 등의 소작쟁의가 조직되면서 더 활발해졌고 1922년 22건에서 1930년에는 726건에 참가인원이 13,012명이었다. 규모가 큰 소작쟁의는 소작료가 80%인 1923.8~1924.9 무안 암태도(巖泰島)(현 신안군 암태면) 소작쟁의, 김제 다목농장 소작쟁의, 특히 1924~!925년 황해도 재령 동양척주식회사 북률농장(北栗農場), 1924~1925년 함남 고원(高原)의 동척농장(東拓農場) 소작쟁의, 1923~1931년 평북 용천(龍泉)의 불이흥업주식회사 서선농장(不二興業株式會社 西鮮農場)의 소작쟁의는 단순한 경제투쟁만이 아니라 일본에 대한 반항 색채도 띠게 되었다.
다. 노동자의 노동쟁의
노동자들은 근로조건의 개선을 주장하며 파업과 노동쟁의를 전개했다. 1928~1929년 원산총파업, 부산부두노동총파업이 유명하다.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shehddd이 항일적 성격을 띤 좋은 본보기였다.
라. 여성, 형평, 소년 운동
여성운동은 여성들이 자신d들의 사회적 지위를 인식하면서 신간회 자매기관이 근우회가 출범했다. 형평운동은 백정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을 철폐하고자 했다. 1923년 경남 진주에서 형평사가 조직되었다. 소년운동은 천도교 소년회가 조직되어 어린이날을 제정학기관지 어린이를 발간했다.
⑶ 사회주의 사상 유입
⑷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의 발표후 우익진영의 타협주의세력과 비타협주의세력의 양분
⑸ 민족통일운동건설 선도 : 서울청년회계게의 사회주의자들과 조선물산장려회계의 민족주의자들의 제휴, 종교계와 교육계 및 해외귀국민족주의지들의 조선민흥회 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