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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95번 말씀
제목 : 내가 니 시다바리가
창 45:1-10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2.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4.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9.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 말고 내려오사
10.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아멘.
오늘 설교제목이 조금 원색적이죠? 내가 니 시다바리가? 경상도 사투립니다. 친구라는 영화에서 장동건이 유오성에게 던진 말로써 한동안 유행이 되었던 말이죠? 시다바리라는 말은 일본어 시다에 우리말 접미사 바리가 붙어서 생긴 합성어에요. 바리라는 접미사는 어근에 붙어서 그 어근에 내용을 담고 있는 사람, 그 어근의 내용을 담고 있는 자, 라는 뜻의 명사로 만드는 그런 말이에요. 바리라는 접미사가 붙는 말이 몇 개있죠? 잇속을 노리고 약삭빠르게 달라붙는 사람을 이르는 간발이, 군인을 속되게 이르는 군바리, 나무기둥을 뜻하는 동바리, 발발거리고 다닌다 해서 붙여진 발바리, 악착같다고 해서 악바리,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을 비하하여 부르던 쪽바리 등이 그 예입니다. 그리고 시다라는 말은 지위나 정도가 낮다는 뜻의 시다, 아래 하(下)자에요. 시다라는 일본 말이에요. 그 말은 보통 기술자의 아래에서 보조 역할을 하며 기술을 배우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쓰는 말이에요. 여기에 바리라는 접미사가 붙어서 시다바리라는 말이 만들어진 거예요. 신조어죠. 그러니까 시다바리라는 말은 주체가 아닌 보조자로써 주체의 일을 곁에서 돕고 배우며 주체가 시키는 일을 순종하여 성취해내는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면 바라지, 정도가 되겠습니다. 바라지는 불교용어에서 유래된 말인데요, 불교의식에 죽은 사람의 천도를 위한 시식이 있는데 시식을 주관하는 시식법사가 앉아서 경문을 읽으면 그 다음에 경문을 받아서 읽는 사람. 또는 그 시식법사 옆에서 그 시식을 거들어주는 사람을 바라지, 라고 불러요. 그것이 일상용어로 자리 잡게 되면서 뒤에서 일을 돌봐준다는 뜻으로 흔히 쓰이게 된 거죠. 그래서 옥바라지, 뒷바라지 등의 말이 생기게 된 거예요. 역시 바라지라는 단어도 주체가 아닌 객체나 보조자로써 주체의 일을 곁에서 돕고 배우며 주체가 시키는 일을 순종하여 성취해내는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다바리, 바라지 곁꾼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주체이신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 주체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며 그분의 일에 동역자로 부름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시다바리, 혹은 바라지여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바라지. 그런데 가만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시다바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시다바리가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5분 대기조가 되어서 우리의 명령을 기다리셔야 되고 우리는 아무 때나 하나님을 불러서 우리의 뜻을 하달하는 그런 시스템이에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외치시는 것 같아요. ‘내가 너희들 시다바리가?’. 제가 조금 자극적으로 극화를 시켜봤지만 작금의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뭔가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시다바리로, 바라지로 부리며 자신의 뜻과 소원을 이루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바라지로써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과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 살아가야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은 무엇이든 목숨 걸고 해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요 본질인 것입니다.
한 편의 멋진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카메라맨과 프로듀서 배우 현장진행 요원인 FD 의상담당 미술담당 음악담당 소품담당 장소 섭외담당 식사담당 작가 무대 쎄트 짓는 사람 각색 등등 수많은 역할들이 있어요. 그들 중 한 사람만 빠져도 영화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자기는 그 역할이 싫으니까 다른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도 안 돼요. 그 전체를 총괄하는 감독이 각자의 특기와 개성에 맞게 역할 분담을 해준 것이기 때문에 다른 역할이 탐나 보인다 해도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에만 충실해야 돼요. 어느 날 식사를 담당하던 사람이 카메라를 잡겠다고 나서고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의상담당이 음악 감독이 멋있어 보인다고 음악을 담당하겠다고 나서면 그 영화는 거기서 끝나는 거예요. 식사를 맡은 사람은 식사를 카메라를 맡은 사람은 카메라를 음악을 맡은 사람은 음악을 미술을 맡은 사람은 미술을 의상을 맡은 사람은 의상을 그렇게 각자에게 맡겨진 역할에 충실해야 감독이 일을 하기 쉽고 그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가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 어느 역할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중 어떤 부분이라도 공백이 생기면 그 영화는 더 이상 진행이 될 수 없어요. 우리 윤 00 집사님이 기독교방송국 피디, 감독 출신이거든요. 한 번 물어보세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역사라는 드라마의 대본을 쓰시고 그 대본을 각색하시고 연출하고 경륜하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반드시 순종해야 되는 거예요. 감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과 상황과 그게 진행과정이 별로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역할과 상황에 순종해야 되는 거예요. 바울은 그것을 지체라는 단어로 표현하죠? 손가락 발가락 입 눈 머리 손톱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고 그 어느 것도 없어선 안 될 소중한 것이다, 가 바울 서신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맡겨진 가난한 역할 병자의 역할 당해주는 역할 이런 것들이 싫다고 그 자리를 떠나버리면 그 역사의 드라마는 더 이상 진행이 될 수 없어요. 왜 나는 맨날 당해주기만 해야 돼? 왜 나는 항상 이렇게 가난해야 되지? 난 왜 맨날 이렇게 아파?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말 거야. 하면서 그 역할들을 놓아버리게 되면 더 이상 극의 전개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역사의 드라마 총 감독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결정과 뜻에 순종해야 돼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 이 인생은 찰나니까. 영원에 비교하면 찰나니까. 여기서 잘 역할을 수행해내면 영원 속에서 행복할 수 있으니까. 참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멋진 역사의 드라마가 완성이 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자꾸 그 역할들이 싫증이 나고 불편하고 고생스럽다고 해서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님께 항의를 하고 서로서로 이전투구들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인생들의 모습이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아무런 불평이나 원망 없이 순종과 복종 속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지는 곳을 말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거기에는 왕은 하나에요. 하나님, 전제 군주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지어저 가는 거예요. 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야 되니까. 그분의 말을 듣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종처럼 불렀다 놓았다 하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면서 사는 자들이 아닌 거예요.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 바라지, 시다바리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는 한 사람의 영웅이 등장합니다. 다른 아닌 요셉이에요. 요셉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일의 성취자로서 살다가 결국 이스라엘의 애굽 행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일조를 하는 자로 서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반드시 애굽으로 들어가야 되죠? 왜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었거든요. 누구에게 그런 약속 했어요? 아브라함에게 이미 했단 말입니다.
창 15:12-16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여기서 이방은 애굽이에요]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 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보세요. 하나님은 이미 요셉의 증조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을 이방나라 애굽으로 보내서 400년 간 종살이를 하기 하시고 4대만에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실 계획을 말씀하셨어요. 그 일을 위해서 요셉이 먼저 종의 신분으로 애굽으로 가게 된 거고 기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셔서 요셉의 형들을 애굽으로 보내셨던 거예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다른 곳이 아닌 애굽으로 팔려갔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연출에 의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라는 멋진 드라마가 착착 진행이 되고 있는 거고 거기에 요셉이라는 출연자가 자기의 자리에서 죽도록 고생을 하면서도 그 역할에서 탈출할 생각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냈던 거예요. 물론 그 요셉의 모습은 하나님의 연출 의도를 정확히 아시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묵묵히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거예요.
시 105:16.21-26
그가 [그가 누구에요? 하나님이] 또 기근을 불러
[기근을 일으키신 분이 누구? 하나님]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왜? 요셉의 형제들을 애굽으로 보내야 되기 때문에 기근이 일어난 거예요]
17.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누구에 의해서? 그가. 하나님이 요셉을 팔았어요]
18.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누구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감옥에 들어갔어요]
19.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20.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누가 요셉을 석방했어요? 하나님]
전부 수동태에요. 요셉의 입장에서는 전부 수동태에요. 하나님의 입장에선 능동태고.
21.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누가? 하나님이. 주어가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22.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누가? 하나님이]
23.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누가 이렇게 시키셨어요? 하나님이]
24.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누가? 하나님이]
25.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누가 애굽의 왕조를, 힉소스 왕조를 다시 원래의 함족의 왕조로 바꾸어서 이스라엘을 종 취급하게 했어요? 하나님이 하셨단 말입니다]
26.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누가? 하나님이 보내셨단 말에요.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에요? 하나님. 무엇을 위해서? 당신의 언약을 위해 하나님 혼자 일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가 뭐다? His-stpry, History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이렇게 이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에요.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바로 그것을 깨닫고 가는 거예요. 천하 만물이 모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됐으며 그분에 의해 주관이 되고 있는 것이며 그분의 뜻대로 움직여지고 있으며 그 역사의 주관자에게 온전히 항복하는 길 만이 최선의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절절이 깨달아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가 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기도가 때때로 그렇게 안 들어지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게 그렇게 전부 어긋나버리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요셉은 수많은 고난과 시험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거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자임도 깨달았습니다. 본문 5절 이하를 보세요.
창 45: 5-8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 자를 삼으셨나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논할 때 흔히 예문으로 쓰이는 구절이죠? 그죠? 바로를 걍팍케하셨다, 유다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서 판 거냐. 지 자유의지로 판 거냐? 이런 이야기들. 그죠? 그 중에 하나잖아요? 거기에 대해선 제가 여러 번 자세히 설명해 드셨으니까 아직도 모르시는 분은 그걸 다시 한 번 들으세요. 형들이 자신을 팔았지만 그 일을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것이라고 말을 함으로 해서 형들까지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임을 밝혀요. 그렇다고 해서 형들이 죄가 없다는 뜻은 아니라 그랬죠? 하나님은 형들의 악함을 이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룬 거예요. 그것을 요셉이 안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향한 감정을 이미 정리를 해버린 거예요. 그걸 용서라고 해요.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그 주권을 오롯이 깨닫고 원수에 대한 내 감정을 정리하는 거, 내 입장을 정리해내는 걸 용서라고 해요, 성경에서요. 막무가내로 용서 못합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앞에서 항복한 자만이 용서를 할 수 있어요. 형들이 자신을 팔지 않았더라도 자신은 어떻게든 애굽으로 팔려왔어야 했다, 라는 것을 요셉이 알아버렸던 거예요.
그렇게 수많은 고난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해내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거대한 작정을 알게 되자 Decree를 알게 되자
자신이 겪은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그 고난의 수혜자라 여겼던 형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된 거예요. 형들의 배신 애굽에서의 종살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 억울한 누명 바로의 꿈 세상의 기근 그 모든 것들이 전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위한 도구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안 요셉에게 그 모든 사건과 상황과 현실들이 억울함이 아니라 당연함이요 필연으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에요. 뿐만 아니라 요셉은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도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써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어요.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꿈 해몽을 잘해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절대 여기지 않았습니다.
8절에 보면 요셉이 자신을 가리켜서 바로의 아미, 바로의 온 집의 주, 애굽 온 땅의 치리 자, 라고 불러요. 기고만장이죠. 자기가 바로의 아비에요? 형제들 앞이라 뻐기려고 그런 말 쓴 겁니까? 애굽의 치리 자에요? 자기 위에 분명히 바로가 있어요. 자기가 애굽의 주입니까? 어떻게 요셉이 애굽의 주에요? 어떻게 요셉이 바로의 아비가 되죠? 어떻게 요셉이 함족의 치리 자가 됩니까? 요셉은 지금 아비 야곱에게 주어진 축복을 실제화 시키는 삶을 사는 중이라고 했죠? 그래서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해놓고 요셉의 삶이 나오는 거라 그랬잖아요. 그럼 야곱이 하나님께 받은 언약의 내용을 보면 왜 요셉이 자신을 가리켜서 묘사할 때 주, 큐리오스 [κύριος], 아비, 치리자라는 단어를 쓰는지 알 수 있어요. 창세기 27장 29절 보세요.
창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여기에 나오죠?] 네 어미의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게 야곱이 받은 축복이란 말입니다. 이 축복이 나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형제들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주라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야곱에게, 이스라엘에게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될 것이라고 언약하시고 요셉은 바로 이 야곱의 축복이 자신에게서 성취되었음을 형제들에게 밝히는 거예요. 절대 요셉이 교만해서 그런 단어들을 쓴 게 아닙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에 나오는 그 단어들을 써서 지금 자신에게서 그 언약이 성취되고 있음을 밝힌 거예요. 그래서 그 언약의 성취과정에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단어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어렵습니다. 성경 전체를 한 눈으로 뚫지 않으면 창세기는 여러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잘 배우시란 말에요.
그리고 그가 애굽의 치리자라고 자신을 묘사한 것은 창세기 9장의 하나님의 언약을 염두에 둔 말이에요.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버린 함을 저주하면서 함의 자손들이 셈의 종이 될 것이다, 라는 말을 하죠? 그러니까 셈이 함족의 치리 자가 될 것이라는 그런 뜻이에요. 애굽사람들이 바로 함족이었어요. 그리고 요셉은 셈족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요셉은 자신의 형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사용을 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처럼 빈틈없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졌음을 고지하는 거예요. 시편 105편에 보면 요셉의 이야기를 쭉 하면서 애굽을 함 땅이라고 그래요. 일부러, 그러니까 시편과 이 창세기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언약을 연결해서 보지 않으면 이것은 절대 이해가 안 되는 구절들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종으로 팔린 것도, 세상이 기근으로 죽어가는 것도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온 것도 모두 우연이나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언약에 참여시키기 위한 필연적 과정으로 허락하셨던 거예요. 동의하세요?
마찬가집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의 삶 속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고난들이 닥쳐올 수 있어요. 그러나 요셉의 고난이 하나님 언약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사건과 상황들은 전부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한 필연적 과정인 거예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면. 예수가, 그리고 요셉이 그런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내팽개치고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 역사를 거스르지 않았던 것처럼 바로 우리 성도들도 그 현실에 순종하며 감사하게 살아내야 하는 거예요. 요셉이 그 상황이 좋았겠습니까? 요셉이 이야기하죠? 나는 억울하다, 이 억울한 사정을 좀 밖에 나가서 알려줘, 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예수님은 뭐라 그래요? ‘아버지 하나님,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이야기하셨단 말입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가하면 바로 우리 성도의 삶에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에서 탈출하려고 노력하는 자가 아니라 나와 나의 뜻이라는 자아숭배, 자기주장, 자아 성취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셉이 그 감옥에서, 그 종살이에서 탈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기독교는 자신의 현실을 바꿔달라고, 다른 말로 자신의 현 상황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괴롭히고 있는 거예요. 끊임없이 나를 업그레이드 해달라는 건 지금 이 상황이 나는 마음에 안 드니까 여기서 탈출하게 해달라는 거죠. 그죠?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나 여기 싫으니까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라고 이야기했으면 창세기는 거기서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요셉은 안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긍정의 힘이나 긍정적 사고를 사용해서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라는 거예요. 조엘 오스틴 식의 기독교가 오늘날 참 기독교를 다 먹어버린 것입니다. 가짜가 진짜를 먹어버린 거예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시켜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이 애굽 종살이에서 탈출할 기회가 없었을까요? 마음 독하게 먹고 눈 한번 질끈 감고 보디발 아내의 청을 한 번 들어준 후에 아버지 집으로 탈출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버스로 여섯 시간 걸립니다. 맨 걸음으로 장정이 걸으면 짧게는 사흘이면 가요. 길게 잡아도 1주일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요. 그런데 요셉이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없어요. 성도는 현실에서 탈출하는 게 아니라 이 현실을 내 뜻에 맞게 바꾸고야 말겠다는 그 자기주장이라는 그 감옥에서 탈출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순종이라는 그 자리로 탈출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그 현실에 흡족해하면서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이들이 바로 성도인 거예요. 나의 이 상황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내가 감수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모함이어도 괜찮고 그게 감옥이어도 괜찮고 그게 종살이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게 요셉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항상 이렇게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돼요. 내가 중심되면 안 돼요. 코페르티쿠스 적 대변환이 일어나기 전에는 여러분은 예수 믿는 자, 아닌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여러분은 모두 이민자들이에요. 그죠? 한국이 고향이신 분들입니다. 고향이 그리우시죠? 가고 싶으시죠? 근데 이 중에 안 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웬 줄 아세요? 그 고향에 부모님, 일가친척, 형제들이 전부 없어진 사람들. 가봐야 아무도 나를 반겨줄 사람이 없는 그런 사람들, 한국 가고 싶으세요? 안 가고 싶죠? 마찬가집니다. 천국은 나를 죽도록 사랑해주는 그 하나님 아버지가 있는 ‘곳’이 천국이에요. 아무리 좋은 것으로 아무리 훌륭한 것으로 꽉 채워져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나를 사랑해주는 이가 없으면 거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용지물인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저의 아버님과 여행을 자주 다녔어요. 특히 등산을 자주 다녔는데 그렇게 다니다 보면은 텐트치고 한데서도 자야 되고 화장실이 없어서 노천에서 용변을 봐야 되고 먹을 게 없어서 개구리도 잡아먹고 이렇게 다녀야 돼요. 불편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 믿음직스럽고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행복했어요. 저는 비위가 너무 약해요. 그런데 저의 아버님은 비위가 너무 좋아. 개구기를 잡아서 뒷다리를 쩍쩍 찢어서 구워서 막 드셔. 그걸 먹었습니다, 제가. 뒤에 가서 다 토했지만. 아버지가 저에게 준 걸 거절할 수가 없어서. 너무 좋아서요. 그게 천국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가 좀 불편할 수 있어요. 여러분 상황이 마음에 안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아버지가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그 사실이 인식이 되었다면 여러분은 여기서 행복하셔야 돼요. 왜? 이제는 이 불편한 현실이 다 없어지고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그러한 곳에서 그 사랑하는 아버지와 영원히 살 거니까. 지금 이 시간은 그냥 이 불편한 환경 속에서 이 보잘 것 없는 나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과의 동행을 즐기시는 거예요. 그게 인생이며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그 처해진 현실에 순종하는 거예요. 그걸 배우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바로 그 자리로 끌고 가시는 거예요. 이것이 역사와 인생의 목적이에요.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 이 역사와 문명 속에서 가슴깊이 경험해보라는 거예요. 니가 원하는 게 주어지지 않아도 너 진짜 나로만 행복할 수 있어?를 물으시는 거예요. 우리 인생 동안에,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그 때 Yes! 라고 대답을 할 수 있는 그 자, 그가 성화되어져가는 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 백성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바라지, 하나님 시다바리로 만들기 위해 이 역사가 운행되고 경륜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목적은 그거 딱 하나에요. 역사의 목적지는 다른 거 없어요. 바로 그거 하나에요. 하나님 백성, 백성 만들기 프로젝트. 하나님의 백성들의 교육과 훈련과 양육을 위해서 기근이 일어나고 배신과 모함과 시험들이 들이닥치는 거예요. 그러한 관점에서 성경을 읽다가 보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이 세상의 역사가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훈련하시고 양육하시고 교육하시기 위해 하나님 백성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전쟁 기근 질병 자연재해 등이 다 누구 때문이란 말이에요? 하나님 백성들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들에게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당신의 백성들뿐이에요.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살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정신 차리라고, 회개하라고 양육시키려고 이러한 재앙과 재난들을 허락하시는 거예요. 이 역사 진행의 동기요 중심은 성도인 거예요. 그 일에 필요한 재앙, 고통들을 세상 사람들이 멍하니 같이 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불쌍한 거죠. 이스라엘을 애굽에 넣기 위해 있지 않아도 될 기근이 들었단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기 위해 열 가지 재앙이 애굽에 내려버렸어요. 그 사람들은 뭐에요? 도대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고 가실 그 역사 속에서 엑스트라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란 말에요. 여러분이 이런 올바른 역사관 세계관 가치관을 갖지 못하면 여러분은 예수 믿으면서도 늘 불행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늘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니까요. 아니에요, 역사는 여러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의 불평등과 억지와 불법과 폭정 같은 것을 대할 때 그러한 것을 고치겠다고 나서기 전에 자신을 포함한 하나님의 교회의 회개와 자정을 먼저 선행해야 되는 거예요. 나에게 무슨 잘못이 없는가를 먼저 돌아봐야 되는 거예요.촛불 들고 나가기 전에. 그러한 것들을 고쳐서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시도를 하기 전에 하나님 백성들의 하늘 백성다운 삶으로의 회귀가 먼저 선행이 돼야 된다는 말이에요. 나는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가?를 먼저 고민해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역사는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관과 역사관과 가치관 속에서 누가 누구를 지탄하며 누가 누구의 흠을 질타할 수 있겠어요? 다 내 잘못인데.
여기 시간으로 그저께 저녁 한국의 전직 대통령이 자살을 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대통령 재임시절 후원자로부터 불법 후원금을 받아 챙겼다는 이유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던 상황에서 그분이 자살을 했습니다. 제가 정당에 있을 때 총재 비서실에서 당무위원으로 근무를 할 때에 자주 뵙던 분이에요. 저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잘 알아요. 아주 의지가 강하고 강단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자살을 했겠는가를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무거웠어요. 왜 그분이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그분이 50억 원의 후원금을 불법으로 받아 챙겼다는 사실이 검찰 조사에서 드러나자마자 어떤 기독교계 원로이자 정계원로가 ‘노무현은 자살하라’ 라는 글을 쓰기도 했고 인터넷 게시판에는 온통 그분의 위선적 행보를 질타하는 글로 도배가 되어 있었어요. 수천 억 원, 수조 원을 해먹고도 자기 통장에는 29만원 밖에 없다고 사기를 치고 있는 그 전 대통령들의 비리가 밝혀졌을 때에는 혹시 무슨 불똥이 튈까봐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던 인간들이 이제 대통령이 만만한 시대가 되니까 마구 독설을 내뿜고 있는 것입니다. 청렴과 정직을 모토로 내세워서 살던 그분이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요? 그러한 무리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안타까운 것은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거기에 일조를 했다는 거예요. 그것도 정치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뉴 라이트니 뭐니 하면서 그분을 좌익으로 몰아가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분을 옹호하는 게 아니에요. 왜 기독교가 정치판에까지 끼어들어서 역사를 좌지우지하려하느냐는 거예요. 기독교는 현실을 바꾸고 정치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고 체제를 바꾸는 데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데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거예요.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자신이 먼저 낮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인 것이고 나 때문에, 이 타락한 기독교 때문에 불법과 방종이 이 나라에 판을 치는 것이다, 라고 회개를 해야 되는 것이지 횃불을 들고 나와서 고치겠다, 하는 게 아닙니다. 먼저 선행해야 될 것을 놓치고 있는 거예요. 교회가.
전직 대통령이 50억을 먹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안전하게 더 많이 해먹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면서 자신을 돌아봐야 되는 거지 대번에 저 나쁜 놈 하면서 나서면 안 되는 거예요. 정말 여러분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자식을 유학 보내고 싶은데 돈이 없어요. 그런데 후원자라는 사람들이 떡고물을 챙기고자 현금으로 돈을 들고 와서 줄을 서있어요. 그거 안 받으시겠어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그런 사실들을 대하면서 우리 인간의 죄 성을 폭로당하고 회개의 자리로 가야하는 거지 나라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라는 위선과 교만의 자리로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 그 큰돈이 오는데 안 받겠다고요? 천만의 말씀. 누가 누구를 가리켜 욕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그분이 자살을 했다는 것을 들어서 기독교 네티즌들이 악플을 달기 시작했어요. 자살을 했으니까 지옥 갔을 거라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신학적 담론은 뒤로 미뤄두자고요. 그 행위 자체를 놓고 한번 보잔 말에요. 여러분 누군가가 우리 주변에서 자살을 했다면 그건 그가 자살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거고 그가 그러한 궁지로 몰리고 있을 때 내가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는 것을 개탄하며 회개를 해야 되는 거예요.
기독교인의 본분은 나누는 거라면서요? 그런데 왜 우리 주변에서 사람이 죽어나가야 되죠? 한국에 기독교인이 20%라면서요? 25%인가요? 그런데 왜 거기에서 사람들이 하루에 33명씩 죽어나갑니까? 그것도 자살로. 하루에 33명. 그게 바로 교회의 잘못입니다. 미국의 신학자인 스탠리 하우워스는 자살을 행위자에 대한 판단으로 귀결시키지 말고 공동체로써 공동체 구성원의 삶을 보듬어 주는 데 실패했다는 증거로 보라 그래요. 회개의 동기로 삼으라는 거예요. 누군가의 자살은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어주는 데 실패한 ‘나’의 죄인 거예요. 교회의 잘못인 것입니다. 근데 그 사람을 향해서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그는 자살했으니까 지옥 갈 거야, 라는 말을 먼저 내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 백성들의 자식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우리가 회개해야 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건과 상황들 속에서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죄인들의 실체를 배우시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시란 말입니다. 그렇게 크게는 인류의 역사 자체가 하나님 백성들의 자식 만들기 프로젝트의 프로그램을 따라 움직여가는 거고 작게는 우리의 인생도 그러한 관점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가는 길에 꼭 필요한 것들이에요. 요셉이 아무 죄도 없이 형들에 의해 일면식도 없는 애굽 땅으로 끌려가 종살이를 할 때 그의 마음이 어땠겠어요? 철없고 음란한 여인의 계략에 빠져서 무고하게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억울했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죽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요셉은 그 모든 것들을 통과해냈어요. 아니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건과 상황들을, 참을 수 없었던 현실들을 통과할 힘을 주셨던 거예요. 마찬가집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어요. 하나님이 통과하게 하실 것입니다. 견디세요. 이기십쇼. 요셉은 하나님이 던져 넣으신 그 자리에서 그 모든 고난을 다 겪어내요. 우리가 시편 105편에서 찾아 읽었던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약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언약의 사람으로 단련이 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겨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절대 포기시키지 않으시니까. 여러분도 절대 중도에서 실패될 수 없어요. 포기되어질 수 없습니다. 이기십쇼. 그리고 그 상황이 반드시 여러분의 삶 속에 필요한 것이고 필연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담담히 받아들이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가는 길에 꼭 필요한 훈련과정은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어요. 하나님 나라 백성 만들기의 교과 과정에는 월반이라는 게 없습니다. 하나, 하나 다 겪어내야 돼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기 전에는 그 교과 과정이 이수가 안 돼요. 그렇게 하나님의 자식 만들기 프로젝트의 교과 과정을 다 이수하게 되자 어떤 일이 일어났죠? 요셉으로 하여금 아비와 형제들이 구원을 받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러한 현실들이 이루어질 때에 여러분 주변에 있는 하나님 백성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근데 전부 그것들을 안 하려고 하고 세상의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파하려고 하니까 안 되는 거예요. 니나 열심히 믿어라, 고. 예수 믿어서 너 같이 된다면 나는 안 믿고 그냥 지옥 갈래, 라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가 되는 위대한 일, 그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생에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 있어요. 그게 고난으로 시험으로 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거 마다해서는 안 돼요. 우리는 하나님의 바라지입니다. 하나님의 시다바리에요. 하나님을 시다바리 삼아서 여러분의 뜻을 이루려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시다바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가세요.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뜻을 이루어내는 것이 당시에는 즐겁고 행복하고 자랑스러워보일지 모르지만 그건 이 세상 신에게 속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세상의 힘, 이 세상의 신을 돈이라고 함축을 하시면서 그 돈을 가리키는 단어로 무슨 단어를 쓰시죠? Mammon 이란 단어를 쓰세요. 그 맘몬은 신의 이름입니다. 돈은 신인 거예요. 자크 엘럴이 하나님이냐, 돈이냐? 라는 책에서 올바르게 지적을 한 것처럼 돈은 경제적 의미를 넘어서서 신이며 종교인 거예요. 그 돈은 세상의 모든 힘들을 대표하고 있는 거예요. 인기 자랑 명예 그건 신입니다. 하나의 종교에요. 하나님을 몰아낼 수 있는 종교란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물어본 거예요. 나와 이 맘몬과 누구를 택할래? 라고 물어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시다바리 삼아 이 세상 신 쫓아 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돈은, 이 세상 힘은 단순히 중립적인 교화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명을 갖고 있는 힘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모티브가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힘 맘몬, 즉 나의 비전과 나의 야망이 될 때 우리는 반드시 그 세상의 힘이라는 신에 의해 토사구팽 당하는 날이 올 거예요. 여러분 주님께서 돈은, 세상의 힘은 일만 악의 근본이라 그랬죠? 그 일만 악의 근본인 그것이 우리를 죄 속으로 몰아가고 그 죄가 나중에 우리에게 품삯으로 뭘 준다고 그래요? 사망을 준다. 그래요. 거기서 삯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용병에게 주는 월급이라 그랬죠? 실컷 우리를 그렇게 써먹고 나중에 사망으로 토사구팽 시킨단 말입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한신, 천재적인 지략가 한신을 데려다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를 물리치고 난 다음에 요 한신이 두려워서 한신을 죽여 버렸어요. 그 때 한신이 한 말입니다. 사냥꾼이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구나!
죄가, 이 세상의 힘이 바로 우리를 그렇게 토사구팽 시킬 거예요. 왜? 하나님이 마귀를 그렇게 토사구팽 시킬 거예요. 마귀는 하나님과 전쟁하는 대상이 아니라 마귀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잠시 이용당하는 존재에요. 그리고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것처럼 불 못으로 떨어질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토사구팽 시킬 텐데 거기에 붙어있는 모든 자들이 그때 토사구팽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바라지로 살아야 되는 거예요. 돈 바라지로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명예 바라지로 살면 안 되는 거예요. 세상 힘 시다바리로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만 보라고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여러분이 기대고 있는 어떤 것들을 자꾸 쳐가시는 거예요. 그걸 고난 시험, 이렇게 우리가 느낄 수가 있는 거예요. 우린 이 땅에서 그거 끊어내는 삶을 사는 거예요. 거기에 여러분의 현실과 상황과 사건들이 지금 사용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징징거리지 마세요. 그 상황에서. 죽지만 말란 말에요. 하나님이 반드시 살려주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그 역사,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지로 여러분을 끌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게 확인된 분이면 기뻐하란 말에요, 그 상황에서. 굶어죽습니까? 안 죽어요. 저 이 주일 동안 밥 하루에 한 끼씩 먹었어요. 기도할 일이 있어서. 기쁘게 했습니다. 명분이 있으면 가난이 부끄럽지 않아요. 굶어죽는 거 두렵지 않습니다. 뭐가 두려워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있다면서. 여러분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잘 쫓아가세요. 그러면 여러분 큰 횡재 얻습니다. 여러분의 뜻 구하느라 하나님 시다바리로 부리려고 하지 마세요. 거기에서 재앙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견디시고 잘 참으시란 말에요.
아브라함 카이퍼의 위대한 아포리즘,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땅과 영역은 한 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그 명제 앞에서 머리를 숙이셔야 됩니다, 여러분. 전 거기에다 하나를 더 보태고 싶어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땅 영역 시간 사건은 한 치도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작정의 결론은 이미 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확정된 결론, 하나님 나라의 아들딸이라는 확정된 결론을 향하여 가고 계신 거예요. 그 길에 찾아오는 고난과 시험들을 잘 이기시고 견디셔서 여러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끝마치는 날 하나님이 여러분 앞에 서서 째려보면서 너, 내가 니 시다바리인 줄 알았냐? 이러면 어떡하실 거예요?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하나님 만났더니 너는 세상에서 내가 니 시다바린 줄 알았냐? 이런 일갈들이 있으면 어떡할 거예요?
아네요, 여러분. 그런 일갈 듣기 전에 이 땅에서 하나님 바라지, 하나님 시다바리의 삶을 잘 살아내셔야 돼요. 어떤 상황 사건들 받아들이십쇼. 그리고 우리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처럼 그 속에서 감사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