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아들에게/ 민 영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늘 약골이라 놀림받았다.
큰 아이한테는 떼밀려 쓰러지고
힘센 아이한테는 얻어맞았다.
어떤 아이는 나에게
아버지 담배 가져오라 시키고,
어떤 아이는 나에게
엄마 돈을 훔쳐오라고 시켰다.
그럴 때마다 약골인 나는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갖다 주었다.
떼밀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얻어맞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생각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떼밀리고 얻어맞으며 지내야 하나?
그래서 나는 약골들을 모았다.
모두 가랑잎 같은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비굴할 수 없다.
얻어맞고 떼밀리며 살 수는 없다.
어깨를 겨누고 힘을 모으자.
처음에 친구들은 주춤거렸다.
비실대며 꽁무니 빼는 아이도 있었다.
일곱이 가고 셋이 남았다.
모두 가랑잎 같은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약골이다.
떼밀리고 얻어맞는 약골들이다.
그러나, 약골도 뭉치면 힘이 커진다.
가랑잎도 모이면 산이 된다.
한 마리의 개미는 짓밟히지만,
열 마리가 모이면 지렁이도 움직이고
십만 마리가 덤벼들면 쥐도 잡는다.
백만 마리가 달려들면 어떻게 될까?
코끼리도 그 앞에서는 뼈만 남는다.
떼밀리면 다시 일어나자!
맞더라도 울지 말자!
약골의 송곳 같은 가시를 보여주자!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우리나라도 약골이라 불렸다.
왜놈들은 우리 겨레를 채찍질하고
나라 없는 노예라고 업신여겼다.
- 시집 『엉겅퀴꽃』 (창비,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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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덩치와 키가 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힘이 센 사람도 있고 힘이 약한 사람도 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처럼 태생적이기도 하고 후천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힘이 좀 세다고 힘이 약한 사람을 괴롭힐 권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분명히 옳지 않은 일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약육강식의 피라미드가 존재한다지만 그들조차도 경우에 따라서는 나눔과 배려, 자족과 안분의 질서가 발휘된다. 하물며 사람이거늘 ‘약골’이라며 힘센 사람에게 이유 없이 업신여김을 당하고 떼밀려 산데서야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진정한 강자는 함부로 남을 깔보거나 약자위에 부당하게 군림하려들지 않는다. 근력이 좀 세다고 우쭐하고 오두방정 떠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이겨내는 내공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거니와 다른 이에게 인정받지도 못하므로 결코 강자가 될 수 없다. 어떻게든 남을 이겨보려는 욕심만이 넘치므로 주변 사람을 괴롭히는 결과만 빚게 된다. 힘만 앞세우는 인간은 참으로 못났다. 그런 못난 자에게 계속 당하기만 한다면 자존감이 형편없이 떨어져 스스로 비굴해질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얻어맞고 떼밀리며 살 수는 없다’는 분연한 각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바라던 세상도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보고 사는 거였다. 1929년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진 학생 의거도 나라 잃은 학생의 설움이 일순간에 폭발하여 일어났다. 약골이라고 업신여김을 당할 때 약골의 송곳 같은 가시를 보여준 민족의 자존 회복 운동이었다. 그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힘을 모아야한다. 스크랩을 짤 때는 대오가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그때의 약골도 아니지만, 이번 일본의 졸렬한 경제보복에 대처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래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배상을 하는 것은 문명국가의 기본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 그간 정부의 미숙한 대응도 일부 있었고 어제의 원수라도 오늘 손잡는 것이 외교의 철칙이긴 하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일관된 규탄도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효율적인 방법이다. 이럴 때 대오에서 벗어나 “왜 공연히 말썽을 피우느냐” “달라는 대로 줘버리지 그랬느냐” “잘 좀 달래서 진작 이런 일이 없도록 하지” 따위의 그들이 바라는 시나리오대로 언동을 일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내부의 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권순진
첫댓글 "노무현 대통령이 바라던 세상도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보고 사는 거였다" 하는데
워디 그거이 쉬운 일은 아니져.
희망사항일 뿐...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을 다시 생각케하는 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