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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석화시인의 시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천지
《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2011년 8월 25일
《동동타령》에 띄워보는 한 사나이의 삶의 찬가
― 저명한 조선족시인, 작사가 석화의 이야기
박홍화 기자
앞강물 뒤강물에 물오리 동동 뜨고
네 가슴 내 가슴에 기쁨이 동동 뜨네
흐르는 물결우에 버들잎 동동 뜨고
가는 정 오는 정에 사랑이 동동 뜨네
에루화 동동 데루와 동동
동동타령을 부르며 잘 살아보세
연변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익히 들어 알고있는 가요 《동동타령》이다. 1987년에 지어진 노래 《동동타령》은 20여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연변인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애창가요로 사랑받고있다. 《동동타령》에 이어 《사랑은 영원히》, 《노래를 부릅시다》, 《어머님생각》, 《돌다리》 등 입에 착착 달라붙는 감미로운 가사로 대중들에게 수많은 애창가요를 선물해준이가 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연변의 저명한 시인, 작사가 석화선생이다. 수많은 류행곡을 탄생시킨 석화선생의 내면을 좀 더 집중적으로 조명해보기 위해 기자는 일전에 석화선생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글서글한 성미에 배려심과 따뜻함까지 엿보이는 석화선생은 옆집아저씨같은 푸근한 모습이 인상적이였다.
동란의 년대에 자아를 찾은 문학소년
1958년 7월,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백금향부련회 주임이였던 어머니 최인숙과 동북군정대학 교관이였던 아버지 석창호사이에서 2형제중 막내로 룡정에서 태여난 석화는5살이 되던 해에 부모를 따라 화룡으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꿈많은 학창시절을 보냈다. 다른 친구들보다 우월한 가정형편에서 태여난것을 행운이라고 자부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석화가 소학교에 입학하던 바로 그해에 느닷없이 터져버린 문화대혁명의 풍랑은 소년의 학구열을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렸다. 책보를 메고 학교에 가면 연필 대신 곡괭이와 낫을 잡아야 했고 신나는 체육운동 대신 뜨락또르를 몰고 저수지수로를 개척하는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소년 석화는 학창시절의 아름다운소망을 끝없는 의무로동에 빼앗기기보다는 뭔가 그속에서 의미를 부여할만한 존재를 찾고싶었다. 결국 석화는 학교선전대에 들어가 눈대중으로 손풍금연주기교를 배웠고 선전대원들과 함께 의무로동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펼쳐 심신이 지친 사람들에게 쾌락을 전해주었다. 노래가 있고 춤이 있어 늘 유쾌한 석화였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항상 공허함이 감돌았다.
“등대지기”로 다가선 선생님의 은혜
그런 그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의 담임교원이였던 한병춘선생님이였다. 어느날,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선생님의 집으로 간 석화는 입이 떡 벌어지는 집안풍경에 못박힌듯 굳어지고말았다. 눈에 띄는 가구 하나없이 소박하기만 한 가운데 집안 대부분의 벽을 떡하니 차지하고있는 책궤에는 동서고금의 명작과 국내외 내노라하는 작가들의 문학작품집들이 빼곡이 진렬되여있었는데 그 수와 종류만 해도 헤아릴수 없을 지경이였다. 한병춘선생님이 넋을 잃고 서있는 석화곁에 조용히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석화야, 책속에 지혜가 있고 책속에 미래가 있으며 책속에 네가 가야 할 방향이 있을것이다. 오늘부터 우리 집에 다니면서 네가 보고싶은 책들을 마음껏 읽거라.”
석화에게 선생님은 “등대지기”같은 존재로 다가서면서 길을 밝혀주었다. 그날부터 석화는 거의 선생님의 집에서 살다싶이 하면서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국내외명작들을 걸탐스레 읽으면서 감동적인 문구들은 목책에 차곡차곡 적어가는가 하면 가끔씩 감정을 추스리면서 서툴게나마 자신만의 작품구상에 골똘하는 제자의 기특한 모습을 보며 한병춘선생님은 드디여 때가 되였음을 직감하고 조용히 석화를 불렀다.
“석화야, 본격적으로 문학공부를 해보지 않으련? 문학창작을 통해 너의 삶이 한결 풍요로와질것 같은 희망이 보이는구나.”
석화는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장점을 발굴해주고 직접 가야 할 방향까지 잡아주시는 한병춘선생님이 그렇게 고마울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소개로 며칠후 석화는 당시 연변의 조기천, 뿌쉬낀이라 불릴만큼 유명했던 김문회시인과 운명같은 만남을 갖게 되였다.
김문회시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처음으로 김문회선생님을 찾아가던 날, 그날의 설레임과 감동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히 기억된다며 석화선생님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한병춘선생님이 적어주신 친필소개신과 주소가 적혀진 략도 한장을 달랑 들고 석화는 무작정 길을 떠났다. 화룡시가지에서 수십리 떨어진 송화평까지는 허허벌판이 끝없이 펼쳐진 한적한 시골길이였다. 게다가 때는 찬바람이 쌩쌩 불어치는 한겨울이였다. 손발이 꽁꽁 얼어드는 추위보다 인적없이 으스스한 기운마저 감도는 한적한 시골길을 걷노라니 두려움과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지만 간절히 소망하던것을 배울수 있다는 희망에 벅차 석화는 2시간남짓이 쉬지 않고 달려 선생님의 집에 당도했다. 추위에 입마저 굳어버린 석화를 김문회선생님은 따뜻한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서툴게나마 석화가 직접 창작한 몇편의 시를 훑어보던 김문회선생님의 눈빛에 대견함이 그득했다. 그번 만남이후로 석화는 3년을 하루와 같이 화룡과 송화평을 오가면서 김문회선생님으로부터 언어를 다듬고 구성을 짜고 주제를 파악하기까지 문학창작의 기본공을 차곡차곡 익혀갔다. 서툴기만 했던 석화의 작품에 점차 남다른 감성과 넋이 서리기 시작하면서 실력이 향상된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1975년 5월 9일, 드디여 석화의 처녀작이 《연변일보》를 통해 보란듯이 첫 고고성을 울렸다. 제자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가는 곳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제자의 자랑을 늘여놓는 한병춘선생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석화는 드디여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함께 코끝이 찡해졌고 “유아독존”이라는 발칙한 상상까지 들었다. 그후 《연변일보》와 《홍소병》 등 간행물에 륙속 작품을 발표하면서 석화는 명실공히 화룡시의 꼬마문인으로 성장했다. 문화대혁명으로 10년만에 재개해 전대미문의 대학입학열풍을 일으켰던 1977년 대학시험에서 석화는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했다.
“인생을 사는 방식은 모두가 평등할지 몰라도 인생의 등대지기같은 은인을 만난것은 저의 행운의 시작이였습니다.”
석화는 한병춘선생님과 김문회선생님과의 만남을 이같이 짧고 굵은 한마디로 귀결했다.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여버린 선생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어느덧 석화선생의 얼굴을 붉게 상기시켰다…
시인에서 작사가로
대학생이 된 석화는 문학의 기초지식과 정수로 자신을 무장하면서 진정한 시인으로 발돋움했고 대학생시인신분으로 당시 저명한 시인이였던 김성휘선생이 편집한 시집에 자신의 작품을 수록하는 영광까지 누렸다. 1982년에 대학을 졸업한 석화는 화룡현방송국에서 1년간 사업하다가 다시 연변인민방송국 음악편집부에 배치받았고 또 한번의 운명같은 만남을 통해 시인 석화에서 작사가 석화로 탈바꿈했다. 그때 만난이가 바로 이름 석자만으로 연변가요계를 평정할만큼 명성이 자자했던 작곡가 동희철선생님이였다. 동희철선생님은 젊은 시인 석화에게 지대한 관심과 배려를 베풀었고 시와 가사의 미묘한 차이를 이야기해주었다. 동희철선생의 지지에 힘을 얻어 석화는 점차 작사의 묘미를 터득하면서 작사가의 행보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그의 천부적인 재질은 한수 또 한수의 주옥같은 류행곡들을 탄생시켰다. “천지문학상”, “지용시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 등 아름찬 영예를 줄줄이 따내며 석화는 진정한 연변의 문인으로 성장했다. 1992년에 다시 연변인민방송국 문학부 주임으로 전근된 석화는 연변의 방송문예사업에 큰 활력을 불어넣는 한편 조선족청중들의 문화소질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추억의 노래》와 동행한 작사가의 삶
석화가 갓 방송국에 배치받은지 얼마 안돼 함께 일하던 음악편집 황상룡선생이 석화에게 악보 한장을 넘겨주며 말했다.
“석화동무, 이 작품을 좀 보오. 1982년에 한병낙선생이 작곡한 노래요. 선률은 누가 봐도 최고인데 몇년이 지나도록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고있다오. 아마도 가사가 시청자들의 마음에 닿지 않는것 같소. 이대로 잊혀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멜로디이니깐 석화동무가 젊음의 열정으로 한번 살려보지 않겠소?”
악보를 받아들고 피아노로 직접 화음을 넣으며 멜로디를 음미해보던 석화는 4분의 4박자로 된 멜로디에 담겨진 애절한 그리움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며 부지중 “이거구나!”하는 전률과 함께 기막힌 령감이 떠올랐다.
“제가 한번 가사를 써보겠습니다.”
석화는 속으로 수없이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그리움의 근원을 찾아 말초신경을 곤두세웠다. 며칠후, 석화는 드디여 《추억의 노래》라는 제목의 가사를 들고 한병낙선생을 찾아갔다.
맑고 푸른 하늘가에 기러기 줄지어 가면
잊지 못할 학창시절로 마음은 날아가네
선생님 품속에서 즐겁게 뛰놀던
넓은 운동장 밝은 교실로 돌아가본다네
정든 교정의 백양나무도 몇번 푸르렀던가
선생님의 귀밑머리에 백발 서렸으리
아득히 세월이 흘러간다 해도
그 언제나 젊어계실 선생님모습
석화가 내민 가사를 받아 단숨에 읽어본 한병낙선생은 격동을 금치 못했다. 빛바래져가던 기존의 멜로디에 가사만 바꿨을뿐인데 가사에서 전해지는 애절한 그리움이 잔잔한 멜로디와 묘하게 어울러지면서 색다른 감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재탄생된 《추억의 노래》는 황영애가수의 독특한 음색과 완연일체가 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더니 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시청자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있다.
1시간만에 탄생된 《동동타령》
1987년의 어느날, “제2차 예술제”를 앞두고 석화는 수많은 작사, 작곡가들과 함께 연길시 민주촌에서 창작활동에 몰두했다. 프로그램을 짜던중 작곡가 안계린선생이 내심 기대되는 어조로 석화에게 말을 걸어왔다.
“연변가무단의 김응, 리정숙 가수가 부른 《오래오래 앉으세요》에 버금가는 2인창을 만들어보고싶은데 석화선생이 좋은 가사 하나 써줄수 없겠소”
“2인창이라…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어떤 내용이면 좋을가요?”
“경쾌하면서도 생활감이 넘치는 가사가 좋을듯 싶은데…”
깊은 생각에 잠겼던 석화는 이윽고 무릎을 철썩 내리치더니 “잠간만 기다려주십시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휑하니 밖으로 뛰여나갔다. 30분도 채 안돼 만면에 웃음을 지은 석화가 다시 집에 들어서면서 가사가 적힌 종이를 안계린선생에게 넘겨주었다. 단숨에 가사를 읽어본 안계린선생은 “바로 이거요!”라는 환호성을 지르더니 석화가 그랬듯이 벌떡 일어서서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그리고 얼마 안돼 격동을 자제하지 못한채 성큼 집에 들어선 안계린선생은 즉흥적으로 석화가 지은 가사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석화도 안계린선생도 현장에 있던 모든 작사, 작곡가들 모두 생활감이 넘치는 가사에 경쾌하고 감칠맛도는 멜로디가 어울러진 작품의 탄생에 희열을 느끼며 손바닥이 얼얼해나도록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그렇게 불과 한시간도 안된 짧은 시간에 탄생된 노래 《동동타령》은 석광선, 남정희 두 가수의 애틋한 음색과 어울러지며 대중가요로 떠올랐고 그번 예술제의 “최우수상”에 이어 “진달래문예상”까지 받아안았다. 2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동동타령》은 연변시청자들속에서 변함없는 사랑을 받으며 애창가요로 불리우고있다.
“가족은 가장 큰 행운을 갖다준 운명의 만남이였습니다”
석화는 안해와 딸에 대해 “가족이라는 울타리안에서 만난 또다른 행운”이라고 일축했다. 일찍 대학동창생이였던 안해 현영애와의 만남은 석화의 삶에 최고의 행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선후로 화룡현5중과 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사에서 교원, 편집일에 종사했던 안해 현영애의 삶의 중심에는 항상 남편 석화가 있었다. 창작에 열중한답시고 집안일에는 수수방관인 남편에게 화가 나고 섭섭할만도 했지만 안해는 남편의 작품창작에 루가 될가봐 로심초사하면서 가냘픈 두어깨로 묵묵히 가정의 중임을 떠멨으며 매 하나하나의 작품이 탄생할 때마다 누구보다 기뻐하며 남편의 로고를 위로해주었다. 그런 안해가 있었기에 작품구상에서 더욱더 풍부한 감수성을 이끌어낼수 있었고 자신의 모든 작품에는 안해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과 미안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며 게면쩍은 웃음을 지었다. 유일한 딸 석현은 아버지의 문학적 정수를 그대로 물려받아 소학교시절에 꼬마작가로 당당히 책을 출간했다. 어린줄로만 알았던 딸애가 어느날 느닷없이 두툼한 원고뭉치를 내밀며 “아버지, 제가 쓴 소설이예요”라고 했을 때 석화는 온몸에 전률을 느꼈단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밤을 꼬박 새여가면서 딸애의 소설을 읽은 석화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딸애의 재능에 또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소학교 5학년생이였던 딸 석현이는 아버지의 도움을 일절 거부한채 담임선생님과 출판사관계자들의 인증절차를 당당히 통과하면서 중편소설집 《개구쟁이친구들》을 출간했다. 그런 딸애가 자신의 뒤를 이어줄거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기도 했었지만 중학교에 입학한 딸애는 문학보다는 리과방면에 농후한 흥취를 보이더니 결국 우수한 성적으로 상해교통대학에 입학했다. 졸업당시, 학교에 남아달라는 학교측의 간절한 제안에 망설임도 잠시, 끝없는 향학열을 불태우며 일본 도꾜대학측의 초청에 응해 일본류학길에 올랐다. 현재 도꾜대학에서 생명공학연구에 몰두하고있는 딸애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 잠간 이야기를 멈추는 석화선생의 얼굴에는 아버지특유의 푸근한 미소가 번지고있었다.
“안해의 헌신이 밑거름이 되고 딸애의 성장이 윤활유가 되였으며 저의 성공이 동력으로 되여 우리 가족은 시들지 않는 행복을 꽃피울수 있었습니다. 가족은 초심을 잃지 않도록 저를 독려해주는 영원한 축입니다.”
석화선생의 말이다.
《중국조선족가요100년》
석화의 생은 문학과 어울러진 삶이였고 그 삶의 진가는 그가 선물해준 수많은 주옥같은 창작작품들이 증명하고있었다. 황영애, 김상운, 석광선, 남정희, 유병걸, 구련옥, 김경자, 리호원, 한국화, 한해연 등 그동안 석화가 작사한 노래를 불러 가수로서 자신만의 히트곡을 남긴 유명가수들도 많다. 수십년동안 석화의 붓끝에서 창작된 작품들은 시집 《나의 고백》, 《꽃의 대화》, 《연변》, 《세월의 귀》에 게재된것들을 포함해 수천수를 훌쩍 넘는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약 5년동안 한국배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중한문학에 대해 깊이있는 연구를 마치고 석사학위를 따낸 석화는 계간 《한국문학예술》에 “중국시인과의 교류시”라는 작은 작품마당을 형성하고 수년전부터 중국의 유명한 시작품들을 한국어로 번역해 매기마다 련재로 게재하면서 중국시문학의 발전추세를 한국문화시장에 적극 전파하고있다. 또한 우리 민족 100년의 삶이 녹아있고 조상들의 문화정취가 물씬 풍기며 민족의 애완이 담긴 노래들을 새롭게 발굴해 선인들이 이룩한 노래예술의 전통을 계승발양하고 민족문화의 토양을 비옥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석화는 얼마전부터 “중국조선족가요100년”이라는 책의 집필에 두팔걷고 나섰다. 선조들이 이 땅에 이주해서부터 만들고 불렀던 노래들중에서 해당 사회의 사회성과 문화성을 가장 잘 반영한 대표적인 가요작품들과 그 속에 담겨있는 이야기들을 수집정리해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 60돐 헌례도서로 증정할 예정이란다.
하루하루 더 보람있는 일로 오늘의 삶을 열심히 적어가고있다는 석화, 현재 집필중에 있는 《중국조선족가요100년》에 가장 진실되고 알찬 재료들을 수록하기 위해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재료수집과 정리에 쏟아붓고있다는 석화선생의 거침없는 행보를 내심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박홍화 기자
첫댓글 석화 시인의 소식을 접할 수 있어 기쁩니다.
가을에는 석화 시인의 새로운 시와 작사의 탄생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