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김주열
전라북도 남원(南原) 출생. 남원 금지중학(金池中學)을 졸업하고, 1960년 마산상고(馬山商高)에 입학하였다. 그해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실종, 한 달 후인 4월 10일 최루탄(催淚彈)이 눈에 박힌 채 유기(遺棄)되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발견되고, 이것이 경찰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학생과 시민의 분노가 또다시 폭발하여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라북도 남원시 출신의 민주 열사.
[개설]
김주열은 마산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되어 4·19혁명의 영원하고 유일한 상징 인물이 된 열사이다.
[활동사항]
김주열은 1944년 10월 7일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재계(金在桂)와 어머니 권찬주(權燦珠) 사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위로는 누이가 둘 있고 아래로 동생이 있었다. 할아버지 김태종(金泰鐘)은 해방의 혼란기에 면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꾼 부잣집이었다.
김주열이 어린 나이에 죽었으면서도 비교적 많은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사진기와 전축을 가진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어머니 권씨는 함양 사람으로 ‘함양댁’이라 불렸으며, 이는 김주열의 영남 지방과의 인연을 암시하고 있다.
1956년에는 금지동초등학교를, 1959년에는 금지중학교를 각각 6회로 졸업했다. 이어 진주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반대해 남원농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몇 달을 다니지 않고 집에서 재수를 시작했다.
입학 시험이 가까워 오자 김주열은 1960년 초에 서울로 올라가 YMCA 고교 입시 학원에 다니며 공부하다가 철도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지만 실패하고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그러나 형 김광렬(金光烈)의 친구이며 형같이 따르던 하용웅의 권유로 마산상업고등학교에 다시 원서를 내게 된다. 당시에는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계가 기울어 학비가 들지 않는 철도고등학교 입시를 치러야 했는데, 기우는 가계를 일으켜 세우려면 은행원으로 취업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권유에서였다.
김주열은 마산상업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고 남원으로 왔다가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 김광렬과 함께 마산으로 갔다. 합격자 발표일은 3월 14일로 공시되었으나 3·15선거를 앞두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꺼린 교육청에서 합격자 발표의 연기를 종용해서 16일로 연기되어 있었다. 김주열이 3·15선거 당시 마산에 있게 된 이유다.
김주열은 3월 15일 하용웅 선배의 담임 선생님을 통해 합격했음을 확인하였지만 남원으로 되돌아올 수 없었다. 당시에는 마산에서 남원까지 꼬박 하루가 걸려서 첫차를 타지 못하면 도중에서 유숙해야 했기 때문이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부정과 비리, 억압으로 점철되었다. 3인조, 5인조 방법은 물론 사전 투표와 선거 통지표 가려 주기 등 모든 부정과 비리가 동원되었다.
김주열의 이모할머니는 열렬한 민주당 당원이었다. 당연히 투표 통지표가 전달되지 않아 종일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산에서의 부정 선거가 들통이 났고,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자 이를 목격한 이모할머니가 집으로 와 김주열과 김광렬에게 시내에 나가보라고 한다. 이에 시위대에 합류하게 된 두 형제 중 김주열이 돌아오지 않은 채 행방 불명으로 처리되었다.
어머니 권씨가 마산으로 달려가 김주열을 찾아 헤맸으나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하고 4월 11일 고향 남원의 첫 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어머니가 귀향하고 있던 그 시간 11시경에 마산의 중앙 부두에 미국제 최류탄이 눈에 박힌 시신이 떠오르고, 이 주검이 김주열로 확인되자 용공 분자의 난동, 좌익 폭등으로 내몰린 마산 시민들의 울분이 다시 터져 올랐다. 마산의 2차 의거가 시작된 것이다.
4월 11일 마산 2차 의거는 부산, 광주 등지에도 불을 지폈고,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감행한다. 그러나 정치 깡패들이 이 시위대를 급습해 수많은 학생들이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4월 19일 서울과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4·19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 일가는 아들 이강석의 권총에 의해 죽고, 4월 26일 대통령 당선자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도망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죽었다.
[상훈과 추모]
4월 11일 시신 인양으로 4·19혁명을 이끌어낸 김주열은 4월 14일 고향 선산인 남원시 금지면 우비산 자락에 묻혔으며, 1995년 4월 11일 마산상업고등학교에서는 김주열에게 명예 졸업장을 추서했고, 그 졸업장은 김주열 열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2.춘향이
고대소설 《춘향전(春香傳)》의 여주인공. 남원의 퇴기(退妓) 월매(月梅)의 딸. 남원 부사(南原府使)의 아들 이몽룡(李夢龍)과 백년가약을 맺었으나 부사의 서울 전근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새로 부임한 부사 변학도(卞學道)의 수청(守廳) 강요를 거절하여 옥에 갇혀 온갖 고생을 하다가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된 몽룡에 의하여 구출되고, 왕에 의해 정렬부인(貞烈夫人)이 되었다. 아름답고 순결한 한국 여성의 상징적인 열녀(烈女)로 널리 알려져 있다.
3 김용택
전북 임실 출생. 순창농림고교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1982년 창작과 비평사의 『21인 신작시집』에 연작시 「섬진강」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초기시는 대부분 섬진강을 배경으로 농촌의 삶과 농민들의 모습을 정감있게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연작시 「섬진강」의 경우, 시적 서정성만이 작품의 지배적인 정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농민들의 일상이 조밀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현실의 각박한 변화와 농촌의 퇴락을 비판과 풍자의 시선으로 지켜보기도 한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김용택의 시적 경향은 보다더 직관적이면서도 깊이있는 정서를 담는 격조 있는 서정시로 변모하고 있다.
이같은 변화는 특히 소월시문학상의 수상작이 된 시 「사람들은 왜 모를까」와 같은 작품에 이르면 더욱 분명하게 하나의 시적 개성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가 다루고 있는 시적 언어의 소박성과 그 진실한 울림은 토속적인 공간으로서의 농촌이 지니는 전통적인 가치와 새로운 현대적 변화를 연결해주는 정서적 감응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일상의 체험을 시적 대상으로 하면서도 그 소탈함과 절실함을 동시에 긴장감 있게 엮어내는 시적 상상력은 독자적인 시적 경지를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가 부박한 모더니즘에 휩싸이지 않고, 격정적 이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정서적 균형과 언어적 절제를 지키면서 아름다운 시로써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1986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97년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 『섬진강』(1985), 『맑은 날』(1986), 『꽃산가는 길』(1988), 『누이야 날 저문다』(1988), 『그리운 꽃 편지』(1989), 『그대, 거침없는 사랑』(1993), 『강 같은 세월』(1995), 『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1996), 『그 여자네 집』(1998), 『콩, 너는 죽었다』(1998), 『그리운 꽃편지』(1999), 『누이야 날이 저문다』(1999), 『그대 거침없는 사랑』(2003),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줄 것이다』(2008), 『수양버들』(2009) 등을 간행하였다.
4 공선옥
1964년 전라남도 곡성군에서 출생하였다. 1983년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휴학을 한 후 등록을 하지 않아 제적되었다. 1991년 《창작과비평》에 중편소설 《씨앗불》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여성의 운명적인 삶과 모성애를 뛰어난 구성력으로 생생히 그려낸 작품이 주를 이룬다. 1992년 단편소설 《목숨》을 발표하고, 단편소설 《장마》로 제4회 여성신문 문학상을 받았다. 1993년 장편소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이 출판되었다. 1994년 《불탄 자리에 무엇이 돋는가》, 《우리 생애의 꽃》, 《목포는 항구다》를 발표하고,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를 출간하였다. 1995년 계간지 《리뷰 Review》에 장편소설 《시절들》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이외의 작품에 《모정의 그늘》(1995), 《우리들의 고향》(1995), 《내 생의 알리바이》(1998), 《수수밭으로 오세요》(2001), 《멋진 한세상》(2002), 《붉은 포대기》(2003)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2000), 《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2003) 등이 있다.
1995년 제13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으며, 2004년 제12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문학 부문)을 받았다.
5.조태일
호는 죽형(竹兄). 1941년 9월 30일 전남 곡성 태생. 1966년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시 전문잡지 『시인』 주간을 지냈으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등을 역임했다. 제10회 만해문학상, 편운문학상, 전라남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아침 선박」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이듬해 시집 『아침 선박』을 간행하였고, 계속하여 『식칼론』(1970), 『국토』(1975), 『가거도』(1983), 『연가』(1985), 『자유가 시인더러』(1987), 『산 속에서 꽃 속에서』(1991), 『풀잎은 꺾이지 않는다』(1995),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1999) 등을 발간했다.
한편 평론집 『살아있는 시와 고여있는 시』(1981), 『김현승 시 정신 연구』(1998) 등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의 초기 시는 원시적인 삶에 기반을 둔 상상력에 의하여 삶의 순수성을 보여주는 세계상을 그리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는 삶에 대한 순결성이 철저하게 파괴된 현실 앞에서 진실을 은폐하려는 기도에 당당히 맞서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시를 통해 민중적 연대감을 획득하고자 한다. 1970년대 참여시의 한 성과로 주목되었던 연작시 「식칼론」은 삶의 순결성을 유린하는 제도적인 폭력에 맞서서 시인의 자세와 역사의식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여기서 ‘식칼’은 단순한 싸움의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아를 일깨우며 자극하는 무서운 자기 확인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모두가 서로를 위해 공유할 수 있는 삶의 공통 수단으로서 그 의미가 확대된다. 시집 『국토』(1975)는 분단 현실의 폭력성과 허구성을 고발하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충만해 있는데, 이는 분단을 극복하고 남과 북을 아우르는 건강한 민중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 『가거도』(1983)에서는 민중적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보여주고, 삶의 내적 충일을 통한 역동성을 발견하고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