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 3월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뒤 실종 27일만인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알루미늄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과 시신 발견 소식은 4월 11일 부산일보 허종 기자의 기사 로 세상에 알려지고 전국으로 번져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춘향이-
숙종 대왕 초 전라도 남원부에 월매라는 퇴기가 있었다. 그녀는 아기 갖기를 소원하여 성참판과 동거하여 춘향이라는 아리따운 딸을 낳았다. 자색이 천하에 일색인 춘향은 성장하면서 시서에 능하였다. 어느 화창한 봄날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은 방자를 데리고 광한루에 올라 춘흥에 겨워 시를 읊고 있었다. 이때 춘향은 향단이를 데리고 광한루 앞 시냇가 버들숲에서 그네를 뛰며 놀고 있었다.
우연히 춘향을 발견한 이도령은 한눈에 반하여 방자를 시켜 춘향을 불러오게 한다. 두 사람은 상봉하여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헤어지면서 이도령은 밤에 집으로 찾아가겠노라고 언약한다. 글방으로 돌아온 이도령은 춘향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며, 책읽기도 건성이었다. 드디어 밤이 되자 이도령은 방자를 앞세워 춘향의 집을 찾아간다. 그는 춘향과 백년가약을 맺고자 월매에게 자신의 결심을 밝힌다. 월매는 난봉꾼의 수작 정도로 여기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두사람의 혼약을 수락한다.
이도령은 밤마다 춘향을 찾아 사랑을 속삭인다. 그런데 이부사가 내직으로 전출하게 되어 이도령은 부득불 상경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이도령은 춘향에게 후일을 약속하고 서울로 떠나며, 춘향은 이도령으로부터 기쁜 소식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하루하루를 지낸다.
이때 새로 부임한 신관 사또 변학도는 호색한답게 정사는 돌보지 않고 기생점고부터 시작한다. 50여명의 기생을 점고한 그는 마지막으로 춘향을 발견하고 수청을 강요한다. 춘향은 수청을 거절한다. 변학도는 크게 노하여 태형을 가하지만 춘향은 죽기를 결심하고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옥에 갇힌 춘향은 임을 그리워 하다가 잠이 들어 꿈 속에서 이비(二妃)를 만난다. 지나가는 장님에게 물어보니 서방님이 돌아오고 부귀영화를 누릴 꿈이라고 일러준다. 변학도는 자신의 생신연에 마지막으로 춘향의 의중을 들어보기로 하고 만약 그때도 거절하면 처형하겠다고 한다.
서울로 올라간 이도령은 열시히 공부하면서 춘향과의 재회만을 생각한다.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된 그는 전라도로 내려온다. 하루라도 빨리 춘향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에 남원으로 향한다. 도중에 농부로부터 춘향이 봉변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걸인복색을 하고 춘향의 집으로 가서 월매를 만난다. 월매는 딸을 구해줄 이어사가 걸인 복생으로 나타나자 실망하여 딸이 죽게 되었다면서 신세타령을 늘어놓는다. 이어사는 옥중으로 춘향을 찾아간다. 춘향은 이어사를 알아보지 못한다.
변학도의 생신연이 벌어지는 날이 되었다. 각읍의 관장들이 모여 들었다. 생신연은 성대했다. 이어사는 연회에 걸인의 행색을 하고 참석하여 차운(次韻)을 제의하여 높을 고(高)에 기름 고(膏) 두 자를 운으로 시를 지어 탐관오리의 학정을 비판한다. 이어서 어사또가 출도하여 탐관오리 변학도를 봉고파직하고 춘향을 구한다. 춘향은 수절로 정렬부인으로 봉해져 삼남이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며, 이어사는 후에 좌우영상까지 지낸다.
김용택(섬진강1)-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공선옥-
1963년 전남 곡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수학했다. 1991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중편 「씨앗불」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소설에서부터 한국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파헤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을 표하는 따뜻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소설집으로 『피어라 수선화』(1994), 『내 생의 알리바이』(1998), 『멋진 한세상』(2002) 『명랑한 밤길』(2007), 『나는 죽지 않겠다』(2009) 등을 펴냈다. 등단 초기부터 꾸준히 장편소설을 창작하여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1993), 『시절들』(1996), 『수수밭으로 오세요』(2002), 『붉은 포대기』(2003), 『유랑가족』(2005), 『내가 가장 예뻤을 때』(2009), 『영란』(2010), 『꽃 같은 시절』(2011) 등을 발간하였다. 이 가운데 생명에 대한 애착과 모성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도록 했던 『붉은 포대기』와 사람의 터전을 따라 고통의 세월을 보내면서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유랑민들의 애환을 그려낸 『유랑가족』은 공선옥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만 하다. 동화 『울지 마 샨타』 등을 비롯하여 산문집으로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2000) 『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 (2003), 『행복한 만찬』(2008) 등이 있다.
1995년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고 2004년에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명랑한 밤길』의 성과를 높이 평가받아 제1회 백신애문학상(2008)의 수상자가 되었으며 2009년도에는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조태일-호는 죽형(竹兄). 1941년 9월 30일 전남 곡성 태생. 1966년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시 전문잡지 『시인』 주간을 지냈으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등을 역임했다. 제10회 만해문학상, 편운문학상, 전라남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아침 선박」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이듬해 시집 『아침 선박』을 간행하였고, 계속하여 『식칼론』(1970),
『국토』(1975), 『가거도』(1983), 『연가』(1985), 『자유가 시인더러』(1987), 『산 속에서 꽃 속에서』(1991), 『풀잎은 꺾이지 않는다』(1995),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1999) 등을 발간했다.
한편 평론집 『살아있는 시와 고여있는 시』(1981), 『김현승 시 정신 연구』(1998) 등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의 초기 시는 원시적인 삶에 기반을 둔 상상력에 의하여 삶의 순수성을 보여주는 세계상을 그리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는 삶에 대한 순결성이 철저하게 파괴된 현실 앞에서 진실을 은폐하려는 기도에 당당히 맞서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시를 통해 민중적 연대감을 획득하고자 한다. 1970년대 참여시의 한 성과로 주목되었던 연작시 「식칼론」은 삶의 순결성을 유린하는 제도적인 폭력에 맞서서 시인의 자세와 역사의식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여기서 ‘식칼’은 단순한 싸움의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아를 일깨우며 자극하는 무서운 자기 확인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모두가 서로를 위해 공유할 수 있는 삶의 공통 수단으로서 그 의미가 확대된다. 시집
『국토』(1975)는 분단 현실의 폭력성과 허구성을 고발하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충만해 있는데, 이는 분단을 극복하고 남과 북을 아우르는 건강한 민중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 『가거도』(1983)에서는 민중적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보여주고, 삶의 내적 충일을 통한 역동성을 발견하고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