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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티안Promethian (NT)적 기질 : INTJ, INTP, ENT.. MBTI
인간을 가급적 신과 유사한 지위를 만들기 위해서 프로메테우스는 빛과 힘의 상징인 불을 인간에게 주었다. 빛과 힘(에너지)을 이용하면서 인류는 자연을 지배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자연을 이해하고 지배한다는 것은 곧 힘을 소유한다는 것이고 이 힘에 대한 욕망은 프로메티안 기질의 유형들을 다른 유형들과 구분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이다.
이들이 NT의 유형, 즉 INTJ, INTP, ENTP, ENTJ들이다. 이들은 인구의 전체비례를 볼 때 다소 숫자가 적다. 그러므로 NT기질의 사람들은 그들과 기질이 다른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SP와 SJ 기질의 사람들은 그들과 동류의 사람들과 함께 계속 접촉을 하고 있지만, NT들은 그들과 기질이 다른 이방인들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NT 학생들의 교사나 그 부모들이 SP혹은 SJ기질의 사람들일 경우는 흔하지만, NT일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 인구에서 NT 기질의 자녀가 양부모 모두를 NT기질로 가지는 경우는 천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다고 보았다.
힘(Power)은 NT들을 매료한다. 여기서 말하는 힘이란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자연을 대상으로 발휘되는 힘이다. 다시 말해, 현상을 이해하고, 조정 통제하고, 예측하고 설명하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사실 이해하고 예측하고 조정하고 설명하는 이 네 가지 측면이 과학이 지향하는 목적이다. 사실 NT기질의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 중에서 과학자를 쉽게 발견한다. 그런데 이런 힘의 형식들은 목적을 향한 수단일 뿐이며 그 목적은 능력이라는 말로 가장 적절히 표현된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하면 NT가 원하는 힘은 권력이 아니라 능력과 자질과 재능과 재주와 기술 같은 것들을 뜻한다.
프로메테우스 유형의 NT는 지성을 사랑하는 데 이것은 다양한 환경에서 일 처리를 잘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형적인 NT기질의 사람들은 이솝우화의 개미가 먹을 것을 저축해야하는 본능을 보이듯, 지식을 낚아채어 쌓으면서 지성을 획득하는 것에 탐닉하는 듯이 보여질 수도 있다. NT에게 책임성과 자발성이 결여된 사기꾼이며 거짓말쟁이이며 협잡꾼이라고 말해 준다면, 그는 당신의 비평을 숙고하고는 "그 말에 일리가 있을는지도 모른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고 NT들이 타인의 비평에 당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그들 자신 스스로가 자신들의 책임과 권위와 자유에 대해 의심과 회의를 자주 품기 때문에 이러한 비평을 일단은 수긍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NT에게 그가 우둔하며,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평을 가한다면 단연코 그들은 이 비평을 쉽게 수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치 없는 자기 비판으로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는 오직 그 자신만이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 있기를 바란다."는 말은 NT의 갈구를 결코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말이다. 그들은 반드시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능력에 대한 그들의 욕구에는 한 가닥의 절박감마저 깃들어 있다. 즉 마치 능력에 대한 욕구로 인해 노예가 되어도 좋다는 강박관념마저 느끼게 한다. 이러한 NT의 강박관념은 SP의 행동수행을 향한 충동과 유사하다. 그러나 NT의 발전하려는 욕구에는 행동 수행에 대한 관심은 없다. 단지 그의 행동 수행은 그의 능력 발휘에 있어서 정확도와 엄정성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SP의 행동을 향한 충동은 NT의 능력에 대한 절박한 요구의 그림자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SP에게 있어서 능력이란 그들이 행동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목적은 아니다. 반면에 NT에게 있어 행동이란 그들이 자부하는 능력을 쌓게 해주는 수단일 뿐이다.
말이 나온 김에 SJ와 NF를 살펴보면 양쪽 기질 모두가 능력과 행동수행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점을 유의한다면 SJ나 NF기질을 더 가까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들은 또 다른 특성을 소유하고 있기에, NT나 SP들이 지닌 행동수행이나 능력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이들을 혼돈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
NT기질은 모든 유형 중에서 가장 자기비판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가 발견되면 그들이 저지른 미흡하고, 개선되어야 할 점을 찾아내어 스스로 자신에게 짐을 지우고, 자신의 진전 상황을 철저히 감시한다. 그들은 시시각각으로 자신의 능력과 내적 사고의 활동을 점검하고 확인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능력이 모든 일과 대상 - 비록 그것이 인간에 대한 것이든,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닌 물질적인 것이든, 형이상학적인 것이든 -을 꼭 이해하고자 한다. 게다가 NT의 성향이 더 뚜렷할수록 지식과 기술 획득에 대하여 자신에게 가혹하고도 엄격한 요구를 한다. NT들은 그들이 선택하는 어느 영역에서나 유능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이 설정한 기준이하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SJ의 '해야한다', '하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내적 규율에 대비하여 NT는 그들의 의식 내부에 '알아야 한다', '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조항들을 지니고 있다.
NT들은 항상 지식을 축적한다. 그들은 결코 삭제 할 줄은 모른다. 이들은 업무수행에 있어 철저한 완벽주의로 흐르는데 이것은 그들이 능력와 우수성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업무수행에 있어서 그들이 설정한 높은 기준은 과중한 스트레스를 유발시키며, 때론 그들의 행동이 긴장되고 강박적으로 나오게 한다.
완벽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 NT들은 자신의 실패와 단정에 지속적으로 마음을 쓰면서 타인들로부터 받는 능력에 대한 비평을 조소와 웃음으로 맞이한다. 대부분의 NT들이 이런 표현을 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외향성의 NT들은 보다 쉽게 표현할 수도 있다.
비록 비평에 대한 반응이 없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에 대한 비평을 가늠하면서 비평자의 타당성을 재고 있다. 비평의 타당성을 요구하는 그들의 태도는, NT들이 어렸을 때부터 잘 알려진 권위자들의 아이디어조차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아이디어 창출자의 지위나 명성이나 자격증에는 NT들은 별 관심이 없다. 단지 그 아이디어 자체가 일관성과 실용성과 합리성이 증명되어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중요함이 밝혀져야 한다.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말한 것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뛰어난 사람도 틀릴 수는 있어." 이렇게 이미 너무도 잘 알려진 어떤 분야의 권위자의 말도 의심 없이 받아들이지 않는 NT의 태도를 접할 때, 특히 프로메티안 기질이 강한 NT들의 이러한 태도를 볼 때 사람들은 그들이 거만하다 혹은 대단히 독특한 개별주의자들이라고 말한다.
내 나이 열두 살이었을 때부터 나는 이미 인간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꽉 차 있었다. 물론 의심할 것도 없이 이 질문은 내 주위에 목적 없이 미소처럼 흐느적거리는 사람들로 인해 더욱 강렬해졌다. 나는 이 질문에 사로 잡혀 인간존재의 의미를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방법이 있으리라 믿었다. 열 네 살이 되었을 때 쇼(Show)의 인간과 초인간(Man and Superman)을 읽었고 내가 이러한 의문을 가지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Colin Wilson, The outsider, New York; Dell Pub. Co., 1956, P. 289 - 90.)
NT들은 믿을만한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실패할 것 같은 위기감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 자주 털어놓는다. 이럴 때 그들은 일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능력이 결핍되어 있고, 상황처리에 적절한 지식이 부족한 상태처럼 느끼게 되어 결국 실패의 위협에 사로잡히게 된다.
지속적인 자기 점검과 의심은 NT들이 짊어지고 가는 짐이다. 이러한 자기 회의적인 경향 때문에 NT들, 그 중에서도 NTP들은 자신의 소신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자신이 설정하는 해결책조차도 회의하는 경향으로, 자기회의 속에 갇혀 요지부동의 상태가 될 때가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NT들은 자신들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거나 자신이 하는 일을 유능하게 잘하고 있음을 결코 믿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수행기준을 높게 잡음으로써 불안을 더욱 가중시킨다. 오늘 만족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일지라도 내일이면 단지 평범한 것으로 판단해 버리기가 일쑤이다.
NT 성향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의 업무수행 기준을 그가 어쩌다 특출하게 잘하는 경우에 맞추어서 정도 이상으로 높게 잡는 경향이 있다. 일상적인 일 처리는 목표도달에 항상 미흡한 것처럼 보이며 부적당한 것처럼 느낀다. 보다 나은 업무수행을 향해 자신에게 굽히지 않는 요구와 자기통제를 가하면서 자신의 노력이 가져오는 득과 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잣대로 잰다.
철저히 이행되는 이러한 자기비판은 자기의 불완전하다는 느낌을 더욱 강화시킨다. 일에 있어서나 놀이에 있어서 NT들은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설정한 기준으로부터 잠시도 자신을 풀어놓지 않는다.
SP들이 자유 분방한 것과 비교해 볼 때 '놀이'에 임하는 NT를 관찰한다는 것은 다소 슬프고 측은하기도 하다. 오락은 건강에 필요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알고 있는 NT는 그의 놀이 계획을 짜고 "노는 시간" 동안에도 오락기술을 진보시키기 위해 무거운 짐을 자신에게 스스로 지운다.
예를 들면 카드놀이를 할 때 그는 실수를 해서는 안되고 브리지 게임에서는 다른 사람이 실수를 할지언정 그 자신은 논리 혹은 전략적인 잘못이나 실책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내세워 자신을 몰아붙인다. 테니스를 할 때에는 어떤 스트로크의 진보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하거나 전에 주의했던 실수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NT는 오락이 그렇게 규정되었으니, 유익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그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짐을 지우기도 한다.
NT들은 그들이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반된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자신을 때로 발견한다. 첫 번째 메시지는 타인들에게. 거의 기대하는 것이 없다는 메시지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별로 아는 것이 없으며, 일을 잘 할 수도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NT가 이 첫 번째 메시지를 보낼 때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의외로 능력을 발견하고, 그 놀라움을 잠정적으로 표현 할 때이다. NT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완전히 알아듣거나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상반된 메시지는 NT자신들이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설정한 기준에 따라 주위의 사람들도 일 처리를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이다.
NT 자신도 물론이거니와 다른 어느 누구도 이 기준에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종 그러했듯이 NT들은 주위사람들에게 과도하게 높은 기준의 행동수행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NT가 보내는 상반된 이 두 가지 메시지의 부산물로써 NT 주위의 사람들은 지적으로 부적당함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NT들을 향해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나누고 토론하기 보다 방어적이고 비 개방적이 된다. 그러므로 NT들은 다른 사람들의 지적 세계와 교류하지 못하고 고립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NT로부터 "멍청"하다는 비판을 받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NT와의 지적 교류를 꺼린다. 이 결과로 NT들은 더욱 다른 사람들의 지식이 별거 아니라는 스스로의 확신을 굳히게 된다.
NT의 이러한 태도는 다른 사람들의 심정에는 별 반항을 일으키지 못하는 반면, 사람들의 사고에는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보기를 들면 마키아벨리가 비록 그 자신이 비천하고 눈에 띄지 않는 신분의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주 정치가로서는 당대에 뛰어났던 로렌조(Lorenzo)를 가르쳤다는 점이다.
전하의 총애를 받기 위하여 그들이 좋아하는 선물을 바치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다. 말이나, 군사, 황금이나 보석 등을 바치오이다. 그러나 전하를 향한 저의 충성의 표시로 저는 저의 재물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연구와 체험을 통한 과거와 현재의 위대한 인물들에 대한 자식이옵고, 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옵니다. 저의 온갖 최선을 다해 위대한 현인들의 행위를 오랫동안 숙고하고 음미한 그 결과를 소책자로 엮어 올립니다. 전하께 바치기에 값어치가 있는지 역시 두려우나, 전하의 인간성에 대한 저의 신뢰는 전하께서 이 책을 즐겨 받아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전하께서 매우 짧은 시간 내에 수년간 제가 온갖 대가를 다 치르고 배워둔 사실들을 납득하게 해 드리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을 드릴 수 있는 힘이 제게는 없음을 알면서, 저의 소중한 이 지식의 소책자를 전하께 바치옵니다. (Niccolo Machiavelli, The Prince Mentor Classic, New York : 1952, P. 31.)
이 글에서도 보듯이 NT들의 의사소통의 특성은 거의 말을 않거나 반복이 없이, 분명하고 정확하며 간결하고 논리적이다. 그들은 "물론 아시다 시피"등의 표현과 같이 이미 알려져 있는 확실한 사실을 재 언급하기를 꺼린다.
왜냐하면 이미 알려진 사실이나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한다는 것은 NT들에게 있어 싫증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비언어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에 별로 의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메시지 이면의 정서적 측면이나 그 이상의 숨은 의미를 간과 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어 선택에 있어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며, 타인들도 그렇게 하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딸로써 영국을 45년간 성공적으로 통치한 엘리사벳 여왕이 그에게 결혼을 요구하는 그의 신하들에게 대립하여 내린 대답은 NT기질이 보여주는 의사소통의 좋은 보기가 될 수 있다.
엘리사벳 여왕의 대답은 인상적이었다. "나는 이 순간 이후 무엇을 할지 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나는 이 순간 내가 그대들에게 선포해 왔던 것 이외에는 마음을 쓰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이상 평범하게 들릴 수 있는 말들이 또 있으랴. (E. Jenkins Elizabeth the Great. New York : Time Publication, 1958, P. 57.)
엘리사벳 여왕은 NF 스타일로 살아온 일생동안의 숙적이었던 스코틀랜드의 메어리 여왕과는 성격적인 면에서 재미있는 대조를 보여준다.
엘리사벳은 항상 그녀 주위의 사람들과 소원하게 지냈고, 메어리는 심지어 그가 감옥에 쳐 넣었던 죄수들로부터도 사랑과 존경을 받을 만큼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메어리의 행동은 감정의 덩어리였다. 메어리는 영국의 여왕이 되려했으나 성격적인 연약성 때문에 자신의 아들인 제임스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엘리사벳의 반응은 논리적이었고 냉엄했다. 자신은 되도록 메어리를 처형하는 일에는 개인적으로 간여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절차를 회한을 지닌 채 처리해 나갔다.
NT는 지식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능력을 중요시하며, 타인들의 분야에서 자주 괄목할 만한 능력을 발휘한다. 행동이나, 의무 혹은 자아실현과 같은 것에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으나 어릴 때부터 형성된 힘에 대한 갈구는 대단히 강해서, 특히 기계와 같은 것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등에 대한 유아적 호기심으로 남아있다.
NT들의 현상설명에 대한 갈구는 질문을 구사할 줄 아는 말을 익히자마자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NT 어린이들은 그들을 둘러싼 세상만사에 놀란다. 그러나 어른들의 불분명한 대답에 만족을 못한다. 정확하게 통합된, 모든 것이 분명히 설명되는 대답을 원한다.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면서 까지 이들은 끝까지 명확한 답을 요구하거나 찾는다. 배운다는 것은 24시간 일거리다. NT 기질이 강할수록 이 경향이 뚜렷하다. 지식을 위한 열정 대문에 NT들이 학교교육을 마칠 즈음에는 이미 대단한 양의 지식을 축적한다. 끈질긴 갈구는 NT들로 하여금 테크날리지(Technology)에 있어 남달리 앞서게 한다. 지적 능력이 개발됨에 따라 NT들의 과학, 수학, 철학, 건축, 엔지니어링 분야와 같이 복잡함과 정확성이 요구되는 분야에 대한 흥미 또한 높아진다. 사실 이러한 분야에는 NT들이 많이 몰려 있다.
아마 어느 다른 기질의 사람보다 NT들은 그들의 일속에서 산다. NT들에게 시간을 한가롭게 소일하라는 요구는 무서운 벌과 같을 것이다. 일을 완수한다는 것은 NT들에게 업무수행의 만족이나, 생산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일이 요구하는 기술이나 지식을 개선하고 개발하고 완벽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NT들은 SP들이 지닌 행동을 향한 열정과 충동이 없다. 그러나 NT들은 일속의 법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온 우주를 대상으로 한, "왜 그것은 그렇게 되어지고 있는가" 하는 법칙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다. 프로메티안 기질을 발휘하여 NT들은 그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뜨거운 열정으로 이해하고자 끈질기게 추구한다.
NT들은 대체로 모델(Model)을 개발하고,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은 과학적 원칙을 개발하고 응용하는 분야의 직종을 선호한다. 과학, 테크날리지, 철학, 수학, 논리, 디자인, 엔지니어링, 연구, 개발, 관리, 생산, 범죄학, 의학, 보안법, 분석 등의 모든 분야가 NT에게 흥미 있는 분야다.
판매나 고객담당, 사무, 보수관리, 분배, 흥행 서비스업종에는 별 흥미가 없다. 그들은 보통 철학, 수학, 과학의 교수직에서나 엔지니어링 혹은 건축 분야에서 흔히 발견된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NT는 능력 위주로 일을 처리하고자 하여 보통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서 능력을 발휘한다. 언제 무엇을 하건 NT들은, 특히 NTJ들은 자신들의 물리적 주위환경이나 아니면 자신이 처한 제도적 체계를 조종하고 바꾸고자 시도한다. NT 성격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엔 렌드(Ayn Rand)는 그녀의 작품 파운틴 해드(The Fountainhead)의 주인공 하워드 로아크(Howard Roark)의 성격특성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그는 그것을 숙고해 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잊어버렸다. 그는 보도의 블록을 쳐다보았다. 그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지구를 의식하고 나서도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마치 아무도 캐물을 수 없고 더 이상 추구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여윈 뺨 위로 광대뼈가 불거졌고, 회색 눈은 차고 깊었고, 경멸적인 입은 굳게 다물어져 마치 사형집행인 혹은 성인처럼 보였다. 그는 보도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것을 깎아서 벽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나무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다시 나누어져 처마로 변했다.
그는 다시 돌들 위에 솟아있는 갈대들의 무리를 통해 철제로 만든 노를 연상했다. 그는 그것을 다시 녹여서 하늘을 받치고 있는 축대를 만들었다. 이 돌들은 여기에 나를 위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들은 드릴을, 다이나마이트를 그리고 나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쪼개어 지기를, 두드리고 깨어지기를, 그리고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내 손을 거쳐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Ayn Rand. The Fountainhead. Signet Books, Bobbs-Merrill Co., New York, 1943, p. 15-16.]
프로메티안 기질의 사람들은 일의 과정이나 정착에 있어 별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시도하는 변화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아이디어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은 비교의 대상이 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배우고자 하며 개방적으로 고려한다. NT들은 자기통제와 의지력과 지적발달에 가치를 둔다. 타인을 대할 때는 대체로 직선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차고, 거리감을 느끼고,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NT에게 어떤 문제에 관하여 자신들의 관점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서슴없이 자신들의 아이디어나 생각하는 바를 말해준다.
NT들은 여유 없이 일에만 사로잡히기 쉽다. 또한 다른 유형들이 현실이라고 하는 이 세상사로부터 유리되어 자신들의 지적인 세계에 묻혀 쉽게 소외되는 경향도 있다. NT들은 대로 자신 속에 몰입해 있는 천재적 재능의 소유자일 때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침실용 슬리퍼를 질질 끌고 뉴욕거리를 나다니면서 극소수의 몇 사람과 겨우 의사소통을 하였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아인슈타인 자신은 이런 것에 대해 후회도 없었을 뿐더러 그 자신의 업적 또한 손상 된 바도 없었다. 그러나 NT들의 업적이 과소평가 될 위험은 항상 있다. 왜냐하면 추상적 관념의 세계를 의사 소통하려는 NT들의 경향 때문에 때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말도 안 되는 공연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취급받기 때문이다.
NT들끼리 함께 모이면, 언어구사에서 오는 미묘한 즐거움을 찾아 말장난하기를 즐긴다. 그들은 복잡하게 얽힌 말귀와 역설적인 표현에 매료된다. 아인슈타인은 "수학적 법칙을 현실에 적용하면 의미가 없고 현실에 적용하지 않는 만큼 수학적 법칙은 의미가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NT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왜냐하면 NT들이 즐기는 루이스 케롤(Lewis Carroll)의 신비의 대륙(Wonder Land)에 등장하는 주인공 엘리스 (Alice)가 쓰는 것 같은 복잡한 언어 구조나 해학 역시 현실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으나, 현실에 적응하지 않는 만큼 그 자체들로써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NT들은 과거는 이미 지나가고 죽은 사건으로 여기면서 자신들의 관심의 초점을 미래에 맞춘다. 이들에게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슨 일이 어떻게 될 것이며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데 있다. 과거는 단지 미래의 방향 선정에 참고하며 "과거를 모르면 같은 역사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교육적 측면에서 가치가 있을 뿐이다. NT들은 결코 실수를 반복하길 원치 않는다. 첫 번째 실수에 대해서도 참을 수가 없는데 그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저주받으라는 소리와 같이 들린다. NT들에게 있어 자신의 실수를 남들이 본다는 것은, 더구나 논리에 있어서 그들의 실수를 남들이 본다는 것은 모욕적이라고 생각한다.
NT들은 일단 테크날리지(Technology)나 이론적 혹은 개념적 틀을 구상하면서, 벌써 다른 일거리나 도전으로 관심을 돌리기 일쑤다. 자신의 일에 이유와 질서를 부여하는 원칙을 확립했고, 필요한 테크닉을 설립하였으면, 그것이 일이거나 논리거나 NT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계속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해 나가고자 한다.
NT들이 다른 사람들이 지닌 동기나 생각을 자신의 머리 속에서 추측하기에 바쁘고, 자신의 체험들을 머리 속의 시스템에 끼워 맞추어 넣으려 애쓰느라 때때로 그들은 직접적 체험을 놓치기도 한다. 또한 그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분석해 밝혀 내느라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생생한 그 사건을 살아보는 체험을 놓칠 수도 있다.
때로 NT들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서, 혹은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혹은 조금 무관심을 가지고 삶의 흐름에서 비껴 나와 방관자의 입장에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삶의 중심에서 약간 자신을 떼어 낸 듯한 이러한 NT들의 무심한 태도는 그들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는 개인적 투신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즉 자신의 감정의 흐름에 무관심하며 둔감한 NT들이 때로 결혼 대상자로써 결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상대자에게 일생을 언약해 버리는 경우가 그 좋은 보기이다. 포스터(Forester)의 작품에 나오는 제단 앞에 선 주인공의 모습에서 이러한 성격의 비극성이 잘 묘사되고 있다.
"나를 따라 말하시오." 주례신부가 말했다. "나, 호라시오는 마리아 엘렌을..." 혼블로우어(Hornblower)의 마음에 지금이 바로, 그가 잘못 생각했다고 여겨지는 일을 집어치울 수 있는 마지막 찬스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마리아는 그의 아내가 될 여자가 아니었으며, 심지어 그 자신조차 이러한 결혼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합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에 그가 조금만 지각이 있다면 지금 이 마지막 순간에라도 예식을 중단하고, 그가 마음이 바뀌었음을 선언하고, 주례사제와 마리아를 뒤로하고 교회를 박차고 나옴으로써, 자유의 몸이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나의 아내로 맞아 보호하며". 그는 여전히, 마치 자동 인형처럼, 주례사제의 말을 따라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하얀 면사포 안에 감추어진 마리아가 서 있었다. 그녀가 비록 잘못 그의 곁에 서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행복에 젖어 있었고, 그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차마 그녀에게 잔인한 한마디를 결코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내 아내로 맞아들여," 흔블로우어는 계속해 나갔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한 말이 마지막이었고, 그것으로서 법적인 결혼서약이 마무리지어졌다.
그는 혼인서약을 했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일주일전에 그가 저질렀던 일을 생각하면서 거는 약간의 위안을 얻으려했다. 그때 마리아가 그의 가슴에 파묻혀 울면서 사랑을 고백했고, 그는 마음이 약해져서 그녀에게 웃음을 띄웠다 - 너무 약했던 걸까? 너무 정직했던 걸까? 차마 배반을 생각하면서 그녀를 이용할 수는 없었기에, 그가 마리아의 말을 들어주었던 그때부터, 그녀의 키스를 그가 받아드렸을 바로 그 순간부터, 지금의 이 모든 결과가, 신부의 웨딩드레스가, 성 토마스 성당에서의 이 예식이, 그리고 달갑지 않은 기분과 애매한 미래 등이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G. S. : Forester. Hornblower and the Hotspur. Boston : Little Brown and Co., 1962, p. 3-4.]
때로 NT들은 다른 사람들의 정서적 반응에 대하여 혼란스러워 한다. 그들은 대체로 복잡한 인간관계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하다. 때로 사람들은 말하길 NT들과 함께 있으면 마치 그들 자신들의 존재가 무시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이러한 느낌에 대하여 사람들은 때로 NT들에게 적대감을 가지며 직접적으로 NT의 성격에 대한 공격을 하기도 한다. NT들은 사람들의 이러한 공격에 대해 반격을 가하기 보다, 심한 충격을 받기 일쑤다. 그러나 만약 NT들이 마음만 먹으면 상대방을 쥐어흔들어 놓을 만큼 냉소에 찬 반격을 가할 수도 있다.
NT들의 정신은 인간을 흙으로 빚은 그리스 신화가 전하는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발견되어진다. 생명이 없는 그 자신의 조각에 실망한 프로메테우스는 미네바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녀는 그를 하늘로 데려갔고, 프로메테우스는 그곳에서 태양의 바퀴에서 불을 훔쳐온다. 훔쳐온 불을 그가 만든 사람의 가슴에 댐으로써 그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준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그의 도벽에 대한 대가를 "쇠사슬에 묶여 못에 박혀 하늘아래" 버려지는 벌로써 지불한다.(Grant, P. 200.) 독수리가 날아가 그의 간을 하루동안 쪼아먹는 일을 해를 거듭하여 끊임없이 반복하였다.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에는 끝이 없었다.
손발이 묶여서 절벽에 못 박힌 채 추위와 바람과 서리를 맞으면서 그의 간은 다시 자랐고, 독수리는 그간을 다시 쪼아먹었다. 프로메테우스는 하늘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을 무지로부터 구출하였다. 그는 인간 발전의 철칙을 선도하였으며 인간을 위해 과학과 테크날리지 (Technology)를 선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