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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이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던 사상가이다. 그의 저서는 대부분 정조 사후 18년 동안의 유배 기간에 이루어졌다. 때문에 정치가로서의 그의 면모는 단지 정조의 왕권 강화를 위한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저술 활동이 이뤄졌던 유배 기간의 생애는 비교적 집중적으로 연구되었고, 그의 관직 생활은 대체로 정조의 치세에 묻혀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정약용이 유배를 가기 전의 생애를 2권의 책으로 정리한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정약용의 새로운 면모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정치인으로서의 정약용은 정조를 제외하면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당시 권력의 소수파였던 남인으로서, 정조의 총애가 없었다면 정치인으로서의 탁월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약용은 스스로 한때 천주교에 빠졌음을 고백하고, 이후 그것이 단순한 학문적 관심이었다고 밝힘으로써 다시 벼슬에 나아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과 친척들은 모두 ‘신유사옥’으로 인해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처형을 당했지만, 그는 끝내 살아남아 18년 동안의 유배 기간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정치인으로서는 불행일 수 있겠으나, 정약용은 18년 동안의 기나긴 유배 기간에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여 후세에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로서의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정약용이 철저한 천주교도였다는 것을 전제로, 그의 젊은 시절의 활동과 당대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다양한 기록들을 토대로 정약용을 둘러싼 인물들과의 관계를 면밀히 서술하고, 특히 정조와의 특별한 인연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정약용의 생애에서 ‘세 차례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천주교와 정조, 그리고 강진과의 만남’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정조와 강진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지만, 천주교와의 만남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정조와 천주교에 대해서 저자는 ‘40세 이전, 다산에게서 이 둘을 빼고 나면 다산은 없다’고까지 단언할 정도이다. 그리고 이미 1편에서 정약용인 초기 천주교 10인의 신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단하고 있다.
다양한 방증 기록을 통해서 논하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나로서는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여전히 조심스럽다고 생각된다. 특히 2편에서의 1790년대의 급박한 정국 상황을 돌아보면, 정약용은 그를 주시하던 비판 세력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절 정조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천주교도들을 체포하고, 또 정조 사후 ‘신유사옥’ 때는 천주교도들을 밀고하면서 그들의 체포방법까지 자세히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유배 기간 중 그의 활동은 천주교와는 거리가 있는 학문 활동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너무도 단호하게 정약용이 천주교도였다는 저자의 주장이 타당한 면모가 발견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진지하게 따져야 할 문제일 것이다. 다만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당시 정적을 많이 만들었고, 때로는 오해가 쌓여 가까운 사람들과도 멀어지기도 했던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던 정조의 죽음 이후, 그의 삶은 고난으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이 그를 학문 활동에 매진하게 만들었던 요인이 되었고, 그가 저술한 업적들은 그를 대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 정약용보다 사상가이자 저술가로서의 정약용을 있게 한 유배 생활이, 당사자는 고난이라 여기겠지만 후세로서는 더욱 소중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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