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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활동했던 인물들 가운데 정도전과 더불어 가장 개혁적인 정치가로 평가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조광조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왕조시대에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주장하다가, 결국 최고 권력자인 왕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나 끝내 처형되었다는 사실이라고 하겠다. 조선 건국에 막대한 공이 있던 조광조는 왕이 되기 전의 태종과 권력 다툼의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고, 조광조는 연산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중종반정’으로 등장한 중종에 의해 강력한 개혁을 밀어붙이다가 권력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유배형에 처해진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끝내 사약을 받고 죽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연산군 대로부터 시작된 4차례의 '사화(史禍)'는 대체로 조선 건국에 공이 있던 훈구파와 신흥 세력인 사림파 사이의 당대 권력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러 차례의 사화를 통해 신흥 세력이었던 사림파들은 그 때마다 주요 인물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를 가게 되지만, 성리학적 원칙에 입각한 강력한 주장을 통해서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권력의 중추를 사림파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세월이 흐르면서 훈구파들은 그 세력이 점차 약회되고, 서서히 저물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사림파들에 의해 정국이 장악되면서, 사림파 내부의 동서분당으로 인해 이른바 ‘붕당정치’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조광조가 연루된 '기묘사화'는 외형적으로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라는 모양을 띠고 있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중종을 위시한 왕권과 조광조로 대표하던 신권이 맞선 가운데 왕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연산군을 축출하고 신하들에 의해 추대된 중종은 처음에는 '반정'에 주도적이었던 공신들의 세력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성리학적 원칙으로 무장한 조광조의 등장은 중종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중종이 반정공신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즈음, 조광조는 지속적인 개혁을 주장하면서 중종을 압박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원칙을 중시하던 조광조의 방식은 타협의 여지없이, 왕권을 압박하는 것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움직임에 위기를 느낀 중종이 심정과 남곤 등 훈구파들을 움직여 일으킨 것이 바로 '기묘사화'이고, 이를 바탕으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이 대가 숙청되는 상황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후 중종은 서서히 사림파들을 다시 등용하기 시작했지만, 죽을 때까지 조광조의 복권은 허락하지 않는다. 조광조에 대한 복권은 사후 90여 년이 지난 선조 대에 이르러서야 이뤄졌다. 당대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인해 마침내 공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에 배향이 되고, 이후 사림들의 정신적 존숭의 대상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히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조광조의 등장과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제시되고, 조광조 사후 복권이 논의되면서 사림파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 서술되고 있다. 모든 개혁에는 기득권을 쥐고 있는 보수파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는 우리 현대사를 통해서도 흔히 목격되는 풍경이기도 하다. 정도전과 더불어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갔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평가가 내려져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명은 강력한 개혁으로 인해 절대 권력자인 왕권의 위협으로까지 작용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개혁의 움직임이 강할수록 그 반동의 힘도 크다는 것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이해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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