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鼈) 한 마리가 생(生)을 마감했습니다. 천호대교 남단 한강물에서 4~5m 떨어진 기슭에 기어나오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주위에는 잡다한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일곱시 전에 강변역 아파트에서 올림픽대교 밑으로 내려옵니다. 한강가를 걸으며 잠실철교 위로 올라서 철교의 보행로를 따라서 남단으로 건너갑니다. 5월이 다가오는 봄이라지만 온 몸에 부딪치는 아침의 강바람은 썰렁합니다. 옷깃을 여미며 자맥질을 하고 있는 물오리들의 사뿐한 광경을 보노라면 잔잔한 삶의 희열감이 오늘 따라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수시로 덜커덩 털거렁하며 휙휙 스치는 전철의 굉음소리가 고막을 흔들어 놓습니다. 보행로에는 아침 운동을 하느라 양팔을 힘차게 흔들며 걷는 사람들로 바쁩니다. 자전거도로에는 헬멧을 쓴 자전거 마니아들도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씽씽 바람을 일으키며 페달을 밟고 있습니다. 황사마스크를 쓰고 선글라스에 장갑도 끼고 헐덕이며 뛰는 조깅객들도 제법 보입니다. 뛰지말고 걸으면 좋으련만 심장에 과부하(過負荷)가 걱정되는 노객(老客)들도 허우적 거리고 있습니다. 130cm 정도 되는 작은 키의 소년의 한손을 꼭 붙들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할아버지를 오늘도 만납니다. 끌려가듯이 종종걸음의 아이는 까만 선그라스를 쓰고 차양모를 푹 눌러 썼습니다. 자세히 얼굴을 바라보면 전형적인 다운증후군(Down Syndrome)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손주의 병이 조금이라도 좋아졌으면 하는 바램으로 매일 운동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할아버지로서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으려는지 짐작키도 어렵습니다. 성내천에서 한강본류와 합류하는 잠실철교 밑에는 어른 팔뚝보다도 굵은 잉어떼가 한가로이 유영(遊泳)을 즐기고 있습니다. 가끔 물 위로 튀여오르는 녀석도 있으나 1m도 못 오르곤 첨버덩 물로 떨어지고 맙니다. 다이빙 실력은 이 노객이나 그놈이나 거기서 거기로 형편이 없습니다. 최근에는 물가를 따라서 나무를 심느라고 일꾼들이 기중기 작업 차량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습니다. 공원 잔디 위에는 샛노란 민들레꽃들이 산책을 하고 있는 시민들의 마음을 환하게 반기고 있습니다. 훌쩍 올라온 꽃대에는 하얀 깃털로 감싸인 왕사탕만한 크기의 홀씨주머니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습니다. 종족의 보존을 위하여 민들레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씨앗을 바람에 맡겨야만 하는 민들레의 슬픈 현실을 보여주는 것도 같습니다. 천호대교 광진교 밑을 통과하고 한강 수상경찰대가 있는 곳에 도착합니다. 운동시설이 되어있는 곳에서 철봉 평행봉 몸통 일으키기 뒤틀기 등으로 몸을 닥달하곤 천호구사거리 약국으로 향하곤 합니다. 대략 두시간 정도 걸리는 8.5km 거리이며 375kcal의 열량을 소모하곤 합니다. 오늘도 아침 같은 시각에 똑 같은 코스를 걸으며 약국으로 출근하던 중입니다. 삼일 전 토요일 아침에는 없었던 중절모 정도 크기의 자라의 사체(死體)입니다. 뭍으로 힘겹게 애처러이 기어오려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마치 살아서 산란(産卵)이라도 하려고 마지막 안간힘을 다 하려는 찰나인지도 모릅니다. 크기는 20㎝ 정도이며 무게는 대충 400g은 될법한 녀석입니다. 지금 상태로 보면 4~5년 정도 나이가 아닐까를 짐작해 봅니다. 거의 물 속에서 물고기등을 잡아먹고 사는 육식 동물입니다. 5~7월에 산란키 위하여 잠시 뭍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산란기도 아니고 아늑한 모래더미도 없는 껄끄러운 물 밖으로 어찌하여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짝 잃은 외기러기처럼 첫 사랑을 찾으며 헤매이다가 지쳐서 숨을 거두었는지 인간으로서는 짐작키도 어렵습니다. 큰놈은 무게가 2kg정도이며 크기는 30㎝ 정도까지 자라며 등에는 17㎝의 말랑한 갑으로 싸여 있습니다. 수명은 30~50년이라고 하지만 더 오래 살기도 한다는 자라(鼈)과에 속하는 파충류입니다. 거북이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파충류입니다. 몇백년 천년을 산다는 거북(龜)은 봉황(鳳凰)과 용(龍)과 함께 인간들에게는 전설과 같은 신령스러운 존재입니다. 여름이면 자라는 토종닭과 함께 한약재를 넣고 끓이는 용봉탕이라는 보양식으로도 애용되기도 합니다. 영양면을 떠나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보신(補身)을 위하여는 사악할 정도로 야만인이 됩니다. 특히나 남성들은 정력(精力)에 좋다는 말만으로도 사족을 못 쓰는 동물 같은 미개인(未開人)이 됩니다. 한강물가에서 홀로 죽어 있는 자그마한 자라를 바라보면서 삶의 끝인 죽음을 떠올리게합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저기 저 물가에 영원히 잠들어 있는 파충류에게도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걷고 뛰고 매달리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건강식에 혈안이 되는 인간들입니다. 기껏 고작해야 일백년이거늘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하루 하루를 아귀다툼으로 살고 있는 우리네 인간들입니다. 만물은 언제나 생(生)의 종착지의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유한한 미물(微物)입니다. 파충류(爬蟲類) 한마리의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가족도 동료도 자신을 부화(孵化)시켜 태여나게 해준 어미도 그 놈의 곁에는 없습니다. 죽음의 원인도 이유도 시간도 장소도 관심도 전혀 무의미할 뿐입니다. 슬픔커녕 누구에게도 눈길 한번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끔 비둘기 몇마리가 그저 그렇게 바라보다가 훌쩍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제 곧 산화(酸化) 풍화작용(風化作用)으로 온 몸은 썩어버리고 구더기의 보금자리로 영양보양식이 될 형편입니다. 그리고는 바람에 날려버리고 한강물에 휩쓸리면서 그것이 끝이며 전부입니다. 노객의 마음 한켠으로는 나무 그늘 아래 매장이라도 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나에겐 흙을 파낼 수 있는 연장이 수중에 없다는 핑게 아닌 핑게를 위안으로 삼습니다. 인간의 죽음과 비교한다는 자체가 말도 안되고 가당치도 않은 발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인간들은 슬픔과 애통함에 젖고 화장(火葬)을 하거나 봉분(封墳)에 안장하거나 저 세상에서나마 영생(永生)하기를 기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生)과 사(死) 이 세상에 태여나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파충류도 인간들에게도 삶의 끝은 언제나 같으며 자연섭리의 일부라는 변함이 없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