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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1920년대의 의열항쟁과 무장독립전쟁
1. 의열단 활동
가. 의열 항쟁의 방법
소수 인원으로 식민통치기관 파괴 및 일본고관・친일 부호 처단을 시도하고 의열 활동을 통해 동포들의 애국심을 고취(鼓吹)하여 민중폭동을 촉발하고자 했다. 파괴대상으로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의 중요기관을 선정하고 암살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수뇌 ・타이완총독 ・매국노 ・친일파거두 ・적탐(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을 지적하였다.
나. 의열단 활동
⑴ 결성
1919년 11월 9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서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이 중심이 되었다. 고문으로는 김대지(金大池) ・황상규(黃尙圭)가 맡았고, 단원으로는 김원봉(金元鳳) ・윤세주(尹世胄) ・이성우(李成宇) ・곽경(郭敬) ・강세우(姜世宇) ・이종암(李鐘岩)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김상윤(金相潤) ・신철휴(申喆休) ・배동선(裵東宣) ・서상락(徐相洛) ・권준(權俊)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⑵ 행동강령 : ‘공약 10조’
공약 10조는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⑶ 조선혁명선언
의열단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신채호(申采浩)는 1923년 1월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에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문화주의(文化主義) ・외교론(外交論) ・준비론(準備論)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노선을 제시하였다. 신채호는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民衆革命)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내걸었던 것이다.
⑷ 초기 의거활동
① 1920년 3월 곽재기 밀양・ 1920년 5월 이성우 진영폭탄반입사건 만주로부터 폭탄을 반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재판으로 8년형을 선고받음
② 1920년 9월 박재혁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3명이 즉사하여 투옥 후 단식 투쟁을 벌이다 사망
③ 1920년 12월 최수봉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밀양경찰서에 이종암, 김상윤이 제공한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되고 현장에서 검거되었음.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음.
④ 1921년 9월 김익상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
전기수리공으로 잠입하여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여 인명 살상은 못 하였으나 건물 일부가 파괴되었다. 이후 용산-평양-신의주를 거쳐 북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함.
⑤ 1922년 3월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 상하이 황포탄 의거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田中)를 저격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여 이종암은 초기 도주에 성공하고 오성륜은 일본 경찰에 검거 투옥하였으나 탈옥하였다. 김익상은 역시 일본 경찰에 검거 투옥 후 사형선고 후 20년형으로 감형되고 투옥되었다가 출옥후 일본 경찰에 끌려가 암살당함.
⑥ 1923년 1월 김성옥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삼판통 ・효제동 의거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거를 실행하였으나 폭탄의 불발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 다만, 이후 남산 인근인 삼판통(현 후암동)과 금호동에서 여러 차례 총격전을 벌인 후 일본 경찰을 사살하고 마지막 남은 총탄을 쏘아 자결하였음.
⑦ 제2차 암살파괴계획
⑧ 1924년 1월 김지섭 도쿄[東京] 니주바시[二重橋]폭탄투척 사건
일본 천왕이 사는 궁성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큰 성과는 없었음.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 병사.
⑨ 1926년 12월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직원과 경찰 등 다수를 사살하고 자결.
대구부호암살계획,・북경밀정암살사건, 이종암사건 등 다수의 의거.
⑸ 급진좌파 변신
의열단은 창단한 얼마 뒤에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상하이(上海)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김창숙(金昌淑) ・신채호 등이 실질상의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의열단은 사회주의 이론을 1926년부터 점차 수용했고 이는 1928년 10월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가 발표한 ‘창단 9주년기념 성명’에서 잘 나타난다.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순수한 민족주의 노선에서 계급적 입장까지도 고려한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1929년 12월 베이징(北京)에서는 ML파와 합동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는데,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급진좌파로 변신해갔다.
2. 무장독립전쟁
가.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1920.6.7)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와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야스카지로 소좌가 이끈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투격대대를 쳐부수고 전과(일본 157명의 전사자와 300명의 부상자, 아군 장교 1명, 병종 3명 및 소수의 부상)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 김시진・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투격대대 |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 ||
최진동(崔振東, 일명 明錄)의 국무도독부(軍武都督府) | ||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 혼춘현지부(琿春縣支部) 사령관 한경세(韓景世) | |
왕청현지부(汪淸縣支部) 사령관 /참모장으로 박승길(朴昇吉) |
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안개전투, 1920. 10.21~23)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이 일본군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으로 유인하여 대파한 전투.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서일(徐一) 총재 김좌진(金佐鎭) 독립군사령관 鐵驥 이범석(李範奭) 교관(서로군정서) | 일본군 제13,14사단과 혼합부대 20만 |
김시진・홍범도(洪範圖)의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
북로군정서
1911년 중광단(重光團) : 만주에서 서일(徐一) 등 대종교 신도들에 의해 조직
1919년 4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 중광단(重光團)과 유교(儒敎)신도들인 공교회(孔敎會)와 합작(合作)
1919년 8월(음력 7월)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 :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산하에 독립군 무장단체로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 조직
1919년 8월 김좌진 군정회 책임 : 김좌진 등이 대한정의단의 군정회를 맡게 되고, 모집한 장정들의 군사훈련과 독립군편성의 과제를 수행
공교회 계통의 민족주의자들 반발 탈퇴 :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가 신민회 계통의 무관들과 합작으로 공화주의단체로 되자 복군주의자들인 공교회 지도자들은 반발하여 이규(李珪), 김성극(金星極), 강수희(姜受禧) 등이 이탈,
김성극등은 복군파의 독립군단체로 대한광복단을 새로 조직,
이규, 강수희 등의 대한정의군정사를 새로 조직.
그 결과 대한정의단과 그 산하단체인 대한군정회는 대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신민회 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 합작한 순연한 공화주의 독립단체가 된 것이었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 北路軍政署)로의 명칭 변경 : 임시정부(臨時政府)는 1919년 12월에 국무원(國務院) 제205호로서, 명칭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에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변경할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이를 승낙. 북간도(北間島)의 대한군정서에 대해서는 이에 대비하여 ‘대한군정서’라는 공식 명칭보다는 ‘北路軍政署’라는 별명이 더 널리 애용되고 더 유명
서일(徐一) 총재
현천묵(玄天黙) 부총재
김좌진 사령부사령관(신민회계통)
다. 간도참변(間島慘變, 庚申慘變, 1920.10.9~11.5)과 대한독립군단
간도 참변(間島慘變) 또는 경신 참변(庚申慘變)은 1920년 만주에서 활동하던 청산리에서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에게 패한 일본제국군이 간도 일대에서 조선인을 학살, 겁탈, 살해한 사건이다. 조선인 1만여 명을 학살하였고, 민가 2500여 채와 학교 30여 채가 불태워졌다.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 까지 27일 동안에만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한국인이 3,469명으로 집계되었다,
독립군부대들은 재정비목적에서 밀산부로 이동했다. 밀산부에서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었다.
대한독립군단
1. 북로군정서(서일, 김좌진)
2. 대한독립단(이청천)
3. 대한독립군(홍범도)
4. 간도국민회(구초선)
5. 대한신민회(김성배)
6. 의금부(이범윤)
7. 광복단(이범윤)
8. 혈성단(김국초)
9. 도독부(최명록)
10. 야단(野團) 김소래
11.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이규
12. 군비단 김홍일
총재 서일(徐一) 부총재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총사령관 김규식 참모총장 이장녕 여단장 이청천(지청천)
병력은 약 3500명
라.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흑하사변(黑河事變), 1921.6.27)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대한독립군단이 Vladimir Lenin의 적군(赤軍)의 공격으로 독립군이 피해를 입은 사건으로 청산리노령 자유시 사건. 1920년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로 대패한 일본군이 만주의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시작하자 독립군은 전략상 부득이 노령(露領)으로 이동하여 이동 중 밀산(密山)에서 국경지대에 모인 독립군부대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총재 서일(徐一), 부총재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병력은 약 3500명)이 탄생하여 독립군의 중진들이 총망라되어 행동통일을 결의하였다. 1921년 2월 대한독립군단은 동부시베리아 스보보드니 흑해 연안의 알렉셰프스크(자유시)일대에 주둔, 치타에 있는 레닌정권의 완충정부와 공동작전 및 상호협조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소련의 원조를 받아 장비를 보강하여 본부를 이르쿠츠크로 이동・주둔하고 지청천(池靑天)을 교장으로 하는 고려군관학교(高麗軍官學校)를 개설하여 사관을 양성하기도 하였으나 일본과 소련은 베이징(北京)에서 캄차카반도연안의 어업문제에 관한 회의를 열어 어업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때 일본측은 소련 영토내의 한인혁명단체 육성에 위협을 느껴 이의 취소를 요구했다. 혁명 이후 국력이 쇠약해진 소련은 독립군의 무장취소를 약속하고 1921년 6월 22일 무조건 무장해제의 통지를 내렸으며 이에 완강히 반대하는 독립군을 이중으로 포위하고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이 날 참변으로 전사한 독립군의 수는 자료마다 다른데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7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 3부의 형성
자유시 참변이후 독립군의 재정비가 이루어 졌는데 민정조직과 존정조직을 갖춘 첨의부, 정으 신민부가 성립했다.
남만주 | 참의부(參議府) | 1923년 8월 집안현(集安縣)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鴨綠江) 연안. 만주의 지안(輯安)・푸쑹(撫松)・안투(安圖)・퉁화(通化)・류화(柳化)・창바이(長白) 지역을 관할로 하여 새로운 군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육군주만참의부(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 |
정의부(正義府) | 1924년 11월 지린(吉林)에서 개최된 양기탁(梁起鐸)・지청천(池靑天)・오동진(吳東振) 등 혁명거두회의에서 길림민회・서로군정서・의성단・독립군단 등 12개 독립군단체를 통합한 것으로, 주로 통의부(統義府)를 토대로 조직된 것으로 길림성(吉林省)과 봉천성(奉天省) 중심 | |
북만주 | 신민부(新民府) | 1925년 3월 10일 자유시사변(1921년)이후 러시아로부터 돌아온 독립군을 중심으로 닝안(寧安, 영안)에서 김좌진(金佐鎭) 계열의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 등이 주축이 되어 여러 독립군 통합 |
바. 미쓰야 협정(三矢宮松) 협정(1925.6.11)
일본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을 보내어 1925년 6월 11일 봉천성(奉天省) 정부 경무처장 우진(于珍)을 매수하여 만주 군벌 동삼성순열사(東三省巡閱使) 장쭤린(張作林)과 사이에 독립군 탄압에 대한 한인(韓人) 취체(取締ㆍ단속)에 대한 쌍방협정이 맺어져 독립군 활동이 위축되었다.
사. 1928년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국민부와 혁신의회로의 개편
1925년 미쓰야 협정이후 1920년대 후반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는 통합은 전개한 결과 928년 혁신의회와 1929년 국민부로 재편되었다.
⑴ 국민부 : 북민청년총동맹, 남만청년총동맹, 재만농민동맹 등을 중심으로 한 전만족유일당조직촉성회와 정의부, 다물단, 북만조선인청년총동맹, 남만청년연맹 등이 참가하고 참의부와 신민부가 동의한 전민족유일당조직위원회가 성립하고 다시 중심세력인 정의부를 중심으로 참의부와 신민부의 일부세렧이 합하여 국민부 구성
→현일철 중심의 조선혁명당 총사령관 양서봉은 일민연합군과 교전→양서봉 전사후 고이허가 조선혁명군정부를 조직하고 한중항일동맹회결성하여 1936년까지 뢀동
⑵ 혁신의회 : 신민부의 군정파를 중심으로 성립→1930년 김좌진 중심 한족총연합→김좌진 암살후 홍진, 이청천중심의 한국독립당 조직
참의부 (1923.8) |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1928) | 조선혁명당 | |
국민부(1929) | |||
정의부(1924.11) | 조선혁명군 | ||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1928) | 한국독립당 | ||
신민부(1925.3) | 혁신의회(1928) | ||
한국독립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