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허물기 / 조병렬
죽로다연(竹爐茶煙),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도 아닌 주택가 뒷길에 있는 차 용품 전문점이다. 지난해 개업할 즈음에 들어가 본 이후, 가끔 들러 찻그릇을 둘러보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도 한다.
현실의 아픔과 지조의 선비정신을 ‘세한도’에 담았던 서성(書聖) 추사선생과 깊은 산 속에서 맑은 바람처럼 살았던 다성(茶聖) 초의선사의 만남. 두 사람은 대나무같이 굳센 절의의 삶으로도 부족하여, 그 대나무를 태우는 죽로의 끓는 물로 한 잔의 차를 마셨다는 사실을, 이 집 주인은 알고 있었으리라. 나는 여기서 차를 마시면서 두 성인과 더불어 잠시나마 다선삼매(茶禪三昧)에 심취하고 싶은 가당찮은 꿈을 더러 꾸어 보기도 한다.
내가 이 집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지나는 길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미적 감각의 아름다운 간판과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상호의 매력도 크지만, 도시 주택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대문과 담장을 허물고, 그곳에다 잘 가꾸어 놓은 아담한 정원이 마치 시골 전원주택 같은 분위기가 나기 때문이다.
정원에 있는 석류나무에는 한창 익어가는 열매가 푸른 잎들 속에서 수줍은 듯 불그스레한 얼굴빛을 띤 채 보일 듯 말 듯 탐스러운 자태를 드러내고, 그 곁에는 자홍색으로 온몸을 치장한 배롱나무가 양편에 세워진 야외 등과 조화를 이루어 한층 운치를 더하고 있다.
정원을 지나 출입문까지에는 두툼한 나무로 계단을 만들고, 그 양쪽 옆에는 균형과 조화를 이룬 여러 종류의 분재와 이름 모를 들꽃들이 방문객을 소박한 웃음으로 맞이한다. 건물 외벽을 검은 송판으로 마감한 1층 가게와는 달리, 흰색 벽돌로 꾸며진 2층의 처마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풍경소리가 ‘동다송(東茶頌)’을 읊고 있는 듯하다.
이 앞을 지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가 보고 싶은 집이다. 정원의 둘레에는 자연석을 배치하여 누구나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이 정원은 분명히 사유공간이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즐기고 사용할 수 있는 공유공간으로 변화되어 있다. 이렇게 담장을 허물 줄 아는, 열린 마음을 지닌 주인은 지나는 길손을 붙잡는 따뜻한 향기까지도 지니고 있어 언제나 색다른 차로써 방문객을 맞이한다.
나는 20여 년 전부터 이 집을 보아왔다. 학교에서 내려다보면 주변에서는 보기 드물게 예쁘고 고급스런 주택이었다. 그때에는 붉은 벽돌의 2층 양옥이었는데, 유달리 담장이 높고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으며, 사람들이 드나들거나 움직이는 광경을 별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겉보기에 싸늘함이 감도는 집으로 느껴졌다. 그런 집이 지난해 주인이 바뀌고, 대문과 담장이 헐리면서 정감 있는 집으로 변한 것이다.
어릴 적 고향 마을에는 담장이나 대문이 없는 집이 상당히 많았다. 담장이 있어도 집과 집 사이의 표시일 뿐, 불신과 단절의 경계는 아니었다. 개방적인 울타리일 따름이고, 높이도 어린아이의 키 높이 정도였다.
얕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시골 아낙네들의 정겨운 대화가 오가고, 죽 한 그릇, 떡 한 접시도 인심 좋게 넘나들었다. 어디 그뿐이랴, 이웃 처녀 총각이 몰래 훔쳐보며 설레는 마음으로 사랑을 싹 틔우고, 담장 구멍으로 연서를 주고받던 사랑의 가교였다. 그래서 그 담장은 있어도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열린 담장인 셈이었다.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마을의 소식은 담장을 타고 인터넷 공간에서 정보가 확산되듯 온 마을로 전해졌다. 마을은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였다.
요즘의 도시는 삭막하기 짝이 없다. 담장은 높고 흉측한 철조망이 집 전체를 휘감고 있으며, 온갖 최첨단 자물쇠로 문짝을 잠그고도 불안하여 호랑이만한 개를 몇 마리씩 키우는, 그런 집도 허다하다. 세상인심이 하도 사납다 보니, 자기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을 탓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으니, 그러한 담장 밖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그들로부터 괜히 불신당하는 것 같아 언짢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서로 믿지 못하고 경계하며 살아야만 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대구에서 몇 년 전부터 담장 허물기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인간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가치관과 사람에 대한 신뢰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서는 실천할 수 없는 고귀한 일이다. 이 사업이 모범이 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까운 곳에 있는 구청이나 방송국, 대학병원까지 시원스럽게 담장을 허물어 버렸다. 닫힌 공간을 열린 공간으로 바꾼 셈이다. 권위의식을 버리고 지역 주민과의 공동체 의식을 키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기분이 좋다. 괜스레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어지고, 나무 밑 벤치에 앉아 잠시라도 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서로 불신하며 마음의 문을 닫고서는 어떤 일도 제대로 풀릴 수 없다.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달려 있다. 마음을 닫는 것도 여는 것도 개인의 몫이다. 내 마음을 닫은 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열 수는 없는 법이다.
나의 마음은 얼마나 열려 있을까? 내 마음의 늪에는 원망과 미움을 얼마나 담고 있을까? 사랑의 손잡이로 마음을 연다면 미움과 원망도 이해와 관용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세월이 흐를수록 부끄러운 일들은 성벽처럼 쌓여만 가고, 감출 것만 많아지는 내 마음은 성문처럼 굳게 닫혀 있는 것은 아닐는지. 높은 담장과 철문으로 굳게 닫혔던 집이 담장을 허물고 ‘죽로다연’으로 변하듯이, 내 마음의 담장도 그렇게 허물어 버릴 수는 진정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