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 의사, 사회복지사 같은 오늘날의 전문가는 마치 사제나 변호사처럼 합법적으로 권력을 확보하여 자신들만이 필요를 만들고 제공하도록 법을 제정한다.” 한평생 인간 공동체의 자율성을 강조한 일리치 선생이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서 한 말이다. “전문가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 끼워 넣는 것을 우리가 결핍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그들이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막강한 힘을 휘두르지 못했을 것이다.” 예리하다!
전문가들은 ‘보통사람들’이 이렇게 통찰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민중이 깨닫는 순간, 그들이 누려온 권력의 기반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일리치 선생에 따르면 전문가들이 가진 권력이란 사회나 민중을 대상으로 ‘처방’을 내리는 특권이다. 그렇다. 교육자들은 아이들이나 학부모를 상대로 미래(노동시장)에 대처하려면 특정 지식과 기술(예, ‘4차 산업혁명’)이 필요하다고 처방하며, 의사들은 환자나 당국을 대상으로 특정 질병에 대처하려면 특정 약이 필요하다고 한다. 종교인, 법률가, 정치가도 마찬가지. 근대 자본주의 발달과 더불어 민초들이 수천년 이어온 전통적 지혜나 삶의 기술은 ‘촌스러운’ 것, 원시적인 것으로 믿도록 강요당했고, 대신 전문가들이 처방하고 조제한 가공의 필요를 마치 현대인의 세련된 필요인 것처럼, ‘있어 보이는 것’처럼 착각하게 됐다.
최근 삼성재벌의 노조 파괴 공작 문건에 이어 경영권력 승계 목적으로 그 계열사 바이오로직스에서 엄청난 분식회계가 이뤄졌음이 언론에 드러나자, 법률 전문가 ‘김앤장’은 물론 유수한 대학의 회계 전공 교수들이 “적법한 회계처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학자로서 또다시 서글픔과 자괴감을 느낀다.
‘또다시’라고 한 까닭은 이런 일이 거의 매일 반복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나 돼지, 닭·오리가 집단 발병을 하면 보건 전문가들의 처방으로 온갖 약을 뿌려대고 심지어 대량 학살도 감행한다. 2009년 쌍용자동차 대량 해고의 배경에는 ‘권위’ 있는 회계법인의 (짜맞춰진) 비용 절감 보고서가 있었고, 이명박 시절 4대강 ‘살리기’ 사업 강행의 이면에는 국내외에서 내로라하는 건설·토목 전문가들의 영혼 없는 과학이 있었다. 해마다 300명 이상이 과로사한 배경에는, 토·일요일은 1주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독창적’ 전문가 해석도 한 요인이었다. 게다가 많은 노동 전문가들이 각종 위원회나 컨설팅, 법정 등에서 인간적 소망을 억압하고 자본의 평화를 위해 애쓴다. 유치원부터 중·고교, 학원과 대학에 이르기까지 철학 없는 교육 전문가들도 ‘인적자원’의 상품화를 위해 분투한다. 시간과 돈, 삶을 희생시키면서 말이다.
그러나 ‘병원이 병을 낳는다’는 말처럼 전문가의 필요는 또 다른 전문가의 필요를 낳는다. 그 와중에 민중은 결핍감과 열등감에 휩싸이고 그 필요 충족 비용은 급증한다. 그렇게 무심코 따르다 보면 어느새 민중의 자율성은 해체되고 오로지 상품 세계에 갇힌 좀비가 된다. 우리는 전문가 상품의 감옥에 갇힌 ‘무고한’ 죄수들이다!
물론 권력 행사를 거부하는 겸손한 전문가도 있다. 남들이 힘들다며 가지 않으려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의사도 있고, 참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교수도 있다. 4대강사업이 사기라고 목청 높인 학자도 있고, 노동자의 고통을 공유하며 노동해방을 위해 싸우는 전문가도 있다. 많은 기업의 회계보고가 조작이라면서 양심 고발을 하는 회계사도 있으며, 민초들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대안 사회를 상상하는 전문가도 있다. ‘철학 있는’ 전문가들이다. 이들이 더 많아지고 민초들이 작은 촛불을 들고 연대할수록 우리 사회는 밝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의 비중은 매우 낮을 뿐 아니라, (돈과 권력에 사로잡힌) 막강한 중독 시스템을 지탱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는 ‘영혼 없는’ 전문가들이 이들을 언제 제거할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박노해 시인의 말처럼 우리 스스로가 우리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네, 내가 나 자신을 연구하지 않으면, 다른 자들이 나를 연구한다네, 시장의 전문가와 지식장사꾼들이, 나를 소비자로 시청자로 유권자로, 내 꿈과 심리까지 연구해 써 먹는다네….” 다가오는 선거날도, 모두 이 시를 곱씹고 나서 참여하시길!
홍준표는 미네르바의 부엉새를 너무 일찍 날리지 말라
김정은 핵 내려놓는 담대한 조치
돌아갈 다리 태우고 싱가포르로
핵 포기한 북한 지원할 나라 많아
홍 대표 상황 판단은 재래식 이해
한반도 평화배당금 외면하지 말고
당파적 정열 초월한 정치 지향하길
자존심 상해 반발한 북한, 판은 안 깰 것
북·미 정상회담이 취소되면 판문점 선언도 의미를 잃는다. 판문점과 싱가포르는 세트를 이루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회담은 판문점의 개념적 합의를 북·미 차원에서 크게 한 걸음 진전시키는 자리다.
북·미 정상회담이 무산되면 한반도 사태는 전쟁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작년보다 더 나쁜 상황으로 후퇴할 것이다. 그러나 조명균 통일부 장관의 말대로 판문점 정신과 북·미 대화 분위기에 본질적 변화는 없어 보인다. 한국은 한·미 연합훈련에 B-52를 전개하지 않겠다고 재빨리 북한에 통보했다. 김계관의 발언도 개인 성명의 형식이다. 판을 깨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남·북·미 정상들의 전화통화와 3각 특사 파견 등의 긴급 진화작전은 필요할 것이다. 특히 서훈-김영철, 서훈-폼페이오, 정의용-볼턴의 대면 또는 전화 조율이 중요하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2007년 3월 7일 조지 W 부시 정부의 이라크전쟁 수행방식을 비판하는 칼럼을 이렇게 끝맺었다. “오늘의 백악관이라면 테러와의 전쟁의 초기 단계를 훨씬 더 잘 다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영원한 비극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새는 어둠이 내려야 날개를 펴고 난다. 지혜는 고통을 겪고 실수를 하고 정열이 식고 관찰이 시작될 때 온다.”
브룩스는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부시 백악관의 분위기는 사명감과 맹목적 충성심과 애국심에 충만하여 객관적 정세의 정확한 판단 아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음을 이런 말로 비판했다. 관찰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는 말이다. “인간이 사태를 충분히 이해는 것은 항상 때가 너무 늦었을 때라는 사실은 비극이다.” 그는 2003년 당시 도널드 럼즈펠드가 아닌 로버트 게이츠가 국방장관이었다면 이라크 전쟁을 제대로 치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군축담당 국무차관으로 리비아 핵 폐기를 주도하고 정부 밖에서는 대북 선제공격을 주장한 볼턴이 트럼프 정부의 안보정책을 지휘하는 자리에 있는 것은 이라크 전쟁 때 럼즈펠드가국방장관이었던 것만큼 불행하다. 볼턴이 바뀌든지 트럼프가 볼턴을 바꾸든지 해야 한다.
브룩스의 칼럼은 게오르크 헤겔(1770-1831) 역사철학의 패러디다. 헤겔은 1820년 『법철학 요강』이라는 저서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새는 어둠이 내려야 비로소 날개를 펴고 난다”고 썼다.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의 지혜의 여신이다. 헤겔이 말하고자 한 것은 사건이 종결되기 전에는 사건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작은 끝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말과 통한다.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알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땅거미가 내릴 때를 기다려야 한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터닝 포인트로 한반도 전쟁위기가 화평 무드로 선회하는 데 대한 홍준표 자유한국당대표의 잇단 비판적 발언은 성급하다. 홍 대표의 부엉새는 황혼이 오기도 전에 날개를 펴고 있다.
북·미 회담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평창에서 판문점과 평양을 거쳐 싱가포르로 이어지는 사태의 전개, 변화의 속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어떤 기준을 들이대도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분명하다. 남한과는 비핵화를 이야기조차 하지 않겠다던 그가 4·27 판문점 선언에서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데 합의했다. 내주에는 한국을 포함한 외국 기자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풍계리 핵 실험장을 폭파·폐기한다.
홍준표 대표의 문제는 김정은의 이니셔티브를 재래식 이해(conventional understanding)의 틀로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는 데 있다. 홍 대표는 성공적인 판문점 회담과 싱가포르 회담의 결과로 한국인들이 누릴 평화의 배당금을 외면한다. 인프라를 포함한 대북 투자, 국방예산 절감, 젊은이들의 군복무기간 단축, 한반도의 안정으로 격상될 코리아 프리미엄은 제1야당의 대표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어야 할 평화 배당금이다.
판문점 선언은 사실상의 남북 간의 종전선언을 담고 있다. 김정은은 2015년 30분 앞당겨 놓은 북한 표준시간을 되돌려 서울 시간에 맞췄다. 상징적인 의미가 큰 조치다. 40여일의 간격을 두고 두 번에 걸친 폼페이오 장관과의 회담을 통해서 김정은은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을 뿐 아니라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대화 상대라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폼페이오 방북 이후 김정은에 대한 트럼프의 말투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었다.
폼페이오 장관은 13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전향적인 말을 했다. “만약 북한이 조기 비핵화를 위한 담대한 조치를 취하면 미국은 북한이 한국 수준의 번영을 누리도록 노력할 용의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담대한 조치를 취하는 문제를 오늘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논의했다.” 김정은은 이미 많은 담대한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미국이 북한의 경제적 번영을 지원할 조건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은 돌아갈 다리를 불태우고 트럼프를 만나러 간다. 김정은 체제를 지탱해 온 핵·경제 병진정책에서 핵을 내려놓았다. 4월 2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이 그것이다. 김정은으로서는 트럼프와의 회담의 실패를 용납할 여지(room)를 남기고 싶지 않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싱가포르에서 비핵화를 넘어 한국전쟁의 종전 선언, 북·미 수교, 평화협정 체결에 관한 개념적인 합의를 한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김정은에게 두 번째로 절실한 것은 국제사회의 대규모 경제지원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폭스 뉴스 발언은 비핵화에 대한 보상이 되는 경제지원의 선행 약속이다. 폼페이오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미국 정부는 기업들의 대북투자를 허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하면 일본, 싱가포르, 서유럽의 기업들의 대북 투자 러시가 예상된다. 마셜 플랜의 논의에 대해 한국이 부담을 다 진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유럽판 마셜 플랜 때는 미국 말고는 돈을 낼 나라가 없었다. 지금은 한반도 평화에 이해관계를 가진 부자 나라들이 많다.
보수 진영에서는 북한이 국가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김정은은 주체사상을 비켜 가는 전략으로 딜레마를 극복하는 실용주의 정책을 쓸 수 있다. 장마당의 확산, 낮은 수준의 시장경제 채택, 과감한 외국자본 도입을 기정사실로 쌓아 가랑비에 옷 젖는 방식으로 주체사상에 물타기 할 수 있다.
남·북 손잡으면 한반도 게임의 룰 주도
이 모두가 김정은과 트럼프 회담의 결과에 달렸다. 그 결과를 전망하는데 리버럴과 보수 진영의 견해가 갈릴 뿐이다. 판문점 선언은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평창에서 싱가포르 이후까지의 한반도 평화 만들기의 전체 흐름에 대한 여론의 낙관적인 기대도 높다. 홍준표 대표는 여론의 이런 추세를 외면하고 김정은의 변화 행보를 위장 평화공세로 몰고, 판문점 정상회담을 평화 쇼, 주사파 합의라고 폄하하고, 김정은이 한국의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4월 21~22일자 중앙SUNDAY에 대동강변의 트럼프 타워를 기대한다는 칼럼을 썼더니 보수우익에서는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발을 했다. 그러나 북·미 정상회담이 김정은과 트럼프가 희망하는 결과를 낳으면 대동강변의 트럼프 타워 정도가 아니라 평양 여명 거리에 맥도널드와 스타벅스가 들어선다고 한들 누가 놀라겠는가. 김정은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로 비핵화 수순을 밟고 있다.
헤겔과 브룩스로 돌아가 다시 말하자면 홍준표 대표는 미네르바의 부엉새를 황혼이 되기 전에는 날리지 말아야 한다. ‘모래시계 검사’의 화려한 스펙을 가진 제1야당의 지도자라면 당파적 정열을 초월한 맑은 예지로 역사의 진행을 관찰하는 큰 정치가를 지향할 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