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랑별학교에서는 성도의 공동생활을 읽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수 있음을, 우리 가정교회가 거룩하고 신실한 가정이 될수 있음을 이 책에서 발견합니다. 같이 읽어 봅시다. 이번에 복있는사람에서 잘 번역되어 나왔네요.
본회퍼의 (성도의 공동생활)중에서
하루 생활의 질서는 아침 기도에서 구하고 찾아지며, 일하는 동안 아침 기도의 소중함이 증명됩니다.
이른 아침 기도가 그날 하루를 결정합니다.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허비해 버린 시간, 우리가 걸려 넘어지는 유혹, 일하면서 용기를 잃고 무력해지는 것, 우리의 생각이 혼란스럽거나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올바르지 못한 것은, 대부분 아침 기도를 소홀히 하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 다. 기도로 움직여질 때, 우리는 시간을 질서 있게 나누어 유용하게 쓸 수 있습니다. 분주한 일상생활로 인해 생기는 유혹과 시험은 하나님을 향한 돌파를 통해 극복됩니다. 일할 때 요구되는 결단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대면하여 결정할 때 훨씬 간단하고 쉬워집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기계를 다루는 일마저도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명령에 기초해서 일할 때, 더욱 끈기 있게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일하는 데 필요한 힘을 하나님께 구하고 기도한다면, 일할 수 있는 강건함이 더욱더 풍성하게 주어질 것입니다.
점심시간은 그리스도인이 가정 공동체에서 보내는 하루의 시간 중에 짧은 휴식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반나절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공동체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저녁때까지 지켜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공동체는 일용할 양식을 받으며, 종교개혁자들의 찬송으로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먹을 양식을 주시고, 근심에 싸인 죄인들을 위로해 주소서”(요한 헤르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주장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가련한 죄인인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시는 식탁은 근심에 눌린 사람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이 그분의 자녀를 건사하고 인도하신다는 신실한 은혜의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성경에는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며, 양식을 받는 것을 분명하게 노동하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양식을 먹을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노동을 명하셨지만, 양식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노동이 양식을 마련해 준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은총의 질서입니다. 하루는 오직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의 중간에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함께 모이며, 하나님께서 초대하시는 식탁에 둘러앉습니다. 점심시간은 교회와 시편 기자들이 드리는 일곱 번의 기도 시간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해가 중천에 높이 솟아오를 때 교회는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찬양하고, 주님의 도우심과 신속한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릅니다. 정오 무렵, 예수 님의 십자가 위로 하늘이 빛을 잃고 캄캄해졌습니다. 그 시간에 속죄의 역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 공동체가 이 시간에 잠깐이라도 찬양과 기도로 함께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났습니다. 일이 너무 고되고 힘들었다면,
그리스도인은 파울 게르하르트(Paul Gerhardt)가 다음과 같이 노래한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머리와 손과 발아,
하루의 일이 끝났으니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하루의 일은 끝났다.
너 마음아, 즐거워하라.
너는 이 땅의 곤고함과 죄의 노동에서 풀려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