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과 만났다] 그래도 ‘인간성’…오징어 게임
박영숙 / 시인
[뉴욕 중앙일보] 발행 2021/10/08 미주판 12면 입력 2021/10/07 19:00
잠시동안 주인공의 서사를 보여준 후, 바로 이어지는 살인의 충격! 게임에서 지면 죽음에 던져지는 파괴적 설정에, 평소라면 한편도 다 보지 못할 Death Game 장르 드라마가 영화 ‘기생충’보다 더 큰 매력으로 다가왔으니, ‘오징어 게임’이다. 옴짝달싹 못하고 아홉편을 내리 보게 만드는 위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로 보이고, 한국 드라마의 이 엄청난 선전에 큰 박수를 보낸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시작으로, 달고나, 줄다리기, 구슬치기, 징검다리 건너기, 오징어 게임 등 한국에서 자랐다면 누구나 아는 게임에서, 이겨서 살기만 한다면, 유혹적인 상금 456억원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사람들의 것임을 제안하고, 이를 받아들인 그들이 게임을 치러내는 동안의 사투가 이 드라마의 플롯이다. 목숨이 걸린 살 떨리는 게임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생존 본능이 꿈틀대는 살벌한 전투가 이 드라마의 시작과 끝이다.
그러나, 동심의 향수 가득한 목소리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초등 교과서에서 봄 직한 ‘영희’같은 커다란 인형의 입에서 나오는 동안, 초록 츄리닝을 입은 무리가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단으로 달려가다 멈추고 갑자기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영화 보듯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온더록스 잔을 기울이며 보고 있는 남자가 있고, 그 사이로 달달하기 그지없는 노래 ‘Fly to the Moon’이 인형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말할 수 없는 비애와 서글픔이 인다.
그들은 왜, 저기서 위태롭게 뛰고 멈추고 있으며, 그 남자는 왜 편히 앉아 그 장면을 구경만 하는 것일까…드라마의 백미였던 이 장면 이외의 나머지 다섯 게임에서도, 상상을 압도하는 전혀 의외의 방법으로 인간본능과 불평등, 인간성만이 희망이라는 메시지가 어두운 밤하늘 별빛처럼 어깨 위로 툭툭 떨어진다.
홀로, 게임의 승자가 되어 456억을 거머쥐었으나, 죽어간 이들에 대한 통한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인공에게, 경악스러운 이 게임의 창설자인 노인 오일남이 던지는 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공통점이 무언지 아나? 재미가 없다는 거야. 아무리 재미난 일을 해도 영 재미가 없다는 거야.” 부가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더는 인생의 의미도 재미도 없어진 부자들이, 벼랑 끝에 서 있는 이들의 목숨 걸기를 게임으로 즐기는 극심한 비극을 보며, 우리가 각각의 자리에서 잘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이미 얼마쯤은 정해진 계급 안에서아등바등살아가고 있으며 일정의 돈이 없이 살아남기란 마치 목숨을 내놓은 사투인 양 지난하고도 고단하다는 사실을 슬프지만 아프게 인정하게 된다.
고민의 흔적이 역력한 세트의 일환으로, 네덜란드 판화가 에셔의 미로를 차용했다고 했지만, 극 속에서 동화책 ‘Dr. Seuss’ 속 건축물도, 영화 ‘인정 사정 볼 것 없다’의 빗속 결투 장면도, 미술가 쥬디시카고의 ‘디너 파티’의 삼각형 테이블도 떠올려졌다. 그러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틀 안에서 볼 때, 어디서 본 적 없는, 이토록 신선하게 주제를 향해 달려가는 드라마를 만든 감독의 내공이라니. 불평등한 세상이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정이, 사람 사이의 신뢰만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천금 같은 메시지가 소재 선택의 잔혹함을 넘어 고스란히 전달된다. 참으로 귀하고 귀한 결정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