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참 마속(泣斬요謖)
요즘 개나소나 써먹는 말 "읍참마속"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인터넷을 뒤적여
참뜻을 적어본다.
> 뜻 <
울면서 마속(馬謖)을 베다.
공정한 법 집행을 하거나,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223년,
촉주(蜀主) 유비는
221년부터 시작된 동오(東吳)와의 싸움인
이릉(夷陵) 전투에 출전하였다가 대패하고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면서 제갈량(諸葛亮)과 이엄(李嚴)에게
아들 유선(劉禪)을 부탁했다.
유선이 유비의 뒤를 이었고,
역사에서는 유선을 후주(後主)라고 부른다.
건흥 6년(228) 봄,
제갈량은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위나라를 공격했다.
출정에 앞서 그는
후주 유선에게 글을 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출사표(出師表)이다.
이 출사표는
제갈량의 우국충정이 넘치는 글로서,
이를 읽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읽고 울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라는 이밀(李密)의
진정표(陳情表),
읽고 울지 않으면
우애를 모르는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한유(韓愈)의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과 더불어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명문이다.
제갈량은
출사표를 올린 후에
위(魏)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한중(漢中)을 나와
장안을 향해 진군했다.
한중에서 기산(祁山)을 향해 우회하면서
천수(天水), 안정(安定), 남안(南安) 등 3개 군을 접수하고
기산에 이른 다음 장안으로 진군하는 전략이었다.
이때
위연은 자오곡(子午谷)을 질러
바로 장안으로 기습하자는 의견을 냈는데,
제갈량은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력을 다 기울인 이 전투에서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실패할 경우 국기(國基)가 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입기 때문이었다.
위나라는
하후무(夏侯楙)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대적했으나,
남안, 천수, 안정의 농서 지방 3군을 빼앗기고
강유가 촉한에 투항하자, 위 명제(明帝) 조예는
사마의(司馬懿)를 복직시키고 장합(張郃)을
가정(街亭)으로 향하게 하였다.
제갈량은
전력상의 요충지인 가정을 지킬 장수로 마속을 보내면서
가정의 길목을 지켜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마속은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적을 끌어들여 역습을 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산등성이에서 장합의 군대에게 포위당해
힘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참패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제갈량은
할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한중으로 퇴각해야만 했다.
마속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옥중에서 제갈량에게 속임종여량서(謖臨終與亮書)라는
글을 올렸다.
승상께서는 저를 자식처럼 대해 주셨고,
저는 승상을 아버지처럼 대하였습니다.
곤(鯀)을 죽이고
우(禹)를 흥하게 한 뜻을 깊이 생각하시어
평생의 사귐이 이 때문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시면
저는 비록 죽지만 황천에서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襄陽記曰, 謖臨終與亮書曰, 明公視謖猶子,
謖視明公猶父. 願深惟殛鯀興禹之義, 使平生之交不虧於此,
謖雖死無恨於黃壤也.)
제갈량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마속에게 참수형을 내렸다.
다시 구하기 어려운 장수이므로
살리자고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법을 엄정히 지켜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베었다.
이를 ‘읍참마속’이라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지 촉서(蜀書) 마량전(馬良傳)에 나오는데,
마속이 옥중에서 제갈량에게 올린 서신은
양양기(襄陽記)를 인용한 주(注)에 실려 있다.
곤은
요(堯)임금의 신하로 치수에 실패하여
사형을 당한 사람이고,
우는
곤의 아들로 치수에 성공한 사람이다.
요임금과 순(舜)임금 때
20년 동안이나 홍수가 지속되었다.
요임금은
곤을 시켜 홍수를 다스리게 했다.
곤은 9년 동안이나 열심히 일했지만
물길을 다스리는 데 실패했다.
요임금은
그 책임을 물어 곤을 처형했다.
요임금의 양위로 제위에 오른 순임금은
곤의 아들 우에게 치수를 맡겼다.
우는
아버지의 실패를 거울삼아,
물길을 막는 방법이 아닌 물길을 내서
물이 빠지게 하는 방법을 써서 작은 시내는
큰 강으로 흘러들게 하고, 강물은 바다로
빠지게 만들었다.
이렇게 13년의 노력 끝에
우는 마침내 홍수를 다스리게 되었고,
후에 순임금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오르고,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를 세웠다.
용례
사업하는 사람은
때로는 사업을 살리기 위해
‘읍참마속’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명예퇴직이
‘읍참마속’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읍참마속의 진실
제갈량(諸葛亮)의 제1차 북벌은
결과적으로는 인선(人選)의 실패로
어이없게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제갈량이
이런 인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었고,
마속(馬謖)의 목을 베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가정(街亭)은
최전방의 전선은 아니지만
보급로의 거점으로, 촉(蜀)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전략적 요충지이고,
위(魏)나라 입장에서는 반드시 빼앗아야 할 요지였다.
제갈량은
가정을 지킬 장수로
중신들이 추천하는 맹장들을 제쳐 놓고,
마속을 기용했다.
맹장들은
본대 전력의 핵심 요원으로 공격에 쓸 말이지
수비에 쓸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운(趙雲), 조자룡(趙子龍))은 기곡(箕谷)에서
이미 위군의 발을 묶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위연(魏延)은 위군 본대의 주력을 격파하는 선봉장으로서의
대임을 맡고 있었다.
하여 제갈량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본대에서 빠져도
크게 전력 부담이 없는 마속을 파견한 것이다.
물론
제갈량도 마속이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장으로 왕평을 붙여 주었다.
마속의 임무는
가정, 즉 후방의 보급 거점을 굳게 수비하는 것이었고,
만약 제갈량이 지시한 대로 길가에 목책을 세우고
길목을 틀어막고만 있었다면 충분히 가정을
지킬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인재 부족으로 허덕이던 촉나라에서
제갈량이 끔찍이도 아끼고, 모든 일을 함께 상의했던
자기 사람 마속을 눈물을 흘리면서 벨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군법을 엄정하게 시행한다는 명분뿐 아니라 그 이면에
더 중요한 정치적인 명분이 있었다.
당시 촉나라에는
세 개의 큰 파벌이 존재하면서
내부 모순이 심화되어 있었다.
현재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유비(劉備)가 거느리고 들어온 형주(荊州)파,
전임 태수 유장(劉璋)의 동주(東州)파, 그리고
익주에서 태어나 자란 본토의 사족(士族)인
익주(益州)파의 갈등이 그것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선주 유비가 죽고
아들 유선(劉禪)이 그 뒤를 이었지만
‘승상이 군권(君權)을 대신’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제갈량은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상앙(商鞅)이 했던 것처럼
강력한 ‘법치(法治)’를 펴 공평무사하고
엄정하게 법을 시행했다.
덕분에
삼국 중에서 촉나라가 가장 잘 다스려졌고
치안도 가장 좋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선택하여 파견한 마속이
국운에 영향을 미칠 만한 실책을 범했으니,
모든 파벌들이 제갈량의 행보를 주시할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마속의 목을 베지 않을 수 없었던 제갈량의 고충을
마속을 베면서 흘린 그의 뜨거운 눈물이 말해 주고 있다.
곡(哭)이
눈물을 흘리는 대신 소리 내어 우는 것이라면,
읍(泣)이란 소리 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을 말한다.
소리 내어 울든,
소리 없이 울든 간에
한 번이라도 울어 본 사람이라면
어떤 울음이 폐부에서 나오는 진짜
‘사나이 마음’인가를 알 것이다.
그래서
곡참마속(哭斬馬謖)이 아닌
읍참마속(泣斬馬謖)인 것이다.
이릉의 전투
형주(荊州), 호북(湖北)
강릉(江陵))에 주둔해 있던 관우(關羽)는
조조(曹操)의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번성(樊城) 탈취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동오(東吳)의
기습을 받아 싸움에 지고 자신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221년,
촉주(蜀主) 유비는 조운(趙雲) 등
명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이끌고
오(吳)나라 정벌에 나섰다.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를 되찾고,
관우의 복수를 위한 출병이었다.
오나라의 손권은
육손(陸遜)을 대도독에 임명하고 5만 군사로 대항했다.
유비가 거느린 촉군과
육손이 거느린 동오의 군대는
이릉(夷陵)과 효정(猇亭)에서 맞붙었다.
유비는
무협(巫峽)으로부터 이릉에 이르기까지
장강 남쪽의 600여 리 되는 산 위에
수십 개의 영채를 설치하였다.
육손은
장장 7, 8개월을 싸우지 않고 장기전으로 나갔다가
촉나라 군대가 지쳤을 때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유비의 군대를 대파했다.
유비는 싸움에 진 후
백제성(白帝城)으로 피신했다가 얼마 후에
성의 서쪽에 있는 영안궁(永安宮)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 전쟁을
‘이릉의 전투’라고 하는데,
‘관도(官渡)의 전투’, ‘적벽(赤壁)대전’과 더불어
삼국지의 삼대전역(三大戰役)으로 불린다.
이 전투를 계기로
제갈량이 촉나라의 실세로 부상하여
그의 시대가 열렸다.
마속
마속(馬謖), 190년 ~ 228년)은
중국 촉한의 장수로 자는 유상(幼常)이며
형주 양양군(襄陽郡) 의성현(宜城縣) 사람이다.
제갈량의 신임을 받았으나
가정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제1차 북벌을 말아먹은 책임을 져 죽었다.
여기서
원칙을 위하여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버린다는 뜻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이 유래하였다.
읍참 마속
제갈량은
가정 전투에서의 대패로 인해
한중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이막(李邈)이 마속의 구명을 청했음에도
하옥했다가 죽였다.
나이 39세였다.
마속은
아버지와 아들처럼 지내던 제갈량에게
자식을 부탁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제갈량은
우는 장병들 앞에서 같이 눈물을 흘리며
친히 제사 지내고 그 자식을 돌보아 주었다.
참수했다는 서술은 없지만
여기서 읍참마속이 유래했으며
제갈량휘루참마속(諸葛亮揮淚斬馬謖)
이라고도 한다.
제갈양의 신임
형주종사(―從事)로서
유비를 따라 익주로 들어가
면죽현령(緜竹―), 성도현령,
월수태수(越巂, 越嶲―)를 역임하였다.
지혜와 기량이 뛰어나서
군략을 잘 논하므로 제갈량이 매우 아꼈다.
유비는
유언을 남길 때 마속을 중용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제갈량은 개의치 않고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삼아
밤낮으로 전략을 상의하였다.
225년(건흥 3년)
제갈량이 남중을 정벌하려 하자 마속이 수십 리를 배웅하며
“그들은 멀고 험함을 의지하여 불복한 지 오래이니
일시적으로 무력으로 눌러봐야 다시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그 마음을 얻으십시오.”라고 조언하였다.
그 조언대로 맹획을 용서하니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남방이 편안했다.
가정전투
227년
제갈량이 제1차 북벌을 개시했다.
228년 제갈량은 조운과 등지가 위나라군 주력을
기곡(箕谷)으로 유인하는 동안 본대가 기산(祁山)
방면으로 나아가 옹주 서부를 접수하며 협격하려 하였다.
장수들은
노련한 위연이나 오의가 마땅히 선봉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제갈량은 마속으로 하여금 앞에서
대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마속은
가정(街亭), 지금의 간쑤성 친안 현)에서
제갈량의 지시와는 다르게 물을 유념하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 진을 쳤다.
기동조차 번거로웠기에
왕평이 거듭 말렸으나 무시했다.
이에 위나라 장수 장합이
물을 길어 나르는 길을 끊고 공격하니
마속이 크게 깨지고 달아났다.
오직 왕평만이 1,000명의 병력으로
북을 치며 대오를 유지하므로 장합이 매복을 염려하여
접근하지 않았다.
이 틈에
왕평이 여기저기 흩어진 군사를
조심스럽게 수합한 후 퇴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