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정변의 역사 2008.9.2.화
최규하와 강릉최씨
최규하(崔圭夏,1919~2006)의 본관은 강릉이며,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양오(崔養吾)와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에게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동몽선습, 효경 등을 시작으로 소학, 논어, 맹자, 대학, 중용, 통감 등을 읽었다.
1932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고, 4학년 때인 1935년 홍기(洪基)와 결혼했다. 1937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와 1941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 대동학원(大同學院)에 입학, 1943년 졸업했다.
1945년 8·15해방 후 서울사범대학에서 조교수로 교편을 잡았다가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무원의 길에 들어선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농림부 양정과장이 되었으며, 그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 아시아 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외국어 구사능력과 국제회의 대표로서의 활동력을 인정받아 당시 외무부장관 변영태에게 발탁되어 외무부 통상국장이 됨으로써 외교관으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1952년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7년 주일대표부 참사관, 1959년 주일공사 등으로 재임하면서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 제11·12·13차 총회와 제4차 한일회담에 한국대표로 참가하는 등 건국 초기 외교기반 구축에 노력했다.
1959년 외무부차관이 되었으나 4·19혁명 후인 1960년 5월 사임했다. 1962년 외무부장관 고문, 1963년 외무부 대사, 1964년 11월 주 말레이시아 특명전권대사 등을 지냈다.
1967~1971년 외무부장관으로 재임 시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면서 외무행정 조직의 강화를 꾀했고 통상외교를 강화했다. 1971~1975년 대통령외교담당특별보좌관을 지내며,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2차례 평양을 방문했다.
대통령특사로 7회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티오피아 등 24개국을 친선방문하기도 했다. 1975년부터 4년간 국무총리로 재임하면서 외교관 출신의 총리로서 안보와 경제에 중심을 둔 외교활동을 펼쳤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자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그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제10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신군부 세력이 이른바 12·12사태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1980년 5월 광주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으로서의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결국 같은 해 8월 16일에 사임함으로써 역대 최단기 대통령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가 이끈 정부는 '과도정부' 또는 '위기관리정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한국 헌정사상 정당에 관여하지 않은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인물이다.
2006년 10월 노환으로 별세했다. 1979년 10·26사태 이후부터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할 때까지의 역사적 격동기를 이끌었던 그는 당시의 진실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역사의 무대를 떠났다.
한편 강릉최씨(江陵崔氏)는 시조를 다르게 하는 세 계통의 최씨가 있다. 경주계의 시조 최필달(崔必達)은 고려 개국 때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으로 좌정승이 되고 경원(강릉) 부원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강릉으로 했다.
최치운(崔致雲)은 시조 최필달의 17세손으로 세종 때의 명신이다. 특히 형옥(刑獄)에 밝아 왕명을 받고 '무원록(無寃錄)'을 주석했다. 최수성(崔壽城)은 최치운의 증손으로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다. 시문, 서화, 음률, 수리(數理) 등 다방면에 뛰어난 당대의 기재절필(奇才絶筆)이었다.
강화계의 시조 최문한(崔文漢)은 고려 문과에 급제한 최전 의 후손이다. 고려 말 두문동 72현으로 유명한 최문한은 충숙왕의 부마(사위)로 이성계가 왕위를 빼앗고 조선을 개국하자 강릉 산 속에 은거했다. 후손들이 최문한이 은거한 강릉을 본관으로 했다.
전주계의 시조 최흔봉(崔欣奉))은 고려 태조의 부마이다. 그의 12세손 최입지가 고려 말에 문하평리 상호군을 지낸 후 강릉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강릉으로 했다.
최자점(自霑)은 조선 세조 때 이조참판, 최세건(世楗)은 성종 때 이조판서, 최응천(應天)은 인조 때 진주목사를 각각 지냈다. 전주계는 현재 삼척, 양양, 평창 등지에 수천 가구가 살고 있다.
강릉최씨의 과거 급제자는 최세절(崔世節) : 문과(文科) 연산군10년(1504)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최기백(1575 乙亥生) : 문과(文科) 인조13년(1635) 증광시 병과(丙科), 최황(1539 己亥生) : 문과(文科) 선조21년(1588) 식년시 병과(丙科), 최상은(崔相殷, 1644 甲申生) : 문과(文科) 숙종22년(1696) 식년시 병과(丙科), 최점(崔店, 1644 甲申生) : 문과(文科) 세종5년(1423)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최일성(崔一星, 1695 乙亥生) : 문과(文科) 영조5년(1729) 식년시 병과(丙科), 최환(1695 乙亥生) : 문과(文科) 연산군4년(1498) 식년시 병과(丙科), 최문활(崔文活, 1600 庚子生) : 문과(文科) 인조8년(1630) 식년시 병과(丙科), 최호인(崔浩人, 1788 戊申生) : 문과(文科) 순조11년(1811) 정시 병과(丙科), 최명손(崔命孫, 1788 戊申生) : 문과(文科) 세조8년(1462) 식년시 정과(丁科) 등 모두 190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31명, 무과 17명, 사마시 123명, 역과 4명, 의과 5명, 음양과 8명, 율과 1명, 주학 1명이다. 2000년에 총 44,704가구 140,854명이 있다.
( 정복규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