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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시와 사연들
강병철
북극곰 권태환은 스물여덟 국어교사였고 칠공주집 외아들이었다. 열한 살 때 실수로 주먹 한 방 날렸다가 쌀 스무 가마를 물어준 이후 모든 악다구리 해코지를 무방비로 받아주는 미륵 심장의 사내이다. 신군부 시국, 복학생 졸업반인 내가 그의 자취방 옆구리 걷어차며.
“타는 가슴이 있어.”
폭폭함을 토로할 때마다 넉넉하게 품어주던 스크린도 이제 알싸하다. 그는 다락에서 소주 대병을 꺼내 철철 넘치게 인정을 부은 다음 연탄불에서 건진 노가리를 뚝뚝 쪼개주었다. 곧바로 우리들 모두 졸업을 했고 초임 교사로 입(入)하면서 다사다난한 분필장이 사연으로 인생 제 2막을 올리는 줄만 알았다. 그랬다. 출근길 사고만 없었더라면 나는 그와 신산의 세월을 함께 했을 것이다.
부여군 합송, 푸른 솔 우거진 그의 본가에서 공주 시내까지 통학버스로 출퇴근했다. 어느 날 아침 그를 태운 버스가 모래 실은 덤프트럭과 정면충돌한 것이다. 거대한 쇳덩이 두 개가 심장을 드러내며 논두렁에 뒤집어졌고 사위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버스 앞자리에서 튕겨 나온 권태환 선생은 피투성이의 고교생 사내 둘을 응급차에 싣고 코스모스 대궁 흔들며 우는 소녀들을 부축하는 중이었다. 순간적으로 통증을 느끼며.
“가슴이 쑤신다.”
기우뚱 쓰러진 채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총각선생이던 그가 누님의 혼사를 계기로 ‘둥지 틀 수 있는 번호를 땄다’며 너털웃음을 짓던 기억도 아스라하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마지막 그를 떠나보냈던 백마강에 서성거렸다
가랑잎으로 남은 사내가 나루터 쪽으로 떠밀려가면서
이따금 물거품을 햇살 위로 올려 보내면
나머지 사람들은 초가을 빛으로 바랜 풀밭에 앉아
그 사내 이름을 불러대며 화투패를 돌렸다
(중략)
사람이 만났다가 떠나는 일이 이토록 순간인데
그는 끝까지 무엇을 아끼다가 흐르고
살아있는 우리들은 무엇이 아까워 놓지 않는 것일까
우리 시대의 함성 같은 시구 몇 마디가
엎질러진 소주잔으로 풀뿌리를 적셨다
어깨를 짚고 일어서는 강 건너 쥐똥나무 위로
노을로 펼쳐진 그니의 흰 이빨이
너는 살아있다고 우느냐며 껄껄대었다
졸시「그리고 노을 앞에서」부분
두 해가 지났고, 85년 그해 여름 『민중교육』사건이 터진 것이다. 지상파 3개 방송 브라운관에 내 이름자가 나왔고 17명의 교사가 투옥되거나 해직을 당했다. 고요한 소도시가 발칵 뒤집혔고 당연히 담벼락 바깥으로 쫓겨나야 했다. 60대 교장님이던 아버지가 집으로 불렀고 나는 울멍울멍 술을 마시고 글을 쓰려했다. 사건 이후 사흘째 되던 날.
찌르르르릉.
거실 바닥에 쓰러졌던 나는 초인종 소리에 벌떡 일어서서 반사적으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4시 30분.
부모님 모두 초조한 눈빛으로 대전시 홍도동 시영아파트 현관을 조심조심 열었다. 그리고 건장한 사내 셋이 들이닥쳤다. 가오리 형상에 매운 눈빛의 가죽잠바 중년사내가 패스보드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영장을 가져오셨나요?’
그 물음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아버지 혼자 초조한 표정으로.
“우리 아들은 죄가 없습니다. 단지 『민중교육』이란 책에 소설 한 편을 썼을 뿐입니다. 소설은 보셨나요?”
“갑시다.”
그들은 상부의 명령에 의해 새벽 체포조로 나섰을 뿐이다. 1985년 8월 7일이었다. 새벽 승용차에 실리면서 나는 그때까지 끌려간 아들의 뒷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보실 부모님의 타는 가슴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여름이 더웠고 시국은 어두워서 바득바득 어금니만 갈아대었다.
그대여 우리들이 지쳐 힘이 빠질 때마다
고개를 들어보자 더욱 멀리 보기 위하여
어깨를 기대 보자 다수움을 찾기 위해
낮달로 이러지는 새벽별이 올 때까지
아직도 우리들은 우리이어야 하기에
눈빛에 남아있는 행복을 더듬으며
두 볼에 젖어있는 흔적을 만지면서
그대들의 깡마른 가슴에 함께 불을 지피고
믿음으로 지켜보는 등불이어야 한다
졸시 「믿음을 위하여」 부분
그리고 대전시 은행동 ‘풍년 갈비’ 맞은편 ‘빈들 교회’ 지하실에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사무실을 차렸다. 대천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 중 소위 ‘보령 탄광지역 의식화 사건’으로 학교를 먼저 쫓겨난 최교진이 경영의 대부분을 맡았고 조재도, 황재학, 송대헌, 전인순, 전무용 등이 주머니를 갹출했다. 구성원마다 캐릭터가 달랐다. 최교진은 구치소에 들락거리면서도 생글생글 계산서를 책임지는 미소형 보스 스타일이었다. 송대헌은 범생이 롤모델답게 기획서 작성과 유인물 제작에 몰입했다. 김진호는 철뚝길 옆의 책방 ‘글천지’를 접고 복사집으로 바꿨으며 저물녘쯤 텃밭의 깻잎을 따서 평상의 막걸리를 추렴해주기도 했다. 홑벌이 전인순은 출판사 편집장으로 초지일관 교열에 빠졌고 전무용은 대한성서공회로, 황재학은 제일학원으로 몸을 옮겼고 조재도는 시 창작과 일을 병행했다. 문제는 시국의 중압감에 젖어 소통의 공감보다는 토론과 공박의 진실게임에서 스스로 상처에서 허덕이는 점이다.
세상은 나를 비난하는 인간과 나를 옹호하는 사람으로 양분되었다. 이상하다. 매스컴이 ‘니네는 붉은 앙마얏.’이라고 새빨갛게 도배해놨는데도 찾아오는 벗들이 줄을 이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그즈음 만난 사람이 무용교사 이순덕 선생님이었는데 그미는 대번에 해직교사를 위한 시국선언을 조직하는 등 싸움 준비를 해나갔다. 여전사였다. 튼튼한 근육질 몸이었고 500cc 생맥주 정도는 거리낌 없이 비웠다. 그미는 연신.
“강 선생님, 힘내세요. 이깁니다.”
벗들이 투사가 되길 원했으나 나는 맷집이 약했다. 그러나 나는 그미가 약해진다는 상상을 떠올려본 적조차 없다. 학생 의식화 문제로 우리들의 뒤를 이어 해직을 당하고도 유인물을 만들고 대책회의를 세우며 새로운 싸움을 준비해나갔으니 참으로 당찬 모습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나, 몸이 아프다는 소식이 들리는 것이다. 췌장암이다.
최교진 형과 방문하면서 변신된 몸을 만난다는 게 두려웠다. 방에 들어가자 그미는 보이지 않고 웬 할머니 한 분이 홑이불 위에 앉아 기침을 하는 중이었다. 그 할머니가 바로 이순덕 선생님이었다. 몇 달 사이에 그미에게만 수십 년 세월이 흐른 것이다. 나는 그미에게 받았던 ‘힘내세요.’를 돌려줄 수 없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났다.
매듭을 엮었다 우리들만은 끝까지 지켜서
사랑으로 뿌리를 내리자며 손을 모았다 그러나
용서치 말아다오
우리가 지은 죄를 제발 용서치 말아다오
아직도 모르는 우리들 부끄러움을 송두리째 보여다오
졸시 「이순덕 선생님」 부분
그리고 여자를 만났다. 지하 사무실 옆으로 풍물패 ‘터’ 창단식이 있던 날이다. 맞은편 대각선으로 생머리 여자 하나와 눈빛을 마주쳤는데 얼핏 ‘어허, 저 여자가 내 아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으니 운명이다. 서울 동아일보사 임시직으로 옮기면서도 공중전화 부스에 몸을 파묻곤 했다.
여자의 지갑 속에 해맑게 웃는 꼬맹이 사진이 들어있어서 ‘유부녀인가?’ 생각했던 적도 아주 짧게 있었으나 빈들교회에 셋방 사는 장재인의 세 살배기 아들 장호였다. 언제부터였나, 용두동 시외버스 정류소에서 종촌행 막차로 빠이빠이 작별의 손을 흔들고 홍도동 숙소까지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그미의 단발머리가 길바닥에 좌르르 쏟아지는 것이다. 시국은 더욱 음험하게 치달았고 대학생들은 단발마의 몸을 바치기도 했으니 분하고 억울한 일이다. 서울대학생 김세진과 이재호가 분신자살을 했고 몇 달 뒤 같은 캠퍼스의 조성만도 투신자살을 했다.
강가에 맨드라미
이파리 하나 보듬고 싶은 바람으로 남아서
만나는 사람마다 얼싸안고 싶었어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껴안을 수는 없었어 그래도
스치는 사람마다 손을 뻗으면서
취하지 않아도 넉넉히 사랑할 만한 사람들을
취할 때마다 가까이 당겨보아도
졸시「해직교사 전무용과 술을 마시며」
공주 탄천중학교에 복직을 하자마자 전교조 결성을 이유로 단두대에 목을 세웠던 1500여 명의 스승들이 또 담장 바깥으로 쫓겨났다. 충청도에도 최교진, 조재도, 송대헌, 전인순 등이 학교를 두 번째 쫓겨났고 50여 명의 벗들이 우르르 해직의 오랏줄에 묶였다. 큰 산을 넘으면 또 가파른 벼랑, 우리들은 모일 때마다 노래를 부르며 분노를 토로했다. 시국은 마주 달리는 열차처럼 치킨 게임 중이었고 나의 문학 무크인 『삶의 문학』동인에도 여덟 명의 해직교사가 등장했다. 그 중 경상도 사내인 정영상은 격함과 여림으로 혼재된 시인이었다. 그의 심장을 누르는 노여움이 자꾸 거칠게 문장화되는 것을 괴로워했다. ‘풍자냐 해학이냐’를 넘어서서 ‘직설이 아니면 타살’을 품어야 했던 난세의 수상함이라니.
눈 내리던 아침, 울먹이는 그의 전화를 받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1993년 수덕사에서 이정록과 밤을 새운 후 술떡의 목소리를 날린 것이다.
“병철아, 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 이제 살았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펑펑 울었다.”
서로 그렇게 기대고 막걸리 잔에 의지하던 사연들이 있었다. 그와 택시를 타고 충북 단양으로 가던 중 창밖의 오솔길을 가리키며.
“저거 보이지. 저 오솔길이 보이지 않으면 좋은 시 쓰지 못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늘나라로 떠났다. 해직교사들이 현장 방문을 했던 다음날 아침이었다. 학교 방문을 거칠게 거절당하고 그 노여움에 허덕이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 것이다. 하느님은 그렇게 착한 영혼들만 먼저 데려갔다. 어느 날 꿈에 그가 발가벗고 나타나는 바람에 와락 껴안다가 화들짝 깨어난 아침에 나는 글을 썼다.
작고 짧은 글을 얼마나 줄일 수 있나, 깊이 생각할 만한 종이를 골라 팔십 원짜리 감나무 단풍잎 같은 무당벌레 우표가 좋을 거야 사랑하는 사람한테 천상의 시인이란 소리 들어 환장하게 좋았던 가슴과 산에 피어 아무래도 더 예쁜 진달래 사연 합치고 ‘얀마, 왜 지각 했어’ 출석부로 어깨 두들기는 선생님 이야기, 샛길로 고갯길로 그림자 떨구는 시인의 발자국, 라면 국물에 찬밥 말아먹던 아저씨네 사연까지 수두룩한데 밤마다 벌거벗고 만나는 꿈으로만 나타나, 아아 이젠 안심이다 후닥탁 박차면 새벽길 전쟁 같은 출근시간 아찔하다 죽은 자는 가고 산 자는 출근버스에 허둥지둥 몸을 싣는가
졸시「해직교사 정영상을 하늘로 보내고」
시인 윤중호는 가객이었다. 그가 기타를 세우고 ‘흑인영가 줄을 튕기면 ‘착한 선생 조기호’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기지촌’은 또 어떤가? 김민기 노래와 전통적인 타령을 접맥시킨 가락이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자살의 충동을 느꼈다. 각설이 타령과 곱사춤의 합체가 ‘카타르시스와 허허실실의 합종’으로 변하면서 앉은뱅이 술꾼들까지 춤사위로 끌어들였다.
송성영, 최은숙, 류달상, 이규황, 원미연 등도 하나씩 모여들어 팬클럽의 자리를 채워주었고 내 쌘뽈여고 제자 지순희, 이은아, 임지연 등도 수시로 그의 안부를 물었다. 나도 그로데스크를 흉내 내기 위해 머리칼을 헝클었고 구두 뒤꿈치를 밟아 신었다. 시국이 아파서 내가 아팠던 80년대가 그의 춤사위와 함께 그렇듯 흘렀다.
언제부터였나, 수상한 소문이 흘러나왔으니 이 또한 운명이다. 그의 췌장에 반점이 생겼단다.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먹한 표정으로 달려왔고 특히 채진홍 교수와 김혁 원장, 온누리 김용항 사장이 지성으로 간호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견딜만한 시련만 주신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영원히 작별하는 줄 알았는데.
소도시 뒷골목으로 그런 배경이 있었다. 초승달빛이 막걸리 주전자를 핥는 중이었고 우리들은 냇물을 향해 몸을 세우고 희뿌옇게 오줌발을 날렸다. 물푸레나무가 그림자 흔들면서 지린내 털어내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제 돌아서려는 길이다. 그의 각설이 타령이 터져 나오면 후렴구 ‘얼씨구씨구 돌아간다’를 따라 부르려고 허리를 낮추려는 중이었다.
‘잠깐만 지둘려. 잉.’
그가 구멍가게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어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이다. 웬일일까? 목소리가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담배 여기 있어야.’
그러나 이미 문을 열었기 때문에 ‘가지 마’ 소리도 쏙 집어넣었다. 그의 몸이 얼핏 그림자처럼 흑백으로 흔들렸으니 이제 술병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릴 시간만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물푸레나무 가지 속에 몸을 숨겼다.
‘꺄웅, 소리를 질러 놀라게 해야지.’
새도록 술을 마시고 여관방 구들장에 등허리 붙인 채 노닥노닥 신새벽 숙취를 해결하리라. 그런데 이상하다. 한 번 꺼진 가겟방 불빛이 다시는 켜지지 않는 것이다. 바람이 몰아치면서 검은 장막이 완전히 앞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끝까지 기다릴 거야.’
그 순간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것이다. 없다. 선명하게 없다. 나는 물푸레나무에 손등을 찍어대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알타리무 벌판 너머 억새꽃 무더기 국숫발처럼 끈적거린다 수수꽃 끝에서 길게 끈 털던 황혼 너머 주정뱅이 두 사내 하염없이 걷는다 분명히 길을 걷는 중이다 달마대사 이마빡 박치기로 뽀개 버리고 육자배기로 걷는 중이다 어두울수록 네가 선명해서 나는 철없이 안심했다 이제 술꾼들의 토악질 위에서 곱사춤으로 뒹굴 차례다 순간 화들짝 이가 시린 것이다 활엽수 나목 검은 가지로 쏟아지는 신음 소리 탓인 줄 알았다 그런데 돌아보니 네가 없다 그 당연한 비수에 찔려 절망으로 쓰러진다 떠난 귀신 아프지 않게 눈물 삼켜야 한다는 잠언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개 같은 늦가을이다
졸시「윤중호 없는 술판을 끝내고」전문
최연진은 최교진의 누이동생으로 빵잡이 운동권 정선원 선생과 혼인을 했고 공주사대부고 앞에 책방 ‘우리 글집’을 차려 젊은 벗들에게 사회과학 의식을 전수하는 중이었다. 대학 1학년 제적 이후 몇 년 지난 어느 날 대학에서 ‘각서를 쓰면 복학을 시켜준다’는 공문을 받았으나 시내버스 안에서 찢어버렸으므로 교사가 될 기회는 영원히 사라졌다. 그 후로도 여전히 사람을 만났으며 푸짐한 웃음과 아가위 눈빛으로 변혁의 추진력을 가동시키곤 했다. 장마철 신원사 골짜기로 나들이 갔을 때 길바닥으로 흙탕물이 졸졸 쏟아지자.
“흙탕물이 참 곱다.”
천연스레 던지는 문장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새벽 공기가 달다’라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고 호프집 캡에서 3000cc 대형 술잔을 만지며 ‘똥장군처럼 푸짐하다’고 감탄하던 기억도 아슴아슴하다. 그러나 모순덩어리 사회의 구조를 고치고자 했으나 세상은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지난한 상황에서도 절대 엄살의 표현을 쓰지 않던 그미도 하느님이 먼저 데려갔으니 억울한 일이다. 우리들은 꺼이꺼이 그의 소매 끝을 놓치는 것 이외에 아무 방법이 없었다.
벗들이 ‘나는 가수다’ 열정에 가슴 조이며 소파에서 눈시울 적실 때 누이여, 까맣게 쥐불 타던 벌판으로 노랗게 번지는 이른 봄 그 자리에 아직도 아지랑이로 남아있나요
최루탄과 장미꽃 흩날리던 ‘사회과학의 봄’ 잦아버리고, 사월의 진달래 울울청년의 자막 감춘 채 희끗희끗 모인 자리에서 누이여, 목도리 두른 채 소주병 잡고 있나요
자본주의의 도약에 불안하게 편승한 역전의 그들 이따금 ‘타는 목마름으로’ 되새김질 망망 봄바람 받는데 누이여, 골리앗 크레인 응달진 구석에서 화사한 씨앗 뿌리시나요
그래도 되나요, 이제 미루나무 물오른 젊은 아해들 디지털과 스펙 쌓기 모텔 선인장 스크린으로 현란한데 ‘안 된다 안 된다’고 부인하지 못하고 누이여, ‘괜찮다 괜찮다’며 넉넉하게 안아주시나요
헤어지기 위해 모인 우리들, 구천의 안부에 취했다가 폭폭한 가슴 바야흐로 잊을 참인데, 누이여 천형(天刑) 같은 사랑 우금치 언덕으로 남아 버드나무 손가락 뽀드득뽀드득 꺾으시나요
「아직도 그대로 있나요」 전문
빈들교회 1층에서 밥상을 차려주던 장재인, 최영애 부부 그리고 내 아내의 지갑에서 화사하게 웃음 짓던 아들 장호(4세)도 세상을 떠났다. 남편 장재인은 서울 덕수상고에서 근무했고 아내 최영애 선생은 아들 장호와 강원도에 살았으니 그게 주말부부의 고단한 삶이다.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서울행 버스를 탔고 섬강다리를 건너다가 대교 난을 부순 채 강물에 잠긴 것이다. 헤어지기 위한 벗들이 꺼이꺼이 모여들었고 장재인 혼자 묵묵히 장례 절차를 치른 다음 마지막 날 유서 한 장을 남겼으니 가혹한 사단이다. 지난 날 빈들교회에서의 일가족 모두 이 세상에 없다. 이제 남은 자들은 「섬강에서 하늘까지」의 영화 스크린에서만 그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들 부부가 차려주던 밥상을 떠올리며 또 시를 썼다.
하느님, 그네들의 가슴에 견딜만한 시련만 안겨준다는
하느님, 그 말은 믿을 수 없다며 이를 갈면서
술을 마셨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자를 외워대며
대궁으로 일어선 죽은 자의 기침 소리에 귀 기울이며
죽은 자에 내려질 축복만 사무치게 빌어주다가
스스로 받아야 할 축복을 까맣게 잊은 채
원추리 꽃잎 몇 조각 골라 모았다 후미진 개펄 구석 어디쯤
이파리 끄집어 주머니 깊숙이 조금 더 찔러주었다
어느 누구의 가슴에도 이름자가 지워지진 않았지만
어느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저마다 소스라치는 별똥별이 되어 있었다
졸시 「그대 죽은 강가에 서서」부분
대동아 전쟁 때 학도병으로 끌려간 아버지 강동원 청년은 블라디보스토크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오다노리아끼(小田) 대중기관총대’로 배속되어 전투에 나가기 전날 꿈자리에 망자인 그의 부친께서 홀연 나타나시어.
‘빨리 피하라.’
그 눈빛 표정이 엄중하여 화들짝 깨어나서도 한참 동안 꿈과 생시의 구분이 가질 않는 것이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창자가 끊어질 듯 배가 아파 데굴데굴 뒹굴었다. 부하의 아랫배에 서슬 퍼런 일본도를 바싹 겨누던 부대장 나까무라는.
“거짓말이면 목을 자른다.”
쫄병의 복부를 걷어차다가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며.
“환자부대에 배속시켯!”
다음날 루스키섬 전투에 나간 군인들은 모두 섬멸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재빨리 판단했다. 이제 탈영이다. 학도병들은 남아 있는 환자부대들과 탈영을 감행하다가 함경북도 온성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교편을 잡으면서 소박한 실용주의자로 변신했다. 교원자격증을 획득한 아버지는 스무 살에 훈장이 되셨고 스물아홉에 교감으로 승진했고 마흔셋에 교장님이 되었다. 수십 년 교육 관료로 임했으니 관운도 조금은 따른 셈이다. 아버지는 가끔 풍금을 치거나 무용을 하는 스승들을 가리키며.
“저니도 내 동창생이다.”
당신의 입지에 대해 쬐끔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당신의 아들이 만년 평교사로 남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즈음이다.
91세 어느 날, 아버지는 아침 체조를 하시던 중 냉장고에 머리를 박으면서 쓰러지셨다. 그 와중에도 스스로 119를 불러 입원하시며 홀로서기를 보여주셨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 바깥 생활이 될 줄은 까맣게 몰랐다.
노인 병동 2년 7개월.
아버지는 병상에서도 '당뇨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딸기와 과자를 차단했고 방울토마토와 마른 건빵만 고수하셨다. 2017년 9월28일 저녁, 석식으로 쌀밥이 나오자,
"나는 당뇨환자라서 흰쌀은 안 돼."
바꿔 나온 잡곡밥 반 그릇 정도 간신히 떠넘기시고 여덟 시간 후 운명하셨다. 아!
아흔셋, 유리항아리 안고 비윗산 오르던 사십 년 당뇨의 몸, 보리밥 연명한 새벽 4시, 그 섣달그믐 자정 지난 시계추 비수처럼 등줄기 찍었습니다 스무 살 분필밥 잡은 후 45년, 발길마다 훈장 노릇 이골이 난 칠판쟁이 팔자였구요 아, 말년의 요양병원 철옹성 생애가 가장 가파른 그물망이었습니다 운전면허증 없는 아들놈, 터미널에서 노인병원까지 타박네 걸음 멈추면 폭삭 덮어주던 황혼 자락 저무는 벤치, 주차장 바라보며 컵라면 먹던 청승맞은 스크린, 지금은 그 풍경이 하염없이 그립습니다
「사부곡(師父曲)」전문
아버님의 장년 어느 신새벽, 바로 코앞에서 젊은 아들이 잡혀가던 풍경을 떠올리면 가슴이 무너지는 일이다.
강병철
소설집 『비늘눈』 『엄마의 장롱』 『초뻬이는 죽었다』 『나팔꽃』 성장소설 『닭니』 『꽃 피는 부지깽이』 『토메이토와 포테이토』 발간, 시집 『호모 중디아피엔스』 『사랑해요 바보몽땅』 등과 산문집 『선생님이 먼저 때렸는데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성적표』 『작가의 객석』 등 발간, 교육산문집 『난, 너의 바람이고 싶어』 『넌, 아름다운 나비야』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