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일요일 저녁에는 평소보다 거사님들이 많이 모입니다. 저녁 8시 쯤 굴다리 인근에 차를 세우는데, 굴다리 밖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를 피하느라 거사님들이 모두 굴다리 안으로 들아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100여 명의 거사님들이 오셨습니다. 평소보다 20-30여명이 많은 숫자입니다. 보살님들도 몇 분 있었습니다.
오늘 보시한 음식은 청도 홍시 240개, 백설기 250쪽, 커피와 둥굴레차 각각 100여잔입니다. 홍시는 낮에 제영법사와 운경행님이 두 개씩 포장을 했습니다. 오늘 봉사하신 분은 거사봉사대의 해룡님, 병순님, 종문님입니다. 비가 오고 굴다리 안으로 싸늘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긴 줄을 선 거사님들은 묵묵히 한 분씩 보시를 받았습니다. 얼굴이 익은 분들은 서로 안부를 전했습니다. 대부분 거사님들은 떡과 과일을 들고 어둠속으로 사라졌고, 굴다리 한 쪽에는 대 여섯 거사님들이 남아 떡과 홍시를 다 먹고, 다시 우리에게 와서 둥굴레차를 한 잔 더 마신 뒤에 자리를 떴습니다.
오늘도 조용히 그리고 평화롭게 따비를 회향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보시가 늘 이렇게 평상하니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무주상보시의 뜻이 다만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며, 문득 '다만 이렇고, 이렇다'는 임종게를 남긴 대혜종고 선사가 생각났습니다. 대혜종고(1089 - 1163)스님은 남송시대 선의 거장입니다. 스님이 남긴 서장(書狀 편지 모음)은 우리나라 전통강원에서 교재로 쓰고 있습니다. 대혜선사가 세상을 떠날 때, 제자들이 임종게를 청했습니다. 당시에는 고승들이 임종에 즈음해서 게송을 남기는 일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대혜스님은 제자들에게 "임종게가 없으면 죽지도 못하느냐?"고 큰 소리를 냈습니다. 스님에게 임종게가 없다고 대중이 다시 간곡히 청을 하자, 선사는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태어나는 것도 다만 이러할 뿐이고, 죽는 것도 다만 이러할 뿐이다.
임종게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모두, 이 무슨 열탕 대지옥이냐!"
(생야지임마 生也只恁麽 사야지임마 死也只恁麽
유게여무게 有偈與無偈 시심마열대 是甚麽熱大)
- 경산지(徑山志)
나고 죽는 그림자를 붙잡고 하나니 둘이니 따지는 것은 우리 집안의 일이 아닙니다.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