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71)
◇ 쏟은 물
마누라 북후댁의 지극정성 내조에도 여덟번이나 과거에 낙방한 이초시
암자에서 공부하다 ....
찢어지게 가난한 초가삼간 살림에 일곱번이나 과거에 미끄러진 이 초시에게도 살길은 있다.
이 초시 마누라 북후댁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다. 자신은 사흘을 굶어도 남편은 한끼 안 거르고 있는 것 없는 것 차려 상을 올린다. 바느질감 받아 밤을 새우고도 남의 집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뼈가 부서져라 일해 살림을 꾸린다. 가을이 되면 친정으로 달려가 올케 눈치 보며 목이 부러지는 줄도 모르고 바리바리 이고 지고 온다. 이만큼만 해도 복덩어리인데 인물 또한 빼어나 사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초시도 염치가 있는 선비다. 마누라 북후댁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얼마나 착한지, 얼마나 예쁜지 알고 있다.
어느 날 남의 집 가을걷이를 도와주고 집에 온 북후댁이 부엌에서 목욕하는 걸 이 초시가 문틈으로 보게 됐다. 아궁이 불꽃이 너울너울 춤추자 벌거벗은 북후댁의 몸이 비단뱀처럼 꿈틀거렸다. 그날 밤 북후댁은 세번이나 까무라쳤다. 북후댁이 이 초시 품에서 코맹맹이 소리를 했다.
“서방님, 소첩이 미쳤지요.”
“부인이 이렇게 뜨거운 줄 몰랐소.”
“부끄럽습니다.”
“꼭 과거에 급제해 호강시켜줄 테니 참고 기다려주시오.”
이 초시 팔베개는 북후댁 눈물에 젖었다.
평소 피곤에 절어 이 초시 하는 대로 비몽사몽간에 일을 치르다 난생처음 합환의 짜릿함을 느낀 북후댁은 일을 해도 힘든 줄 몰랐다. 그뿐인가. 용하다는 점쟁이를 한장 터울로 찾았다.
“이번 가을 알성시에는 자네 신랑이 오뉴월 갱엿처럼 쩍 붙을 거야.”
점괘를 받아든 북후댁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발길이 가벼웠다.
“맞아, 이번이 여덟번째지. 일곱번 넘어지고 여덟번째 일어선다는 옛말도 있지.”
알성시를 한달 앞두고부터 이 초시는 아내와 살을 섞지 않았고, 북후댁은 새벽마다 정화수 떠놓고 빌었다.
한양으로 올라간 이 초시가 보름 만에 거지꼴이 돼 내려왔다. 북후댁은 털썩 주저앉았다.
북후댁이 친정에 가서 곡식을 얻어온 날, 이 초시는 쌀 한자루 메고 석수암으로 들어갔다. 암자에 묻혀 죽으라고 공부하던 이 초시는 겨울 동안 집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눈사태가 길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봄이 와 빠끔히 길이 뚫렸을 때 집으로 내려온 이 초시는 그만 눈앞이 깜깜해졌다. 바람에 문은 열려 있고 북후댁은 보이지 않았다. 동네 어귀 주막에서 소문을 들었다. 최 진사의 개차반 막내아들이 북후댁을 꿰찼다는 것이다. 밤새도록 술을 마신 이 초시는 감나무를 안은 채 가지 끝에 매달린 그믐달을 보며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이튿날, 이 초시는 초가삼간에 못질을 하고 석수암으로 올라갔다.
“스님, 제 머리 좀 밀어 주십시오.”
노스님이 이 초시를 지긋이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한번만 더 보고.”
이 초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봇짐을 메고 아홉번째 한양으로 올라간 이 초시는 마침내 급제를 했다. 사모관대에 어사화를 꽂고 말을 타고 내려오던 이 초시가 동네 어귀에 다다르자 온 동네 사람들이 징과 꽹과리를 두드렸다.
이 초시는 주막 앞에서 말고삐를 당겼다. 개차반 오입쟁이란 양귀비를 낚아챘더라도 실컷 데리고 놀면 버리는 법. 북후댁도 이제 주막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술을 따라주는 신세가 되었다.
“부인, 물 한잔 주시오.”
북후댁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두손으로 물그릇을 올렸다. 물그릇을 받은 이 초시 눈앞에 온갖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북후댁이 고생고생 하던 장면, 둘이 땀범벅이 되어 합환하던 장면…. 자신이 감나무를 잡고 통곡하던 장면에 이르러 이 초시는 사발을 기울여 물을 쏟았다.
땅바닥에 쏟은 물을 다시 담을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