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와의 짧은 대화
지난 호에서 본초라는 이름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질문을 미뤄둔 채, 강연은 잠시 옆길로 나갑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라며 이야기를 하나 꺼냅니다.
한 종교인이 그 책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책을 읽어보니까 한의 계통 의학에 대해서 썼다고 하면서 생명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네요."
강연자는 그 말이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되물었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돌아온 답이 이랬습니다.
"한의학에서도 생명을 논하네요."
교회 목사님이었다고 합니다.
강연자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자기가 의아해졌다고 합니다.
"저는 의학은 그냥 치료와 뭐 이런 것에 대한,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런 의미 속에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의학인 줄 알았는데, 의학에서 생명을 논하는 것은 조금 의아했다."
여기서 강연은 되묻습니다.
종교가 궁극적으로 논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생명의 안위, 생명에 대한 확실성과 근거성, 그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목적 — 그것을 기준으로 삼고 나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의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우리 생명을 편안하게 보존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거예요."
같은 것을 하고 있는데, 왜 한쪽에서 생명을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는가.
"왜 생명이에요? 생명이야말로 우리가 궁극의 목적이요."
최고의 평안한 기준 상태에 보존하고자 하는 가장 귀한 존재. 그것이 나의 것이고, 상대의 것이고,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픔은 무엇인가.
"우리가 아픔이 있다, 괴로움이 있다 하는 것은 그 생명의 저촉(抵觸)을 받는 어떤 현상으로 봐야 되는 것이에요."
손끝 하나, 발끝 하나가 아픕니다. 그것이 왜 나에게 괴로운 일입니까. 대단한 병도 아닌데 말입니다.
내 생명이 저촉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료의 목적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안정된 생명 의식을 갖고 평안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한 데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지난 79호에서 생(生)과 명(命)의 관계를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생은 영원하고 풍요로운 쪽, 명은 그것을 담는 한계의 그릇이라 했습니다.
의학이 다루는 것이 그 그릇입니다. 그런데 그릇만 보면 그릇이 왜 있는지를 잊습니다.
의학책에 생명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생명 이야기가 빠진 의학이 이상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