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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의 복음서(Gospel According to John) ***
1. 요약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관한 〈신약성서〉의 4편의 이야기 중 4번째 이야기.
〈요한의 복음서〉는 4개의 복음서 중에서 공관복음서(공통된 관점을 갖고 있는 복음서들)에 포함되지 않는 유일한 책이다. 분명히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저자가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그 언어와 신학은 저자가 요한보다 더 오래 살았으며, 요한의 가르침과 증언에 근거하여 복음서를 썼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더구나 예수의 생애 가운데 여러 일화가 공관복음서와 순서가 다르게 기술되어 있으며, 마지막 장이 후대의 첨가물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요한의 복음서〉 본문이 합성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집필 장소와 연대 역시 불확실하다. 많은 학자들은 이 책이 100년경 헬레니즘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교도들에게 그리스도교에 관한 진리를 전해줄 목적으로 소아시아의 에페소스에서 씌어졌다고 주장한다.
〈요한의 복음서〉는 여러 가지 점에서 공관복음서와 다르다. 다른 복음서들과 시간 간격이 다르고, 예수가 사역의 상당 부분을 유대 지방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도되고 있으며, 예수가 신학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길게 강론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는 요한의 전체적인 목적에 있다.
이 저자는 자신은 예수의 많은 상징적 행동을 기록하기 위해 여러 일화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교회의 신비적 일치를 이해하고 그것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요한 20:30) 하기 위해, 많은 일화들 중 일부를 기록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요한의 복음서〉 전체에는 이러한 동기와 더불어 일종의 신비적 상징주의가 흐르고 있으며, 성육신이 계속해서 강조되고 있다. 저자는 〈창세기〉를 모방하여 성육신에 관한 선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한 처음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저자는 계속해서 예수의 목적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자신의 해석적인 주석을 첨가한다. 어떤 기적사화들, 가령 4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5,000명 급식기사(요한 6:1~15)에서, 요한은 이 사건을 보다 깊은 영적 진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나는 생명의 빵이다……").
〈요한의 복음서〉 전체를 통해, 예수는 〈마르코의 복음서〉에서처럼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고 공공연히 자신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요한의 복음서〉 저자는 일련의 사건을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그 사건들에 관한 올바른 신학적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사건들을 선택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요한의 복음서〉는 특별한 신학적 성격 때문에 고대에는 '영적 복음서'로 여겨졌으며,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리 형성에 깊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전승 자료 - 예수에 관련된 자료 나자렛 예수의 생애·사목·죽음은 그가 일으킨 세계적 운동에 대해 아무것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로마 제국의 변경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면서 가르쳤다. 그의 생애는 짧았고, 동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기록된 말도 남기지 않았다. 또한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해 씌어진 동시대의 기록도 없다. 역사적으로 예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도교 전통, 특히 마르코·마태오·루가의 복음서 구성을 위해 사용된 자료에 의존하는데, 그것은 후기 교회의 견해와 예수에 대한 신앙을 반영한다. - 비그리스도교 자료 이 자료들은 빈약하고, 예수의 생애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110년경에 씌어진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 Annals〉(15장 44쪽)에서 예수 처형에 대한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타키투스는 64년 로마의 화재로 발생했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설명하면서, 네로 황제가 자신에 대한 혐의를 없애기 위해 국민들 가운데서 미움을 받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화재의 책임을 씌웠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그 이름(그리스도교도)은 티베리우스 치세 때 총독 본티오 빌라도가 처형한 그리스도로부터 나왔다"고 설명한다. 예수가 유대에서 일으킨 '일시적으로 진압된 악성 미신'은 곧 후에 로마에까지 퍼졌다. 타키투스는 예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원래 종교적 칭호는 메시아)에 대해 말한다. 이 구절은 단지 종교운동의 창시자로서 예수의 수치스러운 죽음(십자가 처형)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고, 로마에서의 그 운동에 대한 일반적 견해를 설명해준다. 소아시아의 젊은 통치자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AD 111)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묻는데(〈서신〉 10장 96쪽~), 여기서 그리스도교도들은 '신에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미신을 믿는 신자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의 생애 Vita Claudii〉(25장 4쪽, AD 100 이후)에서 "그(클라우디우스)는 크레스투스의 선동으로 계속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깊숙이 유입됨으로써 로마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소란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크레스투스가 그당시 로마에 유대인 선동자로 나타났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저자에게 잘못 전해졌거나 저자에 의해 잘못 이해된 것이다. 클라우디우스의 추방칙령(AD 49)은 〈사도행전〉 18장 2절에서도 언급된다. 도미티아누스 궁정에서 유대인들의 역사와 유대 전쟁(66~70)을 서술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AD 62년에 '야고보, 그리스도라고 불린 예수의 형제……'<유대 고대사 Antiquities> 20장 200쪽)가 돌에 맞는 것을 언급했다. 그는 처음으로 고유명사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그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는 '메시아'의 번역이라는 것을 알았음). 그러나 그는 '이른바'라는 권위를 손상시키는 제한어와 함께 로마인들에게 친숙한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덧붙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 언급이 후기 그리스도교도가 삽입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플라비우스의 증언'(18장 63쪽~)으로 알려진 이러한 구절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그것은 적어도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요약하는(명백히 후대의 가르침인) 몇 가지 진술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유대법·전승· <탈무드>는 1, 2세기 랍비들의 몇몇 진술만을 고려한다. 그것들은 논쟁과 유대적 변증을 통해 그리스도교 전통과 친숙함을 보여주지만 또한 몇 가지 다른 전설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저작들이 제공하는 예수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판테르라는 사람의 아들(불합리한 어떤 해석들에 따르면)로 태어난 예수(히브리어로 Yeshu)는 마술을 행했고, 현인들을 조롱했으며, 백성들을 유혹하고 선동했고, 5명의 제자들을 그 주위에 모았으며, 유월절 전날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그러한 주장들을 윤색한 모음인 〈예수의 생애 Toledot Yeshu〉는 몇 개의 번역판으로 중세 유대인들 사이에 퍼졌다. 이러한 독립적인 보고들에 의하면 고대에는 그리스도교의 적들까지도 예수의 역사성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은 18세기말 불충분한 근거에서 시작되어 19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진행되었다. 야코프 바사노, 신전정화(Purification of the Temple), 1585년 - 그리스도교 자료들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교도들의 증언은 <신약성서>에 모아졌다. 그러나 그것들로부터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다. 〈신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저작인 바울로의 서신(AD 50년대)은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 어떤 정보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사도 바울로는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고(Ⅱ 고린 5:16) 예수의 전기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바울로의 사상과 말씀 선포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부활·승천·재림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의미만이 있다. 그는 이 내용을 그가 받아 전해준 전통(Ⅰ 고린 11:23~, 15:3~)으로 규정하거나, 아니면 주어진 전통으로 보여준다(로마 1:3~, 필립 2:6~11). 예수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자료들은 공관복음서(마태오·마르코·루가)이다(복음서). <요한의 복음서>인 제4복음서는 특별한 입장을 보인다. 그것은 공관복음서와 유사점을 보이기도 하고 그 안의 독립적인 전통들은 역사성을 가지기도 하지만, 요한의 전승은 복음서가 진보된 신학적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학적인 관념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 복음서가 역사적인 자료로 직접 사용될 수는 없다. 이것은 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늦은 100년경에 씌어졌다. 복음서 문학이 여러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에 대한 정경 외적 전승에서 보여진다. 이 전승은 초기 교회 교부들의 인용 및 다른 자료에서 단편적인 형태로 보존되고, 전설적인 내용과 경향을 담고 있다. 그 예로 1945년 이집트 '나즈함마디'에서 발견된 콥트어 〈토마의 복음서〉(2세기에 영지주의 그리스도인들, 즉 비의적 이원론을 믿는 이단적 신자들에 의해 씌어짐)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는 정경복음서들에 있는 것과 연관되는 114개의 예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서술에 있어서 역사적 윤곽을 가지고 있지 않다(예를 들면 수난과 부활절에 대한 내용이 없음). 이 복음서는 천상적 계시의 담지자로서 예수가 제자들의 비밀집단에게 물질세계를 포기하고 그들이 본래 기원한 소멸하지 않는 초월적인 빛의 세계에 참여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토마의 복음서〉는 역사적 예수를 위한 자료로서는 쓸모가 없다. 공관복음서들은 원래 작자미상이다. 불확실한 2세기의 전승에 따르면 그것들은 예수의 제자들이나 초기 사도들의 동료에 의해 씌어졌다. 복음서들은 70~100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렇게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씌어졌다는 것이 그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더 오래된 구전 전승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전승의 특성과 구조가 복음서에서 통합되었으며, 복음서들은 명백히 사실·상황·사건들의 과정에 대한 역사적 혹은 전기적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 이야기 자체를 재생하지 않고, 그 대신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된 역사를 말한다. 예수의 행적을 〈구약성서〉 약속의 성취로 해석하고, 그의 이야기는 죽음(수난과 부활), 신적인 구세주로서의 중요성, 재림에로 나아간다. 복음서의 본문들은 과거의 예수보다는 모든 시대를 대상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선포하려고 한다. <마르코의 복음서>, <마태오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는 대체로 같은 전승 내용을 지니고 있지만 어떤 부분들은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에서만 발견되고, 어떤 내용은 특히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만 혹은, 〈루가의 복음서〉에서만(〈마르코의 복음서〉에만 있는 것은 많지 않음) 발견된다. 거의 모든 성서 비평학자들에 따르면, 가장 짧은 〈마르코의 복음서〉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고 다른 두 복음서의 주된 자료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에서 공통적인 내용을 2번째 자료(Q[독일어로 '자료'라는 뜻의 Quelle에서 유래])에서 나왔다고 믿는다(Q문서). 이 2번째 자료는 대부분 예수의 말씀들(logia)로 구성되어 있고, 수난 혹은 부활 전승은 포함하지 않는다. 카를 루트비히 슈미트, 마르틴 디벨리우스, 루돌프 불트만은 양식비평(복음서 전승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연구)을 발전시켰는데, 이 비평은 기본적인 전승은 서로 아무 관련도 없고, 날짜·장소·역사적 상황에 관심이 없는 수많은 작은 독립적 단위들(말씀·비유·논쟁·일화·기적담)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개별적인 단편들을 편집하여 연결시키고, 말씀과 말씀군으로부터 어떤 '담화'를 형성하면서 개별적인 장면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사건들을 연결시킨 사람들이 복음서의 저자들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위해 가장 온건한 수단들, 즉 짧은 도입적 연결구, 상투적이며 일반적인 시간에 대한 지시('다음에','며칠 후'), 막연한 장소에 대한 지시(산·들판·길·집·호수) 등을 사용했다. 복음서들의 양식비평은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한 분석은 더 오래된 자료의 탐구를 위한 첫 단계였을 뿐이다. 공관복음서에 들어 있는 구전 전승은 기억하기 쉽도록 내용에 알맞는 고정된 형식을 사용한다. 이러한 예로는 예언적 말씀, 진복팔단, 화의 선언, 잠언과 유사한 지혜 말씀, 율법에 관한 말씀, 교회 규칙, 대화 등이 있다. 예수의 많은 기적은 그 동기나 특성을 사용해 말해진다. 따라서 복음서의 전승은 삶을 표현하는 관심과 방식에 밀접하게 관련되었으며, 부활 이후 교회의 관념과 사고방식의 영향 아래 교회 신앙의 관점으로부터 형성되고 수집되었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본문을 해석할 때 교회 안에서 그 본문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자료들에 대한 이러한 비평적 개관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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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두 제자의 활약 -예수, 열두 제자를 뽑다 예수가 공생활(公生活)을 시작한 이후, 복음 전파를 위해 최초로 뽑은 제자가 열두 명이다. 이는 열두 지파를 염두에 둔 것이다. 열두 제자는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소야고보)와 그의 형제 타대오라고도 불리는 유다 그리고 빌립, 바돌로메, 도마, 세리 마태, 가나안 사람 시몬, 가롯 유다다.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가 자살한 뒤 제자들이 유다를 대신해 다른 사람을 제자로 맞아들였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 때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들 가운데에서 제비뽑기로 마티아를 뽑았다. 제비뽑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신의 뜻을 묻는 데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구약시대에 재산이나 땅을 나눌 때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자주 쓰였다. -성령 강림 예수는 부활 후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하다 승천했다. 그리고 승천한 뒤 열흘이 지나 오순절이 되었다. 원래 오순절은 밀 추수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인 동시에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은 걸 기념하는 절기다. 풍성한 수확의 절기로 우리나라 추석과 같다고 보면 된다. 가난한 자와 의지할 곳 없는 객들이 굶주릴까 봐 일부러 밭에 이삭을 남기는 사랑과 나눔의 절기였다. 단 한 사람도 소외됨 없이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즐기고, 기뻐하는 절기였다. 이때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성령이 임함을 체험했다. 오순절이라 각국에 퍼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모였을 때인데 그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몰려들었다. 이들은 이상하게도 제자들이 하는 말을 자기가 사는 지역의 말로 알아들었다. 이른바 방언 현상이었다. 이 일로 하루에 3천 명, 5천 명이 세례를 받고 제자로 합류했다. 성령 강림 /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년경-1576) 1570년경, 유화, 구원의 성모 성당, 베네치아, 이탈리아 이들은 사유 재산을 처분하고 이를 모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다. 신앙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이는 “능력껏 벌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쓴다”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유대교 고유의 공동체 정신에 의한 것이다. 공동체가 점점 커져 마침내 예루살렘 교회가 성립되었다. 이때 지도자로 단연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베드로와 야고보였다. 이후 부활과 성령 체험으로 확신에 찬 제자들은 목숨 걸고 복음 전파에 나섰다. 제자들은 ‘예수가 주이자 그리스도임’을 전했다. -제자들의 순교 * 야고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이다. 야고보라는 이름의 유래는 ‘발꿈치를 잡다’라는 뜻이다. 또 다른 사도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동명이인이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흔히 ‘대야고보’라고 부른다. 야고보는 예수 승천 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사마리아와 유대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이베리아 반도까지도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을 탄압하던 헤롯 아그리파 왕의 칼에 순교당해 사도 가운데 첫 순교자가 되었다. 야고보의 유해는 처음에는 예루살렘에 안장되었으나, 정확히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는 행방이 묘연했다. 그러던 중 9세기경 하늘에서 한 별빛이 숲 속의 한 동굴을 비추어 사람들이 가 보니 야고보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야고보의 유해는 스페인 서북부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도시로 이장되었다. 당시 스페인 알폰소 왕은 그 묘지 위에 150년에 걸쳐 웅대한 성당을 건축했다. 현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는 그의 유골함이 전시되어 있다. 십자군전쟁 때 교황은 그의 묘지가 있는 산티아고를 순례하면 천당에 갈 수 있다고 공표했다. 그 뒤 기독교인들에게 산티아고는 예루살렘에 이어 제2의 성지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그 길을 걷고자 하는 많은 순례 객들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 야고보의 유해가 있는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 베드로 베드로 역시 헤롯 아그리파에게 잡혔으나 구사일생으로 피신해 소아시아 및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크로 가서 복음을 전파했다. 고대 교회 전승에 의하면 그는 로마로 돌아와 그리스도교단을 주재(主宰)하다 네로 치하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순교 당시 일화가 있다. 로마에서 박해가 일어나 많은 성도들이 잡혀 죽임을 당했다. 그때 베드로는 다른 성도들의 권면에 따라 로마에서 도망쳐 피신 도중에 환상으로 예수를 만났다. 이때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가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한다”고 말씀했다. 그 길로 베드로도 다시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 한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 아래 그의 무덤이 있다. 베드로는 예수로부터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다.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는 그를 초대 교황으로 받든다. 이 제도를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으며 현재 프란체스코 교황은 베드로의 266번째 후계자다. 피에트로 페루지노,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예수〉(1482년경), 프레스코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 사도 요한 사도 요한은 야고보의 동생으로 이름은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임종하기 직전에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던 마리아와 요한을 보고 먼저 마리아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요한에게는 “이 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라고 말하며,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했다. 이때부터 요한은 임종 때까지 평생 마리아를 곁에서 모시고 섬겼다.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후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사도들 중 가장 먼저 예수의 빈 무덤으로 달려갔으며, 뒤따라오는 베드로를 기다려서 그가 먼저 들어가게 했다. 그제야 요한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차례대로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었으며,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부활한 예수를 제일 먼저 알아보았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십자가 아래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1512). 그는 《신약》의 〈요한복음〉, 〈요한 제1서〉, 〈요한 제2서〉, 〈요한 제3서〉, 〈요한계시록〉의 저자다. 예수 승천 후 초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인물로 일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유대 국내에서 전도하다 예루살렘이 70년 로마 군에게 멸망되자, 에베소에 가서 전도했다. 로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핍박으로 끓는 가마에 넣어졌으나 튀어나오는 이적이 일어났다. 이에 그를 박해하던 무리가 놀라 그를 밧모 섬으로 귀양 보냈는데 요한은 거기서 계시를 받고 《성경》을 쓰며 수명대로 살다 죽었다고 한다. * 안드레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는 형에 가려 별로 두드러져 보이지 않지만 예수의 첫 번째 제자였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예수의 친척인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것으로 미루어 그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하겠다. 안드레는 소아시아, 그리스 등에서 전도하다 ‘안드레의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 안드레는 엑스자형 십자가에 매달려 숨이 끊어지기까지 이틀에 걸쳐 계속 설교를 했다고 한다. 안드레는 그리스, 러시아, 스코틀랜드에서 수호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다. * 그 외 제자들 그 외에도 예수의 제자들은 대부분 순교의 길을 선택했다. 빌립은 예수 승천 후, 소아시아의 브루기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바돌로메는 소아시아, 인도 등에서 전도했으며, 다시 아르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도마(토마스)는 예수 부활 후 그 상흔을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다가 신앙을 회복한 후 파르티아, 인도 등지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순교했다고 한다. 〈마태복음〉을 쓴 마태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참수형을 당했다고 한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소야고보)는 전승에 의하면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순교했다고 한다. 그의 동생 유다(타대오)는 파사에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은 이집트에서 전도한 뒤, 유대에 돌아와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가롯 유다 대신 선출된 사도 마티아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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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와 그리스도교 그리스도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 이탈리아의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렸다. 기원전 6년 무렵,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이 아기가 바로 예수였다. 그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던 헤롯 안티파스는 마굿간에서 태어난 아기가 후일 메시아가 될 것이라는 예언에 2살 이하의 아기는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 예수는 이집트로 피난해 있었기 때문에 헤롯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 후 그는 성장하여 예루살렘으로 와서 박애와 평등을 부르짖는 설교를 하게 된다. 이스라엘에서는 예전부터 그들만의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가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여호와의 자식들'이라고 칭하며 십계명을 생활의 규범으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그들의 신앙에는 자신들만이 신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선택된 민족이라는 우월감을 나타내는 선민사상이 있었으며, 또한 그들이 어려운 경우를 당했을 때는 여호와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구세주Messiah를 보내실 것이라는 메시아 사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이미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지화하여 유대민족의 생활이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로마에 대항하기는커녕 로마 제국의 위용에 눌려 오히려 자신들의 권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유대민족을 억압하였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로 메시아가 유대민족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세울 것이라는 예언을 믿고 있었다. 한편 가난하게 살며 로마의 억압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던 하층 백성들은 더욱 절실하게 그 희망을 믿고 있었다. "말세가 가까웠으니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메시아를 보내실 거야. 그러면 저 잔인무도한 로마인들을 무찌르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게 되겠지. 이제 곧 그날이 올 거야." 이처럼 유대민족은 메시아가 나타날 것을 믿고 있었으며 이러한 가운데 예수가 나타났다.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로 세례를 받으러 갔다. 세례 요한은 그 당시만 해도 유대민족의 메시아 혹은 선지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요르단 강가에서 예수를 본 세례 요한은 상기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세례 요한이 세례 주기를 사양하자, 예수는 대답했다. "지금 제가 하자는 대로 하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제서야 세례 요한은 예수의 뜻을 알고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후 성령이 예수에게 내렸고, 여호와는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하였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예수는 황야로 들어가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여 여러 가지 고통을 이겨냈다. 그 후 예수는 갈릴리로 내려왔다. "때가 이르렀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드디어 예수는 만민구원의 설교를 시작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리고 마음이 병든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예수는 유일신 여호와의 복음을 들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병든 자를 고쳐주고, 슬픔에 빠진 자에게는 희망을 주는 등 일반 민중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의 소문이 점점 퍼져나가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또한 그의 가르침에는 유대교의 사제나 율법학자들과 같이 현학적이고 위선적인 태도가 전혀 없었다. 예수의 이야기는 보통 사람들이 흔히 쓰는 평범하고 쉬운 말들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설교는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t)인데, 그 속에는 그의 사상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틴토레토, 1560년경 예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복음신앙이었다. 유대교의 편협함과 우월감에서 벗어나 하느님에 대한 믿음, 이웃사랑 등을 강조하며 복음을 믿고 죄를 회개하면 누구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만민평등의 구원사상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특히 헐벗고 굶주린 가난한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주로 행해졌으며 부유하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매섭게 꾸짖었다. 그의 주된 사상은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고통과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나 하나만의 구원을 위한 신앙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신앙을 주장했다. 그리고 유대교의 편협성과 현실 만족의 태만함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것은 그가 3년간의 민중에 대한 설교를 마무리 짓고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을 때 보여준 그의 행동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어느 성전에 들어가니 거기에는 장사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은 신전에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고 돈을 버는 등 성전 안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예수는 상인들을 내쫓고 의자와 탁자들을 뒤엎은 다음에 야단을 쳤다. "내 집은 모든 백성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더냐. 너희는 어찌하여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느냐?"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권한이 침해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예수를 미워했다. 또 한번은 예수가 성전 안을 거닐고 있을 때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이 나타나서 그를 모욕할 생각으로 한 가지를 물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물을 테니 대답을 하면 내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대답하겠다. 요한이 내게 세례를 내린 것이 하늘로서냐 사람으로서냐?" 이에 그들은 대답을 못하고 물러섰다. 이렇게 행동한 그를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 곱게 봤을 리가 없었다. 그들로서는 비천한 예수가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것이 못마땅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행동이 이제껏 그들이 누려오던 특권과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그들은 예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가롯 유다를 매수하여 예수를 모함했다. 유대인의 최고평의회는 신을 모욕했다는 죄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를 인도하였다. 유대인은 판결권만 있었지 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 칭하면서 민중을 유혹하고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내용의 고소장을 보냈다. 예수를 정치범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고 혐의가 없음을 확신하였지만 바리새인들이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예수를 로마의 이름으로 또 유대인의 이름으로 처형시키자고 떠들어댔다. 결국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모함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어갔다. 십자가에 붙은 푯말은 '유대의 왕 예수'였다. 그는 그 후 3일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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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한복음의 내용
1. 복음서의 시작: 성육신하신 예수와 세례자 요한 및 예수의 제자들(1:1-51)
II. 갈릴리 가나의 두 표적과 예수를 만난 사람들(2:1-4:54)
2.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난 첫 번째 표적(2:1-12)
3. 예수의 성전 사건과 사람들의 반응(2:13-25)
4. 예수와 니고데모(3:1-21)
5. 예수와 세례자 요한(3:22-36)
6. 예수와 사마리아 여성(4:1-42)
7. 예수의 선지자적 자의식(4:43-45)
8.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난 두 번째 표적(4:46-54)
III. 유대인의 명절과 예수의 표적 사건(5:1-10:42)
9. 안식일에 일어난 첫 번째 표적(5:1-47)
10. 유월절 표적(6:1-71)
11. 초막절과 예수의 정체성(7:1-8:59)
*부록: 죄 지은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7:53-8:11)
12. 안식일에 일어난 두 번째 표적과 수전절의 예수(9:1-10:42)
IV. 병들어 죽은 나사로의 부활과 예수의 죽음 암시(11:1-12:50)
13. 병들어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신 예수(11:1-44)
14. 예수와 산헤드린 공회(11:45-57)
15. 예수의 죽음 암시(12:1-50)
V. 예수의 최후 만찬과 고별 설교 및 기도(13:1-17:26)
16. 예수의 세족 행위와 최후 만찬(13:1-30)
17. 예수의 고별 설교(13:31-16:33)
18. 예수의 기도(17:1-26)
VI. 예수의 수난과 부활(18:1-20:31)
19.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18:1-19:42)
20. 예수의 부활과 복음서의 기록 목적(20:1-31)
VII. 부활하신 예수의 현현(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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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요한1) 은 본래 갈릴래아의 어부였는데 같이 일하던 형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첫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는 어부 제베대오였고 어머니는 살로메로 추정된다. 요한 복음서와 요한 서간 세 권 그리고 요한 묵시록의 저자를 요한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실 때, 당신 자신의 영광스러운 변모 때, 겟세마니에서 번민에 휩싸여 계실 때 그분 곁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제자들 중 하나였던 것으로 미루어 예수님 가까이에서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로 알려져 있는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로부터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제자였고 베드로와 함께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 부활의 증인이 된 제자이기도 했다.
이 밖에 요한이 함께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다른 내용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가 예수님과 맺고있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초대 교회 안에서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복음선포에 앞장서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도 바오로는 요한을 가리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가운데 한 사람이라 부르기도 했다.
요한은 한편으로 강한 기질 때문에 때로는 성급하기도 하고 분별없이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보이는 등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에게서는 굳건한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충실하게 따른 제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전승에 따르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요한은 후에 마리아를 모시고 에페소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잠시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요한 묵시록을 썼으며 다시 에페소에 돌아와 살다가 명을 다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