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 / 우종룰
자꾸만 벌어진다. 물기가 들어가니 불린 종이처럼 상처 난 부분이 확대된다. 여태껏 숨어있던 것이 서서히 본체를 드러낸다. 손가락 마디에 고무 밴드를 감아본다. 실핏줄이 숨이 막히는지 갈라진 부분에 몰려들어 얼굴을 붉힌다. 태무심이 불러 온 화다.
팥빙수를 만들기 위해 얼음을 기계에 넣었다. 그런데 각얼음들이 서로 엉켜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엔 각각의 결정체들이었는데 서로 붙어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억지로 깨기 싫어 그냥 갈았던 것인데, 이놈들이 당최 분리가 되지 않았다. 단체행동이라도 한단 말인가. 그만 떨어지라고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을 뿐이었다. 순간 짜릿했다. 새끼손가락이 닿은 곳은 하필이면 칼날이었다. 얼른 손을 뺐다. 하지만 이미 빙수기 칼날에 손가락을 벤 뒤였다. 오래 전 기억처럼 잊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벌어진 틈 속에 물이 들어가자 따갑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부터 유달리 다래끼가 많이 났다. 눈 밑이 약간 욱신거리면 속눈썹을 뽑으며 점을 쳤다. 별 탈 없이 나을까, 아니면 곪을까. 눈에 애기고추만 비빌 뿐이었다. 며칠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낫는가 하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부은 적도 있었다. 단지 운으로 생각했다.
이까짓 살짝 베인 상처 정도는 점을 칠 필요까지 없었다. 요즘 잘 낫는다는 피부연고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운이 나쁜 쪽으로 기울어지는가. 상처부위가 벌어졌다. 빙수칼날이 손가락으로 전이된 듯 하얗게 날이 서 있었다. 새끼손가락 끝의 얇은 표피가 칼날이 되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자 아리기까지 했다. 문득 예초기의 날을 떠올렸다.
칼날이 서서히 다가왔다. 일 분에 3600회전을 한다는 그라인더보다 더 빠른 성 싶었다. 기습이었다. 방어할 능력이 없는 잡초들은 맥없이 무너졌다. 풀벌레들도 앞 다투어 도망가기 바빴다. 단지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애먼 것까지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묵묵부답인 채 바라만 볼 뿐,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작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언제부터 내게 그런 야성이 숨어있었던가. 어릴 적부터 옥죄어왔던 도덕성, 그 감정의 고리들이 깨어지고 일시에 가슴이 벌어지고 있었다. 매사를 억누르고 타협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왠지 억울한 생각까지 들었다. 중년의 일탈도 아닌데, 이래선 안 된다고 또 추슬러야 한단 말인가.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공격을 하는 비열한 전쟁이다. 풀 속의 제왕 살모사는 댕강 두 동강이 나 버린다.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있는 독뱀의 두려움 정도는 이미 공포의 대상 밖이다. 한 편에선 창을, 다른 쪽은 자동소총으로 싸우는 상대가 되지 않는 전쟁일 뿐이다. 회전하는 칼날 앞엔 독 품은 제왕의 혀 끝 정도는 바람 앞의 등불이다. 온 들과 산을 울리며 칼날은 강제로 평정해 버린다. 초목은 숨 한번 쉬지 않고 떨고 있다. 그 아우성 앞에 얼씬하는 것은 힘없는 피조물일 뿐이다.
소리 없는 전쟁, 아직도 독립하지 못한 나라들이 점령자들의 칼날이 잠시 무디어진 사이에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자신의 힘이 미약한 줄 알고 우방의 친구들까지 규합하여 듬성듬성 맞불을 붙인다. 칼날 앞에 맥없이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 눈물겨운 투쟁이 이어진다. 무장군인이 겨누는 총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던 열아홉 살 소녀의 글썽이는 모습이 눈앞에 자꾸만 어른거린다.
칼날은 무엇인가. 무기, 단지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한 물질문명의 도구, 하지만 내겐 아직도 꺼내지 않은 갑 속에 든 아우성이다. 벌어진 새끼손가락 끝을 보고 있으니 칼 한 자루 든 무사가 되고 싶다. 아직도 풀어놓지 못한 숙제, 내 안의 독립되지 않은 그 무엇을 찾으려 자꾸 일어나고 있다.
여태껏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사라진 생채기가 얼마나 될까. 슬쩍 지나는 단상을 잡아 형상화 해보고 싶은 일들이 부지기수였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작은 일에 더 집착하게 되었다. 깊이 사유하지 않고 지나친 것들, 드러난 일들만 머릿속에 가득 차다보니 발치에 차이는 것들은 종시 관심 밖의 일들이 되어 버리기 일쑤였다. 무딘 사고로 사라져 간 것들을 요즘 들어 종종 곱씹어 볼 때가 있다.
지천명이 넘도록 무엇을 했는가.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뚜렷하게 눈에 보일 일들 은 하나도 없다. 늘 부족하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라왔다. 내가 부모 밑에서 커왔듯 어떤 대가를 받지 않고 그들도 수레바퀴처럼 그렇게 굴러 온 것뿐이다. 남겨진 것 아무것도 없는 현실, 무딘 칼이라도 다시 쥐고 흔들고 싶다.
새끼손가락을 높이 든다. 오늘도 영혼이 사라질 그 날 후회하지 않기 위해 꿈을 꾸고 있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칼날 하나로 무언가를 찾고 있다. 물 빠진 저수지 진창 속에 몸을 박고 숨어있을 미꾸라지, 분명 그는 살아있다. 언젠가는 새 물을 만나 꾸물거릴 미꾸라지 같은 미끈한 글줄 하나 잡으려고 나는 오늘도 희번덕이는가.
열아홉 살 소녀가 자동소총 앞에 꼿꼿이 고개를 쳐들, 예초기에 잘려나간 풀들의 목이 다시 자랄 그런 날을 기다린다. 두리번거리는 칼날이 아직은 날카롭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