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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행한 의지 그리고 용기와 결단 - 어떤 솔거의 죽음 (류보선)
작가 조정래
위대한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은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즐겁되, 그 즐거움에는 알지 못하던 세계를 발견했을 때 경험하는 두려움이 따른다. 모든 위대한 작품에서 우리가 두려움과 즐거움을 도시에 맛보는 까닭은, 위대한 작품에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속에 숨어있는 비인간적인 측면을 부정하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려는 의지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태백산맥"과 "아리랑" 등으로 우리 근현대사가 불행할 수 밖에 없었던 기원을 정확하게 밝혀 내고, 더 나아가 이러한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진정한 삶의 자세를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위대한 작가 반열에 올라선 조정래의 소설 역시 즐겁되 두려우며, 두렵지만 즐겁다.
조정래의 소설이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우리 주변의 불행하고 소외받고 고통스러운 존재들을 소설화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우리가 지닌 상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는 치유하기 힘든 물리적, 정신적 상처로 고통받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안정과 편안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는 대부분 무관심한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우리는 주변의 불행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 자신이 게으르거나 무능력하기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 조정래는 불행한 사람들을 우리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신만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불행을 같이 아파하고, 그러한 불행에 이르게 된 과정을 면밀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다수의 불행이 사실은 한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상황에서 유래한다고 판단한다.
또한 우리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불완전하고 비인간적인 상태로 파악한다. 우리 사회가 서로를 배려하고 돕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 모두가 경쟁하는 사회이며 동시에 물질적 이익에만 집착하는 물신화된 사회라고 믿는다.
흔히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윤을 얻은 사람을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이윤을 얻은 사람을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비웃는다. 하지만 조정래는 세상을 그렇게 파악하지 않는다. 그는 누군가가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윤을 얻으면, 다른 누군가는 최대한 노력을 하고도 최소한의 이윤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더 나아가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윤을 끌어 내는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믿는 가치관이야말로 자신의 이익만을 절대시하는 비인간적인 가치관이라고 규정한다.
우리 근현대사의 불행이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에서 시작해서 남북 분단의 비극으로 최고조에 달했다면, 이 불행은 모두가 자기 나라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강대국들의 비인간적인 가치관에 의해 발생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불행하고 부조리한 조건이 오래 지속되었던 것 역시, 자신들의 이익에만 집착했던 우리 민족 구성원들의 잘못된 가치관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작가 조정래는 이처럼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잘못된 제도나 가치관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대수의 행복은 물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사실은 주변의 존재들을 불행에 빠뜨리는 악마의 유혹일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지금과는 다른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조정래의 소설이 지속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정래의 소설을 읽는 것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허위의식을 깨뜨릴 때만 진정한 의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조정래의 소설을 읽는 것은 우리가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작가 조정래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앞서 이야기했듯, 우리 주변의 불행한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과 소외다. 그 중에서도 작가 조정래가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비극적이기까지 한 우리의 근현대사가 우리 민족에게 남긴 상처다. 그렇다고 단순히 우리 역사상의 비극적인 장면만을 서술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더 나아가 식민지, 한국 전쟁, 남북 분단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우리 역사의 기원을 찾아나설 뿐만 아니라, 그 비극적인 역사를 마감할 삶의 자세를 발견하고자 한다.
'메아리 메아리'는 그의 이러한 관심사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겉으로는 한국 전쟁 중 불행한 처지에 빠지는 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지만, 실제로는 우리 민족이 경험한 비극의 기원과 극복 방안을 제시하는 소설이다.
식민지 상황에 처한 우리 민족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물질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는 아버지가 상섭에게 판검사가 되라고 권유하는 것은, 훌륭한 사람이 되어 올바른 사회를 건설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상섭은 자신만을 배려하는 비인간적 가치관 대신에 다수의 불행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러한 진실을 향한 그의 용기와 결단은 그를 불행에 빠뜨리고 진실한 삶을 살고자 한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고초를 겪는다. 해방에 되자 상섭은 가족의 행복보다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영합해 모은 아버지의 토지를 내놓고 자신만의 이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버지와 대립하지만 아버지는 진실한 삶을 위한 그의 결단을 꺾지 못한다.
상섭의 진실한 행동에도 불구, 공산주의자가 된 상섭은 반동으로 몰리고 감옥살이 후 월남한다. 남한에서도 그의 고초는 계속되고 공산주의를 누구보다도 혐오하지만, 한때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 '월남을 가장한 이북의 빨갱이'로 몰려 또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렇게 진정으로 의미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박상섭은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타락한 세상 사람들에 의해 오히려 타락한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작가 조정래는 불행의 근본 원인을 진실하지 못한 가치관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찾는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비인간적인 가치가 다른 나라를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결과를 낳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전쟁이라는 비극을 불렀으며, 그러한 역사적 정황이 우리 민족의 불행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인형극' 역시 다른 사람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인간적인 가치보다는 물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가를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법을 집행하는 검사가 법을 어기는 데 앞장선다는 것도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더욱 불쾌한 것은 낙준이나 그 주위사람들이 영찬이를 보는 시각이다.
그들은 영찬이 본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찬이의 환경, 그것도 물질적 환경에만 관심을 가지며, 그 환경이 부유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영찬이를 존중해야 할 인격체가 아니라 멸시받아 마땅한 물건을 보듯이 바라본다.
우리가 더욱 불쾌해지고 나아가서 두려워지기까지 하는 이유는, 이렇듯 비인간적인 삶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샌가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한 삶의 진실한 모습을 보기보다는 그 사람의 겉모습만을 보며, 그 사람의 물질적 환경으로 그를 평가하는 데 더 익숙하다. 그러므로 '인형극'에 등장하는 불쾌한 존재들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며, 이처럼 우리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인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일그러진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인형극은 인형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두렵게 확인시키고 있다.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고통이 곧 인간 모두의 고통이므로, 우리 모두가 그러한 고통에 빠지게 한 물질 중심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마음속의 결심만이 아니라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포기하면서도 진실한 삶을 살겠다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떤 솔거의 죽음'은 진실한 삶을 위해서는 왜 목숨을 건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한편으로는 예술가의 자세를 다룬 소설이지만, 동시에 진실한 삶을 위한 우리의 자세를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하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읽어 내려는 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얻어낸 진리를 끝까지 지키려는 용기와 결단이다.
내용처럼 사실에 대한 왜곡, 왜곡된 눈을 통한 사실을 읽어 내는 것을 무엇보다 경계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념 혹은 상식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 결과 동일한 사실을 놓고도 각기 다르게 파악한다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프리즘을 통해서 그 프리즘에 맞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프리즘이 잘못된 것일 경우,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는 권력자들은 새롭게 찾아낸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비웃거나 억누르려고 한다. 그래서 새로운 진리를 찾아나서는 사람들은 항시 세상으로부터 박해받고, 비웃음을 당하는 힘든 생활을 한다. 힘겨움 속에서도 진실을 향한 용기와 결단을 행할때 진실이 밝혀진다.
"악법도 법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생사를 건 싸움" 끝에야 진실한 삶이 가능하다고 성인들은 말한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이 진실한 삶이라는 것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조정래는 개인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가치관이 우리 역사의 불행을 초래했다고 믿으며, 동시에 진실하게 살려는 용기와 결단의 부족이 그러한 타락한 가치관을 계속 유지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즉 바로 우리의 삶, 그것도 자신만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삶이 우리의 불행한 역사를 지속시켰으며, 사실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이 우리 나라를 침략했던 저 악마와도 같은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반성케 한다는 점, 위대한 소설만이 지닐 수 있는 품격을 지니고 있으며, 조정래가 위대한 작가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누군가가 진정으로 진실한 삶을 살고 싶다면 조정래의 소설을 권하고 싶다. 그 안에 진실한 삶을 위해서 갖추어야 할 자세는 물론, 끈질긴 성찰 끝에 얻어진 소중한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류보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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