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27일은 우리들이 결혼한지 55년이 된 날이었다
그리고는 남편이 미국 RPI에 입학이 되서 우리는 미국으로 이사를 왔다.
공부가 끝나고 남편은 McGraw-Edison에서, 나는 Westinghouse에 근무 했었다.
그리고 1990년 남편이 ABB로 옮길때 남편을 고용했던 상관이 나까지 고용해 주어서
우리는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했었다.
1990년 그때는 요즈음 같이 화상통화가 없어서 유럽회사인 ABB에서 회의가 있을때는
비행기를 타고 스웨덴, 독일등에 가야했었다.
그리고 초기에는 1등석으로 예약을 해 줬었는데
나중에는 비즈니스석으로 예약을 해 줬다.
남편은 ABB에 다니면서 University of Chicago에서 MBA과정을 이수 했는데
직장에 다니면서 공부하려니 너무 힘이 든다고...
그래서 하루는 나한테 "내가 박사학위 했는데.. MBA를 뭐하러 하나! 그만둘까?"
하고 물었는데... 나는 그냥 별 생각없이 "기왕 시작한것 그만두지마" 했었다.
결국 남편은 MBA를 했는데.. 이때 공부한것이 훗날 남편한테 큰 도움이 된것 같다.
ABB에서 7년인가 근무했을때 남편한테 뉴욕주 북쪽 도시에 있는 Lapp Insulator에서
Job Offer가 왔었다.
ABB같이 큰 회사, 세계적인 회사에 우리둘의 직장을 그만두고 뉴욕주 시골에 이름없는 작은 회사에 취직한다는것...
남편은 망설이며 나한테도 어떻게 하면 좋으냐 물었는데.. 나도 답을 몰랐었다.
남편은 "No Risk is No Gain 모험을 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하면서 회사를 옮겼다.
남편따라 나도 회사를 그만두고 이사를 와 나는 Xerox에 취직을 했다.
얼마후 한국전력에서 연구소를 6개 세운다고.. 그래서 6명 연구소장이 필요하고
또 연구소장을 총괄하는 원장을 뽑는다고 했다.
남편은 열심히 밤을 새워가며 연구에 대한 비젼을 써서 서류를 만들어 원장직에 apply를 해서
마지막 단계까지 가서 남편과 다른사람, 2명이 경합을 했었는데,
어느날 더이상의 원장의 경합을 하지 않는다는 연락이 왔었다.
아마도 그때 연구소들을 세우는 계획이 취소된것 같다.
그때 6명의 소장들은 이미 임명을 받고 한국에 와서 임시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연구소가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다.
서울공대 졸업하고 RPI 박사학위하고 직장에 다니던 ㅈ박사도
6명중 한명의 연구소장으로 한국에 부임됬었는데, 연구소가 취소되는 바람에
한전하고 싸우고, 돈받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고
연구소장으로 부임하셨던 또 다른 한분은 한국에 한 대학에 교수로 들어가셨다 한다.
남편이 LAPP에서 일할때 한 한국회사의 사장이 2만딸러를 줄테니 Consulting을 해달라 해서 한국 갔었는데
그때 그사장이 남편을 회장님께 소개해줘 만나뵐 기회가 있었다 한다.
회장님은 중공업 비즈니스에 대해 10가지 질문을 남편한테 하셨다 하는데
남편같이 명확한 대답들을 속시원히 대답한 사람은 처음이라고
"당신같은 사람이 우리회사 사장으로 와야 한다"면서 한 계열회사 사장으로 와 달라고 하셨었다 한다.
회장님은 그때 그 사장을 내 보내고 남편을 사장으로 앉히고 싶어 하셨던것 같다.
볼일을 끝내고 그 회사를 떠날때 남편을 초청했던 그 사장은 "고박사님이 2만딸러를 사양하셨다"
이렇게 말하면서 돈을 주지 않더라고... 계약서를 쓰고 간것도 아니니.. 남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어느날 그사장이 다른사람과 같이 우리집에 왔었다.
그리고 남편한테 자기는 젊을때 부터 그회사를 위해 밑바닥 부터 일해서 사장까지 올라갔다고....
사장자리를 거절해 달라고 애원도 하고
또 회장이 초청했어도 남편같은 낙하산은 회장단에서 결국 왕따를 당하고 붙어나기 힘들 것이라고..
겁도 주었다 한다.
남편은 한 겨울 그 두사람을 우리집에서 묵게하고 식사를 대접했다.
그리고 그 이틑날 남편은 그분들을 그 겨울 꽝꽝얼은 나이아가라 폭포에 왕복 4시간을 운전해서 데리고 가
구경도 시켜주었다. (그때 나이아가라에서 찍은 그분들의 사진이 집에 있다)
결국 마음씨 착한 남편은 사장제의를 거절했는데 나는 그게 두고두고 너무 속상했다.
남편은 그렇게 남과 다른 독특한 성격이 있다. 결혼전에는 그런성격이 매력적이라 느껴졌었는데...
막상 남편의 어머니이신 시어머니조차도 그런 아들을 이해를 못 하셨다.
남편이 LAPP에서 몇년 근무하고 있을때
남편은 또 다른회사에서 아주 좋은 조건으로 Job Offer를 받았었다.
남편이 회사에 사표를 냈을때
남편의 직속상관이 남편한테 그만두지 말아달라고...
회사에 계속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의리의 남편은 상관이 말리는 대로 좋은 조건의 회사를 포기 했다.
그리고 얼마후 회사에서 남편의 상사를 포함한 3사람이 남편이 속해있는 부서를
모계회사에서 사서 새로 작은 회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부사장직을 주고 회사의 지분도 조금 주어 남편은 회사오너의 한사람이 됐다.
새회사는 이익창출이 잘 되어 이때부터 남편은 매해 보너스를 받았고,
우리는 저축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는 모게지를 얻어 집을 사고
두 아들들을 MIT와 Harvard등 사립학교에 보내느라 저축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몇년후 큰 회사인 Hubbell이 PCore를 인수해 샀는데, 그래서 남편은 자동적으로 그회사 직원이 됐고
또 Pcore가 팔렸기 때문에 남편도 Pcore의 한 오너니까 지분으로 목돈도 받았다.
남편은 외유내강 [外柔內剛] 이 아닌 외강내유 [外剛內柔] 다.
결혼전에는 남편이 아주 강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살면서 보니까 속은 아주 여린사람이다.
그래서 누구와 이해관계로 다툴 일이 있으면 얼른 양보하고 피한다.
남편은 또 아주 수줍은 사람이다
남편은 목소리가 좋고 노래를 아주 잘 해서
한때는 음대로 전과를 할 까 생각했었다 한다.
남편은 집에서 노래를 많이 부르고
얼마전에는 이곳 이스트만 음대 교수한테 성악레슨도 받았었다.
노래를 잘 하니 사람들 모였을때 들려주면 좋으련만, 절대 하지 않았다.
남편이 교회를 잘 다녀, 교회에서 성가대를 했었으면 좋았으련만,
이제 늙고 생각하니 참 아쉽다
첫댓글 청이 님께서는 중년 시절에도 아주 어려 보이는군요
83년 석사 학위를 받을 때도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로 동안이시고
청년이 된 아들과 찍은 사진도 젊게 보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건 웨스팅하우스 근무했다는 것만 기억납니다
저보다 4년 먼저 결혼하셔서 올해 55주년이 되셨군요
축하 드립니다
저희도 작년에 50주년이라고 큰며느리가 주축이 되어 가족 파티를 했어요
아이들이 어려서 호텔 뷔페나 식당은 소란스러울까 봐 작은 파티를 할 수 있는 룸을 예약해서
코스 음식을 시키고, 아이들 노래와 재롱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어요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젊어서는 몰랐는데
나이 들으니 한국이 그립고 부모 생일 챙기는둥
한국의 정서가 부럽습니다
그래도 우리 둘이 함께 있어서 외식이라도 하며
서로 축하 할 수 있는것만도 다행이지요
청이님 결혼 55주년되신것 축하드립니다.
제가 여고졸업하던 해에 결혼하셨군요.
늘 지혜로우시고 현명하신 청이님과 청이님 남편분꼐서
서로 잘맞으시니 그렇게 오래 해로하신 것이지요.
아드님들도 잘자라서 미국 명문대를 나왔군요.
55년넘도록 행복한 가정을 이루셨으니,
두분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저는 79년 12월에 결혼했으니 46번째네요.)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되돌아 보면 55년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갔나 싶습니다.
그래도 우리 둘이 같이 있는것만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Wishing you the wonderful 55th wedding anniversary to you and Dr
Ko. We are currently in Londerry and enjoying lovely dinner. Thank you so much for showing us how a couple can enjoy a long and fruitful relationship.
여행중 바쁘실텐데 이렇게 들러주시고
또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55년후 지금도 남편과 함께할 수 있는게 감사하지요
즐거운 여행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