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인터뷰>-임철우 소설가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을 위하여
박 설 희
역사 속에서 거대한 폭력에 의해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줄곧 써온 임철우 소설가. 그의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작가를 상상하며 음울하고 지친 얼굴을 떠올리기 쉽다. 그가 이제껏 써온 광주나 6.25를 배경으로 한 소설 속 인물들이 그런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만나보면 의외로 그에게는 장난기 가득한 소년 같은 이미지가 있다.
「이별하는 골짜기」, 「백년여관」 등을 읽으면서 고통스러웠는데 읽는 사람이 이렇게 고통스러우면 쓰는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생각했어요.
- 혹시 재미가 없어서 고통스러운 건 아니구요?(웃음) 본래 내가 사람의 고통 같은 것에 민감하지요. 삶이란 게 힘들고 외롭고 허기지고, 그게 문학뿐 아니라 삶을 보는 프레임이 된 거겠죠. 휴전 이후에 태어났는데도 전쟁을 직접 겪은 것처럼 느껴져요. 고향이 워낙 피해가 큰 곳인데다가 라디오도 전기도 없는 고립돼 있는 곳에서 당사자들로부터 온갖 일들을 유년시절에 수없이 듣고 자랐지요. 어린애의 상상력에 마치 현실처럼 느껴졌어요. 처음 문단에 나왔을 때 「아버지의 땅」을 보고 사람들이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닌데 어떻게 6.25 얘기를 쓰느냐고 이상하게 생각하더군요. 실은 그 상처나 흔적들이 바로 우리 얘기고 집안 얘기였어요. 5.18은 내가 직접 광주에 살면서 겪은 일이니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 이야기일 수밖에 없지요. 가장 직접적인, 가까운 체험들을 소설화하려는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이 쓰게 하는 것이지 뭘 의도하고 쓰는 건 아니에요. 내가 겪어온 것이고 통과해왔기 때문에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인 거지요.
선생님은 5.18 때 광주에 계셨는데 도종환 시인은 광주 인근 군부대에 계셨다고 하더라고요.
- 운이 나빴으면 나도 군인이었겠지요. 친형도 광주 31사단 의무장교였고 계엄군이었지요. 친구들도 군대에 있었고. 계엄군 시민군, 결국 우리에요. 용서할 수 없는 게, 의무제인데 다 불려나가서 총을 쥐고 침략군이나 적군이 아니라 바로 네 가족을 네가 쏘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정말 잘 잊어버려요. 적과 아, 계엄군과 시민군, 결코 그렇게 간단히 나누어질 수 없는 문제인데도…….
글 쓰시면서 치유가 되셨나요?
- 치유를 받는다면 내가 아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받아야지요. 나는 문학청년 시절에 그저 혼자 좋아서 썼고, 달리 누구한테 보여준 적도 없어요. 시골 중고등학교 문예반 선생하면서 소설과 시를 읽으면서 신춘문예에도 가끔씩 내보는, 그런 삶을 생각해보긴 했어요. 그런데 5.18을 겪으면서 내가 보고 듣고 겪은 것을, 살아 있는데 뭔가를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소설이었어요. 그래서 소설을 써서 신춘문예에 처음 응모했는데 당선된 겁니다. 5.18 나고 6개월 후에. 운명 같기도 하고. 그렇게 5.18 때문에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도 하게 됐고 결국 소설가가 된 거에요. 『봄날』을 끝내고 났을 때 이젠 당장 죽어도 억울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누가 뭐라고 하건 이 소설로 내 존재에 대한 증명이랄까. 내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고 스스로 믿고 싶었지요. 적어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요즘 작가들이 유희적인 작품들을 많이 쓰고 있는데 그런 작품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 이 시대의 글이 달라졌다면 작가만 달라진 게 아니겠지요. 그야말로 삶의 전체 판이 엄청나게 달라진 겁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 달라진 판 위에 올라서 있는 채로, 보다 의미를 갖는 것, 보다 항구적인 것, 우리 삶의 핵심과 맞닿아 있는 문제들을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문학을 통해서 삶의 큰 얼개랄까, 생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랄까 윤곽의 밑그림이라도 그려내 보겠다는 자세가 최소한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요즘 우리 문창과 학생들을 보면 문장이라든가 장면을 잡아내는 아이디어는 뛰어납니다. 문제는 현실과 자기 삶에서 어떤 의미를 탐색해낼 수 있는 안목이나 노력이 예전에 비해 눈에 띄게 빈약해 보인다는 점이지요. 재치와 반짝이는 상상력은 있는데, 다분히 개인적인, 즉 감각적이고 미니멀한 이미지와 스토리에 머무르고 마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세밀하고 미니멀하다는 게 결코 약점은 아니지만, 생에 대한 밑그림이라는 전체가 있고, 아울러 부분을 미세하게 세밀하게 더듬어낼 수 있을 때 그것이 더 가치 있는 게 아닐까. 전체는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부분만 천착해내다보면, 결국 삶도 문학도 파편화되고 말겠지요.
무당이 소설에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것 같아요.
- 오래전부터 나름대로 환상적 리얼리즘이니 마술적 리얼리즘이니 하는 것들에 관심이 있어요. 건조하고 명확한 현실을 약간 비틀어서 바라보고 싶다고나 할까, 비유하자면 뭔가 낯설고 기이한 렌즈로 바라보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이지요. 무속은 우리 토착적인 세계관이잖아요. 어렸을 때 우리 고향엔 작은 마을이라도 단골이 대개는 한 사람씩 있었어요. 당연히 저는 샤머니즘이 꽤나 친숙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종교라기보다는 일상의 한 부분처럼 보일 정도로요. 샤머니즘은 세계나 삶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형식이 대단히 시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이란 주제는 시적인 상상력이 없으면 아마 풀어내기가 불가능할 거예요. 나 어릴 때 할머니가 생일날 장독대에 물 떠다놓고, 아침마다 부뚜막에 맑은 물 떠다놓고 뭐라고 비시고 그랬어요. 무속적 세계관, 그러니까 우리 토착적 세계관에 의하면 생과 사, 현재와 과거는 한데 뒤섞여 존재합니다. 우리는 한 집에서 매일 산자들과 죽은 자들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셈이지요. 무슨 괴기공포영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저는 그것을 인간의 ‘기억’이라는 영역으로 이해합니다. 인간의 기억, 즉 ‘이야기’ 속에서 현재와 과거, 산자와 죽은 자는 함께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등단작 「개도둑」도, 최근작「이별하는 골짜기」도 역무원이 주인공인데 어떤 인연이 있으신지요?
- 섬에서 광주에 온 게 열한 살 때인데 자동차, 전기 등 모든 것이 놀라웠지만 제일 신기한 게 기차였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이사 간 집이 철길 바로 옆이었지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첫 가출을 했는데, 추위를 피해 찾아든 곳이 기차역이었지요. 역 대합실은 언제나 열려 있고 따뜻하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까요. 기차를 타고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물론 몰래 무임승차로요. 당연하게 기차에 대한 사연도 많고 기억도 많습니다. 역이라는 거 자체가 시적이고 드라마틱하잖습니까.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고 계속 왔다가 떠나고,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조차도 뭔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곳. 그게 기차역이지요.
또 하나 내 소설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게 눈인데, 저도 뒤에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지요. 내가 도시로 와서 제일 황홀해했던 대상이 눈하고 기차에요. 왜냐면 우리 섬은 따뜻해서 눈이 안 오고, 와도 허공에서 다 녹아버려요. 그러니까 쌓여 있는 눈을 거의 못 봤지요. 그런데 광주에 오니까 엄청나게 눈이 많이 오는 겁니다.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웠겠습니까. 그래서 은연중에 눈과 기차가 자꾸 등장하나봅니다. .
작품 쓰시면서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소개해주세요.
- 82년에 대학원 진학하느라 서울에 왔는데 광주 사람이고 전남대 출신이고, 5.18 항쟁 후 일 년 반밖에 안됐으니까 ,주변에서 모두들 나한테 관심을 보이더군요. 그때만 해도 광주는 여전히 유언비어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그 연민과 호기심과 의심에 찬 시선들 앞에선 그냥 가슴만 터질 것 같더군요. 말로 그걸 어찌 전달합니까.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고 눈앞에 보이는 게 없는, 딱 그대로 몇 달을 버텼지요. 정말이지 아예 미친놈이 되기 직전까지 갈 지경이었는데, 그때 시를 닥치는 대로 외우기 시작했어요. 백편을 외우겠다는 목표로, 밤낮으로 중얼거리고 다녔지요. 시를 외우노라면 눈물이 줄줄 흐르고 목울음이 꺽꺽 터져 나와요. 그렇게 해서, 시 덕분에 그 위기를 어떻게 버텨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가장 많이 외웠던 시가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였어요. 특별할 수밖에 없는 게, 같은 전남대를 다녔고 5.18을 같이 맞았고 같은 해에 등단을 했고, 또 그땐 이미 친구 사이였으니까.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 첫 행에 담긴 그 말 못할 슬픔과 아픔과 절망감, 적어도 그 즈음의 내게 그건 그냥 시가 아닌, 어떤 거대한 울림 같았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밤, 내가 살던 와우아파트 옥상에 올라갔는데 밑에 마포 시가지가 보여요. 무수한 불빛들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그대로 내려와서 쓰기 시작한 게 「사평역」이예요. 단 며칠 만에, 뭣에 홀린 듯이 줄줄 써서 완성했지요. 거의 수정도 퇴고도 할 필요가 없이 말입니다. 그 동안 수없이 그 시를 외우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소설이 내 안에서 만들어져 있었던 거지요. 모든 소설을 그렇게 줄줄, 노래가 흘러나오듯이 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지요.
선생님께 소설이란 뭔가요?
- 소설가란 어딘가 무당의 역할과도 닮은 것 같습니다. 아픔과 고통, 한과 슬픔을 안은 사람들, 아직 살아있거나 이미 지상에 없는 그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육성과 이야기를 세상에 전해주는 게 소설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전 선생님 작품 중에 『백년여관』이 참 상징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일단 여관이름이 ‘백년’이고 거기에 광주, 4.3, 6.25, 월남전까지 우리현대사의 폭력 잔혹사들로 인해 상처 입고 희생된 사람들을 다 불러내서 그 원혼들을 풀어주는 작품이잖아요. 다른 작품들보다 선생님의 육성이 직접 들리는 것 같았어요.
- 사실 저로서는 가장 아끼는 작품이에요. 『봄날』 쓰고 나서 나는 이제 소설 못 써도 좋겠다,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뭔가가 아직도 미진했어요. 그래서 쓴 게 바로 「백년여관」이에요. 그걸 쓰고 나니까 가슴에 마지막 남아 있던 어떤 덩어리 같은 게 그나마 가라앉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봄날」에서 「백년여관」까지, 내 모든 것을 다 쏟아 넣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지금까지 망각과 기억의 문제를 가지고 작품들을 써왔는데 다음 작품은 어떤가요?
- 내년 1월에 책이 나올 겁니다. 제목은 <황천기담>. 강원도 가상의 폐금광을 무대로 한 작품인데, 8년 정도 사이를 두고 띄엄띄엄 써온 중편 연작입니다. 환상적인 요소들, 설화적 모티프를 가지고 조금은 자유롭게 써보려고 했어요.
만추의 한신대 교정을 걸어 나오면서 ‘폭력의 운용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결국 문학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는 까닭을.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