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발달로 오랫동안 믿어오던 신(神)의 섭리가 사라지고 인간의 의지가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신이 사라졌다고 혼돈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인본주의가 등장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인본주의에서 얻은 힌트를 바탕으로 성경과 불경을 재해석하면서 여전히 신에 의지합니다. 하지만 나를, 또는 우리를 더 크게 움직이는 의미와 권위의 원천은 이제 하늘이 아니고 인간의 감정이 되었습니다. 예컨대 성경책을 들고 게이 행진을 저주하는 행동은 무모해졌습니다. 반면, 교육 도시, 또는 관광지라는 의미를 내세우면 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게이 행진을 저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본주의의 주류는 자유주의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 때 경쟁자였던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와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조연급, 또는 엑스트라 정도로 지위가 낮아졌습니다.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을 믿습니다. 개인은 진정한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아는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집니다. 하지만 최근의 생명과학은 단일한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은 고유한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생화학적 알고리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은 우뇌가 활성화된 상황에서는 ‘사랑’이라는 여자를 선택했다가 좌뇌가 활성화된 상황에서는 ‘현실’이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여자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선택할 여자가 하나밖에 없으면 사랑이든 현실이든 받아들이고 이를 자아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것 또한 개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줏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천길 물속 같기도 한 개인을 도와주고자 외부 알고리즘이란 게 등장했습니다. 외부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방대한 데이터를 스스로 분석해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는 지 알려줍니다. 심지어 선택권까지 행사합니다. 고속도로에서 쏠림 현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똑같은 내비게이션을 쓰는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경로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데이터가 많아지고 데이터 간 연결성이 강화되면서 알고리즘은 조만간 인간의 자연지능을 크게 추월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 것입니다. 인본주의란 것도 크게 보면 위정자나 자본가가 군인이나 노동자 등의 생산자로 써 먹기 위해 만든 개념인데, 인공 지능이 더 유능한 군인과 노동자가 될 수 있다면 (물론 인공 지능은 인간에 비해 훨씬 유능한 군인과 노동자, 즉 생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인간은 어떤 쓸모가 남을까요? 그리고 쓸모가 없어진 인간에게 적용되는 인본주의란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인간은 갖고 있지만 인공지능은 가지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는 거의 유일한 것은 바로 의식(意識)인데, 과연 인공지능은 영원히 의식을 갖지 못하게 될까요? 설령 의식을 가지지 못한다고 해도 인간 중심의 세계를 밀어내고 자신 중심의 세계로 바꾸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10월 14일(토) 오후 4시에 “임영근이 안내하는 책모임”에서 이런 얘기를 토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가는 자유의지에 맡기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자유의지를 믿습니다만, 참가비는 무료입니다.
첫댓글 권력(이제는 자본)이 인간을 종속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종교, 인본주의 혹은 인공지능이라는 매개체로 갈아타는 것이
DNA가 인간을 숙주로 그 영속성을 유지하려는 현상과 오버랩 됩니다.
깔끔한 정리 감사드려요^^
그런 통찰도 있겠네요! ㅋㅋㅋ
한편으로(무리한 가정이지만) 나를 내려 놓을 수 있다면 그것도 자본, 또는 DNA의 손바닥 안에서 노는 행동일까?
자유의지에 대한 미련, 혹은 집착을 버리기 힘드네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