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72)
◇ 아씨와 도둑
도둑이 들어닥치자
별당 아씨는 방에 있던 패물을 그 앞에 내놓는데…
적막강산에 찬바람만 세차게 부는 깊은 밤, 앙상한 감나무 가지 끝에 걸린 그믐달이 움찔하더니 검은 그림자가 휙 스친다.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한 도둑이 대궐 같은 표 대감 집 담 곁의 감나무 가지를 잡고 월담을 한 것이다.
도둑은 잽싼 몸놀림으로 별당 옆 연못에 숨어들었다. 물 빠진 연못 바닥은 흙먼지가 폴폴거리고 연잎도 말라비틀어졌지만 사람 몸을 숨기기엔 부족함이 없다. 도둑이 엎드려 숨은 바로 그 앞에 치마를 걷어 올린 희멀건 엉덩이가 쏴~ 소피를 본다.
바로 그때, 안채 쪽에서 컹컹 삽살개 짖는 소리가 났다. 도둑은 소피를 보는 여인의 뒤로 접근해 시퍼런 칼날을 목에 들이댔다. “하악!” 여인은 너무 놀라 들이쉰 숨을 내뱉지 못했다. 곧이어 하인들이 손에 횃불과 장도를 들고 개를 앞세워 연못으로 들이닥쳤다. 여인이 벌떡 일어서 치마를 내리며 “이놈들, 무엇 하는 짓이냐!” 호통하자 하인들은 “아, 아, 아닙니다” 하며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개줄을 당기며 돌아섰다. 여인은 연못 옆 별당으로 들어갔다. 검은 도둑도 치마폭에 싸여 함께 들어갔다.
“아주 무례한 도둑이구나.”
별당 아씨는 손가락의 옥반지와 장롱 속의 금비녀를 꺼내 비단 보자기에 싸서 도둑 앞에 놓았다.
“이걸 들고 얼른 달아나거라.”
도둑은 보자기를 아씨 치마 위에 던지며 나지막하나 방이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도둑으로 봤다면 한참 잘못 본 것이다. 나는 천하의 악인 표 대감의 목을 베러 왔다.”
“무슨 철천지원수이길래….”
“표 대감은 살부지수(殺父之讐),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다. 너는 누구냐? 표 대감 딸이냐?”
“아니요, 며느리요.”
별당 아씨는 더 이상 하대를 하지 않았다.
그 시간, 사랑채에서 며느리보다 어린 첩실을 끼고 자던 표 대감이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집 안을 샅샅이 뒤져도 도둑이 없다면서 삽살개는 왜 저리 짖는고?”
“요즘 고양이들이….”
“입 닥쳐! 별당은? 며늘애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면?”
하인들이 우루루 몰려가 별당을 에워쌌다. 밖에서 행랑아범이 “아씨” 하고 부르자 별당 아씨도 짐작했다. 아씨는 고쟁이 바람에 장옷을 걸친 채 방문을 열고 처마 끝까지 나와 “도대체 무슨 일이냐?” 하고 짜증스럽게 말했다. 만약 도둑이 등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다면 아씨로서는 마루에서 팔짝 뛰어내리며 “도둑이야” 고함칠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하인들은 그냥 돌아갔다. 아씨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도둑도 복면을 벗고 정중히 말했다. “부인, 고맙소이다.”
표 대감과 이 초시는 서당 친구였다. 한양에서 벼슬하던 표 대감이 십여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옛 친구 이 초시 집을 찾았다. 이 초시 부인의 미색에 정신을 잃은 표 대감은 며칠 후 사또를 찾아갔다. 부자이면서도 뇌물을 바치지 않는 이 초시는 이미 사또 눈 밖에 나 있던 터였다. 사또가 갖은 모함을 씌워 곤장질하고 옥에 가두니 그해 겨울 이 초시는 옥사했다. 부인은 목을 맸다. 다섯살 이 초시 아들은 삼촌이 업고 도망갔다. 표 대감을 죽이려고 온 이 젊은 남자가 이 초시의 아들이다.
표 대감을 빼쏜 개차반 아들은 결혼 후에도 색줏집을 돌아다니다 복상사하고, 아씨는 청상과부가 되어 이 별당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락 껴안았다.
“살부지수를 죽이지 마십시오. 그의 고통이 끝납니다.”
이 초시 아들은 동이 트기 전에 별당에서 나와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사흘 후 별당 아씨는 표 대감 방 다락에서 금붙이 은붙이를 챙겨 나와 나루터에서 이 초시 아들을 만나선 어디론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