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제는 한국 고대사 최대의 쟁점 중에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많은 글들이 인터넷 역사카페에 글이 올라오고 있다.
심지어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식민사학자와 민족주의사학자를 나누는 구분이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나 역시 한사군 문제에 대해서는 대학교 3학년때 이미 주가 220개나 달린 장편 논문을 쓴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의 광기였다고 하겠다. 한사군 문제에 대해 나 역시 이렇게 탐구해본 적이 있던 것은 기록에 따라 얼마든지 재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인과 중국인에 의해 한사군이 엄청나게 잘못 연구되어 왔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들의 연구가 잘못 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한사군을 목적의식을 갖고 기록에도 없는 것을 확대해석하고, 이로 인해 한국사를 처음부터 식민지의 역사로 만들려는 저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사학의 발전과정에서 이들이 연구해놓은 문제는 후배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고, 두계 이병도는 한사군 문제에 관해 완결판에 가까운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병도의 설은 지금에 와서는 일부 골수지지자를 제외하고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지금 학계에서 어디까지 한사군 문제가 연구되어 왔으며, 그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 기초가 틀렸다. - 사료 선택의 문제
한사군에 대해 언급된 사료는 사기 조선열전, 한서 조선열전과 지리지.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후한허 군국지와 동이전, 진서 등이 관련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연구자들이 한사군 문제에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사기 조선열전을 무시하고, 가장 시기 상으로 늦은 후한서 등을 1차 사료로 연구하고 있다는데 모든 문제의 시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후한서는 5세기에 범엽이 쓴 책으로 한사군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기원전 108년과는 무려 500년이란 긴 시간적 공백이 있다. 반면 사기는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시점인 108년에 생존해 있었고, 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완성한 시점이 기원전 104~87년 이므로, 한사군에 대해서 어느 역사가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사군 문제의 시원은 사기가 그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수 많은 연구자들이 왜 역사학의 기본인 사료 선택의 문제부터 잘못 시작한 것일까. 그것은 사학계의 가장 큰 고질인 논문 글쓰기의 문제와 연관이 있다. 즉 논문을 씀에 있어서 학설사를 써서 이 연구가 어떻게 진전되어 왔다는 것을 써야 하는데, 그 앞부분은 대부분이 일본인 학자들의 글로 채워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식민사학이란 이름으로 역사를 왜곡한 일본인의 영향이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발휘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한사군이란 것을 하나의 완벽한 실체로 인식하게 만든 일본인의 연구를 고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완벽한 한사군을 염두에 두고 이와 관련된 자료들을 차례로 문헌 비판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저 관련된 모든 자료를 동등하게 해석하려는데서 잘못된 해석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한사군은 처음에는 그 실체가 없던 것이 점차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자꾸 살이 붙는 왜곡의 기록인데 이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그곳에 사군을 두었다고 하고서, 4군의 이름을 획청, 추저, 평주, 기, 온양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군들은 모두 지금의 황하 하류를 중심으로 하북성과 산동성에 비정될 수 있다.
더군다나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것은 한무제가 주변 사이(四夷)를 정복한 위대한 업적(흉노 정벌, 서역 정벌, 남만 정벌, 위만조선 정벌) 가운데 하나인데도 사마천은 사기 조선열전에서 이 전쟁에 관여했던 사신 섭하, 누선장군 양복, 좌장군 순체, 제남태수 공손수 등이 모두 잘못 일을 처리하여 장수로서 제후에 봉해진 사람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획청, 추저 등에 봉해진 제후는 모두 위만조선 출신의 인물이지, 한나라 사람들이 아니다. 사기에는 소위 한사군이라 말해지는 낙랑, 현도 등이 전혀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더욱이 사마천은 획청, 추저 등에 봉해진 조선사람들이 108년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런 그가 만약 조선땅에 봉해진 낙랑군 등이 있었다면 기록을 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한사군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역사연구자의 태도다. 사마천이 의도적으로 한무제의 업적을 숨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2. 한서의 변조
하지만 사마천이 자신이 살던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빠뜨릴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나라의 역사를 기술한 반고의 한서는 1차 사료로서 사기에 못지 않는 자료로 활용할 수가 있다. 2. 한서의 변조
하지만, 사마천이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빠뜨릴 수 있는 부분이 있으므로, 한나라의 역사를 기술한 반고의 한서는 참고할 수가 있다.
그런데 반고의 한서에서는 재미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먼저 한서 조선전은 사기 조선전을 거의 대부분 옮겨 적은 것과 같은데, 특이하게도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4군을 설치하였다. 삼을 봉하여 획청후로 삼고, 도는 추저후로, 협은 평주후로, 장은 기후로 삼았다. 최는 아버지가 죽은데다 자못 공이 있으므로 저양후로 삼았다.”
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가로안에 넣은 4군의 이름은 사기 조선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최가 봉해진 온(溫)양이 저(沮)양으로 기재된 것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드닷없이 4군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진번 등의 사군이 설치된 것이 옳다면 그 군에 임명된 한나라의 관리에 대한 이름이 나와야 하는데, 여전히 뒷 부분은 사기와 같이 위만조선인이 제후에 봉해진 것이 나온다.
누군가 후대에 4군의 이름을 한서에 삽입하는 왜곡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 의문이 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면 한서의 다른 부분에서는 어떤가.
먼저 “엄주오구주부서엄종왕가열전”에 보면 한무제의 업적을 말하면서 ‘동쪽은 갈석을 지나 현도와 낙랑으로 군을 삼았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오직 현도와 낙랑군만이 등장한다.
다음 “지리지”에 보면 ‘현도군이 유주에 속하면 호는 45006호, 구(口)는 221845, 현은 3개로 고구려, 상은대, 서개마가 있고, 낙랑군 역시 유주에 속하며 호는 62812, 구는 406748, 현은 25개로 조선, 패수 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진번, 임둔은 아예 기록에 없다.
다음 “천문지”에도 ‘그후 한나라 군대가 조선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고서 낙랑과 현도군으로 삼았다’고 하여 2군의 명칭만이 전한다.
다음 “오행지”에는 원봉6년(105년)조에 앞서 양장군이 조선을 정벌하였는데 3군을 개척했다 고 기술하고 있다. 3군이라면 무엇인가. 4군이나 2군도 아니고, 뭔가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제본기”에 원봉3년(108년) ‘여름 조선이 멸망하다. 그 왕 우거가 항복하므로 그 땅을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마저 조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마천이 죽은 후 또는 그가 사기의 집필을 완성한 후 어느 시점에선가 조선을 멸망시킨 후 4군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한나라때에 이미 만들어졌다는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록에 따라 2군, 3군, 4군이 된 것은 조선지역의 지배에 4군이 한번에 다 설치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무엇보다 지리지에 낙랑과 현도 2군만이 있고, 임둔, 진번에 대해서 전혀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이들 군들이 아예 설치되지 않고 계획으로 설치만 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임둔과 진번군에 관해서는 다음 두가지 자료가 전한다.
하나는 후한서 예(濊)전에 나오는 소제 시원 오년(기원전 82년) 에 임둔과 진번을 페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는 기록이다. 이병도는 임둔이 현도에 진번이 낙랑에 합했다고 보는 등 이 기록을 금과옥조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후한서는 5세기에 만들어진 기록으로 무려 500년의 시차가 있는 기록이다. 또 임둔과 진번군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예전에서 마치 과거의 역사를 끼워맞추기 위해 넣은 부정확한 기록일 뿐이다. 사기와 한서, 동한관기 등 어떤 책에도 기원전 82년에 임둔과 진번군이 폐지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임둔 진번군을 마치 실존해 있던것처럼 만들기 위한 꿰어 맞춘 허구의 자료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또 하나의 자료는 한서 보주다. 한서의 주는 당나라 안사고에 의해 쓰여지고, 청말의 왕선겸이 한서보주를 집대성했다. 안사고의 주 가운데 앞서 인용한 무제본기에 다음의 주가 있다. ‘신찬왈 : 무릉서에 임둔군의 치소는 동시현이며, 장안에서 6138 리나 떨어져 있고, 15현이 있고, 진번군은 잡현이 치소인데, 장안에서 7640리에 있으며, 15현이 있다.‘
이것이 임둔, 진번군에 관한 모든 사료다. 그런데 한서 주가 인용한 무릉서는 한마디로 위서다. 무릉서의 저자는 사마상여란 인물인데, 그는 기원전 117년에 죽은 인물이다. 그러니 죽은 자가 10년 후의 일을 예견하여 임둔, 진번군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임둔, 진번에 관한 자료들은 모두 허구다. 그럼에도 진번군과 임둔군과 쓴 이병도 선생은 참 소설을 잘 쓰는 분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또 그의 소설을 위대한 연구라며 추켜세웠던 그 분의 제자들도 역사가라고 하기에 부끄러운 사람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이병도선생이 지닌 권위 때문에 제자들이 쉽게 말을 못했을 뿐이지, 그들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지금은 임둔, 진번군에 대해서는 한나라가 설치할 계획만 있었을 뿐, 실제로는 설치되지도 못한 허구의 군이라고 학계에서 이해하고 있다. (참고: 한국사2-한길사 간행, 1994년. pp 264-270에 실린 ‘대외관계사에서 본 낙랑군의 성격’ - 서영수 단국대 교수님의 글)
그렇다면 임둔, 진번군의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임둔과 진번이 위만조선 옆에 있던 작은 소국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사기 조선열전에 보면 위만이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진번과 임둔을 한서에서는 한나라의 군현의 이름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위만조선의 땅 가운데 옛 진번과 임둔국의 땅에다 한나라가 군현을 설치하려고 계획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나는 그 보다는 다른 각도에서 한사군이란 이름이 탄생한 것으로 본다.
한사군은 처음에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 아니라, 획청, 추저, 기, 온양, 평주을 의미한다고 본다.
- 계속 -
사마천이 말한 한사군의 실체
한사군 문제의 가장 근원이 되는 사기의 문장을 다시 보자.
<元封>三年夏, ....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參>爲<澅淸侯>, <陰>爲<荻苴侯>, <唊>爲<平州侯>, <長[降]>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溫陽侯>
“성기를 죽이고,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설치하였다. 삼을 봉하여 획청후 삼고... ꡓ
이 문장에서 사군으로 삼았다고 하고서 그 다음에 획청, 추저, 평주, 기, 온양이 그대로 나온 점을 미루어 사군은 뒷 문장을 받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한나라의 지방 제도는 군국제였기 때문에 군에 제후가 봉해지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므로, 획청 등이 군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사기 조선열전에 의거하여 전쟁 상황을 보자.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제(산동반도)에서 출발한 109년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이 7천명, 요동에서 출격한 좌장군 순체가 5만명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그런데 좌장군의 부하인 다(多)는 선발대로 출진했으나, 크게 패배하여 한나라에서는 그를 참수해 버렸다. 또 누선장군 양복은 왕검성에 이르렀다가 위만조선의 군대가 성을 나와 공격하자 크게 패배해서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모아 다시 군을 정비할 수 있었다.
또한 좌장군 순체는 위만조선의 패수서군을 공격했으나, 깨드리고 전진할 수 없었다.
결국 한나라는 사신 위산을 보냈는데, 위만조선의 우거왕은 이에 답례로 태자를 보내어 한나라에 가게 했다. 이때 태자 주변에는 1만명이 무기를 지니고 한나라 좌장군과 같이 갔다. 그런데 이들이 패수를 건너려고 하자, 한나라 좌장군이 무리를 버리라고 하자 태자가 의심하고 한나라로 가지 않고 되돌아가는 바람에 양국의 화의는 깨졌다. 위산은 이로 말미암에 한나라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러자 좌장군이 패수상군을 격파하고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했고, 누선장군도 성의 남족에 주둔했다. 그러나 몇 달이 되어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자 한나라는 다시 제남태수 공손수를 파견하여 전쟁 상황을 조정하게 하였다. 공손수는 좌장군과 누선장군의 불화가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고, 누선장군을 체포하고 군사를 합했는데, 이 일을 보고받은 한무제가 도리어 공손수를 죽여버렸다.
이렇게 지지부진한 한나라는 좌장군 지위하에 왕검성을 계속 공격했는데, 마침내 위만조선 내부에서 로인, 한음, 삼, 왕협 4사람이 모의하여 한나라에 항복했는데, 로인이 도중에 죽었다.
108년 여름에 삼이 사람을 시켜 우거를 죽이고 항복했으나, 왕검성이 함락되지 않았는데, 우거의 대신 성기가 계속 저항했기 때문이다. 좌장군 순체는 우거의 아들 장(항)과 로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기를 죽이도록 한 후에야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설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좌장군 순체는 기시(시장에 내다버려 죽임을 당하는 형벌되었고, 누선장군 양복은 서인으로 되었고, 제남태수는 공손수와 사신 위산은 죽임을 당했고, 최초의 사신 섭하는 위만조선이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했던 것이니, 장수로서 제후에 임명된 사람이 없었다.
위 기록을 보면 위만조선은 적어도 수만명의 군대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태자가 단지 한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될 때 1만명이 동원되었으며, 패수서군, 패수상군, 왕검성 방위군 등 군의 조직이 다양한 점이나, 5만 7천명 + & 의 한나라 군대가 약 1년 동안이나 왕검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도 결국은 위만조선의 힘이 매우 강력했음을 뜻한다.
조선열전에서는 당시 위만조선의 영역이 사방 수천리나 되었으며, 주변 소읍과 진번, 임둔 등도 복속하고,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한나라와 교역하는 것을 방해할 정도로 힘이 강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한서』권 73 위현전에는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하여 현도와 낙랑을 일으키니, 흉노의 왼쪽 팔을 잘랐다’는 기록이 있다. 위만조선이 흉노의 왼팔(흉노좌비)란 표현은 위만조선이 흉노와 함께 한나라에 심각한 위협이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심각한 위협이었다는 것은 『사기』「율서(律書)」에 효문제 즉위(기원전 179년)시에 장군 진무 등이 남월과 조선을 공격하자는 건의가 기록된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이때 한나라는 자체 수습이 바쁜 탓에 실제로 위만조선을 공격하지는 못했다. 기원전 166년 흉노가 요동을 제일 심하게 공격했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하는데, 이때 위만조선이 함께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기』「천관서」에는 원광(기원전 134-129), 원수(122-117)시절에 전쟁을 상징하는 치우기가 다시 나타났는데, 이때 조선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서』「곽거병전」에 남으로 남월을 치고, 동으로 조선을 공격하고, 강 및 서남이를 공격하여 오랫도안 호(胡)를 공격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글귀가 있다. 곽거병은 원수년간에 활약했던 인물이므로, 이 시기에 한나라와 조선간의 전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충돌은 창해군 설치와 관련된 문제 등 여러 기록들을 볼 수 있지만, 논증이 복잡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위만조선은 한나라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던 나라이며, 결코 단번에 무너진 나라가 아니다. 또 흉노와 함께 한나라를 괴롭힌 나라였다.
사방 수천리(方數千里)란 표현은 결코 작은 나라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매우 큰 영토와 군사력을 갖고 있고, 정치 조직 등 이미 완연한 국가단계에 접어든 위만조선(이것은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 연맹왕국이나 추장사회가 아니다. 정치발전 속도가 삼한과는 달랐다)은 수도인 왕검성이 붕괴되었다고 해서 곧장 무너질 나라가 아니었다. 전하는 기록은 없지만, 위만조선 내부의 지방세력이 계속 한나라에 저항을 했고, 나름의 부흥운동도 벌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나라를 한나라가 병합하려면 무엇보다 투항한 세력들을 이용해서 지배하는 방법을 쓸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사마천이 한나라 장수들 가운데 제후가 된 자가 없다고 표현한데서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등장한 인물들이 한나라에 투항한 4명의 인물들이다. 로인, 한음, 삼, 왕협이다. 이들이 결국 위만조선의 영토를 분할해서 통치하게 된다. 한음은 추저후, 삼은 획청후, 왕협은 평주후가 되고, 로인이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 최가 온양후에 임명된다. 그리고 위만조선의 왕 우거의 아들 장은 기후에 임명된다.
자. 이들은 이후 어찌되었던 것일까. 『사기』권 20, 「건원이래후자년표-한문제가 즉위한 후에 제후가 된 사람들의 연표」와 『한서』권 17, 「경무소선원성공신표 - 경제, 무제 등의 시대에 공신의 연표」에 따르면
평주 - 협 - 108년 4월 - 107년 협이 죽자, 나라가 사라짐. - 1400호
추저 - 한음 - 108년 4월 - 91년 한도가 죽자, 후계작가 없음 - 540호
획청 - 삼 - 108년 6월 - 99년 조선의 망로(亡虜)를 숨겨둔 죄로 옥에 갇혔다가 병으로 죽음. - 1000호
기 - 장(락) - 107년 3월 - 105년 장이 조선으로 하여금 반란으로 모의하였다가 죽어서 나라가 사라짐.
온양 - 로인의 아들 최 - 107년 3월 - 104년 최가 죽음으로써 나라가 사라짐
이 기록을 보면 108년에 3개가 설치되고, 107년에 평주가 제거된 후, 기와 온양 2개가 다시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107년에는 4개가 존재하며, 동시에 다섯 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4군이 설치되었다는 사기의 기록은 정확한 것이다. 또 한서에 3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108년의 상황을 보고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이 곧 위만조선이 4군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즉 본래 4군은 평주, 추저, 획청, 기 또는 온양이고, 평주가 되거됨으로써 4개로 정해진 것이다. 이것이 곧 사마천이 말한 사군이다.
그런데 이들은 점차 하나씩 제거된다. 평주가 사라진 후, 제거된 기는 모반을 했다는 이유로 사라지고, 온양은 로인의 아들 최가 죽음으로써 사라진다. 최는 젊은 나이였을 것인데 불과 4년만에 죽음을 당한 것은 아무래도 한나라에 의해 인위적으로 제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손이 없어 나라가 제거되었다는 『사기』의 표현이 그것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다음에 제거된 획청은 위만조선이 망한 후 약 10년이 지난 이후인데도 망로(부흥운동가로 본다)를 숨겼다는 이유로 옥에 갇혀서 옥사를 하게 된다. 이것은 위만조선의 부흥운동이 10여년간 지속되어 한나라로서는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할 문제였음을 알 수 있겠다. 더욱이 망로가 획청에 획청에 숨어들었다면 이들 획청은 위만조선의 옛 터에서 그리 멀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지방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평주와 추저, 획청에 속한 호수는 약 3천호로 온양과 기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에게 속한 인구는 대략 3만명 정도로 소국의 규모는 된다. 그렇다면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이들을 통해 한나라는 위만조선의 고지를 지배하려 하였거나, 위만조선의 부흥세력을 분산시켜 나라를 약화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위치다. 『사기정의』(당나라 장수절이 쓴 주석)에는 평주는 양부, 추저는 발해, 획청은 제(齊), 기는 하동, 온양은 남양에 위치한다고 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황하 하류지방이다. 조금 더 넓게 잡는다면 난하 하류까지도 볼 수 있다. 왜 이 지역일까.
이곳이 위만조선의 고토였을까?
왜 사군(四郡)이 이곳에 위치한 것일까?
그러면 낙랑과 현도는 또 무엇인가?
- 계속 -
. 기원전 1세기의 상황
서기 80년경에 완성된 반고의 『한서』는 전한시대의 역사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은 기원전 100년 전후시기까지 서술한 『사기』에 이어 기원전 1세기의 역사를 전하는 일급사료이다.
이 시기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사료로는 기원전 81년에 있었던 소금과 철의 전매제도의 논쟁에 관한 것을 선제시기(bc 73-49)에 환관이 정리하여 집필한 『염철론』이 있다.
이러한 사서들을 토대로 기원전 1세기 동방지역의 상황을 살펴보자.
『삼국지』와 『후한서』, 그리고 그 주석들을 바탕으로 한 한사군에 관한 여러 가지 입론들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역사학의 기본적인 사료선택의 오류의 잘못을 토대로 한 것이므로, 모조리 무시해도 무방하다. 후대인의 왜곡된 기록을 바탕으로 잘못된 역사상이 마치 정설인냥 전해지는 오류는 이제는 학계에서도 점차 자리를 잃고 있다.
문제는 도리어 재야사학이 안고 있다. 한사군을 획청, 추저 등으로 비정한 박시인, 임승국 등은 한반도에서 한사군같은 식민지만 없다는 명분에 치우쳐 후속 연구를 전혀 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도와 낙랑군이 한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도외시하여, 위만조선 이후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말았다.
학계에서도 가급적 중국 군현을 언급하지 않으려고 함에 따라 위만조선 멸망 이후 곧장 신라, 고구려, 백제 건국 시기로 넘어가는 중간시기(bc 108-37)의 역사에 대해 공백상태로 놔두고 있다.
『한서』 「가연(賈捐) 열전」에는 한무제의 업적을 논하면서 동쪽으로 현도와 낙랑을 군으로 만듬으로써 갈석을 지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현도와 낙랑 2개군을 통해 동방지역을 지배하려고 했고, 여기에 기존의 군인 요동을 포함하여 3개군으로 동방사회를 통제하려고 했다. 한나라의 침략에 맞서 이를 저지하려는 위만조선의 유민과 동방지역 토착민(예맥족, 또는 고구려인)의 대결이 이 중간시기의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기원전 105년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의 아들 장이 부흥운동(한나라의 입장에서는 반란)을 모의하다가 실패하여, 죽임을 당했다. 기원전 99년에는 위만조선의 부흥운동가들이 획청후 삼과 연결을 모색하다가 발각되어 획청후가 옥사한 일도 있었다.
『염철론』「지광(地廣)」편에는 “좌장군이 조선을 정벌하고 임조로 가는 길을 열었으나, 연(燕)과 제(齊)는 예맥(濊貊)에게 곤욕을 당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좌장군은 순체를 의미하고 조선은 위만조선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예맥에 의해 연과 제가 곤욕을 당했다는 기록이다. 연은 지금의 하북성에서 요서지역에 이르는 지방이며, 위만조선과 국경을 맞댄 곳이므로, 당연히 곤욕을 치루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산동지역인 제나라가 곤욕을 당했다는 것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갖게 한다.
첫 번째 해석은 위만조선의 부흥운동이 매우 심하여 연과 제 지방에서 많은 군대가 차출되어 부흥군 진압에 동원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 좌장군은 연지방에 속한 요동에서 출격하고, 공손수는 산동지역인 제남지역의 태수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따라서 두 지방에서 군대가 차출되었던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두 번째 해석은 예맥이 연, 제 지방을 직접 공격하였을 가능성이다. 획청, 추저가 연, 제 지방 사이에 존재하는 만큼 이곳까지 위만조선의 부흥운동군이 활동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예맥족이 산발적으로 이곳까지 약탈과 침략을 했을 가능성은 크다.
이러한 해석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당시 지명에 대한 고찰을 명확히 해야 한다. 특히 요동의 위치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를 언급하지 않겠다. 충분한 관련 자료를 갖고 있고, 나름의 지명 비정도 해두었지만 여전히 풀지 못한 의문이 남아있어서 좀 더 공부를 한 연후에 공개적인 논문을 통해 지명비정을 하려고 한다.
어떤 해석을 하든 한나라의 위만조선 고토에 대한 지배는 순조로왔다고 볼 수가 없다.
『한서』「지리지」에 보면 현도군은 한무제 원봉 4년인 기원전 107년에 건립되었다고 하였고, 낙랑군은 108년에 건립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현도군이 호수가 45006호, 인구가 22만 1845호나 되는 거대한 군인데도 불구하고 군 밑에 있는 현의 숫자가 겨우 3개라는 사실이다. 1개 현이 무려 7만명이 넘는 거대한 규모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숫자다. 요동군이 인구 27만 2539명에 현이 18개이며, 낙랑군이 인구 46만 6748인인데 현이 25개인것과 비교하면 현의 인구가 4배에서 5배에 이른다.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현도군의 크기는 초기부터 그렇게 컸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또한 3개의 현의 이름이 고구려, 상은대, 서개마인데, 이것을 통해 학계에서는 현도군이 위만조선의 고토가 아닌 주변 예맥사회에 건립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위만조선이 멸망당했다고 해서 불과 1년만에 주변의 예맥이 한나라의 군현이 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한과 예맥과의 전쟁 기록이 없는데 자발적으로 거대한 인구를 가진 예맥이 한나라의 지배를 받아다고 볼 수는 없다.
도리어 낙랑과 현도군은 초기에 억지로 설립하려고 하였지만,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점차 늦게 성립되어 전한 말이나, 후한시기에 이르러 이처럼 거대한 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지리지」에는 낙랑군은 처음에는 요동에 가서 관리를 데려 왔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낙랑군은 요동군에 의지해서 겨우 실체를 가질 정도의 작은 군에 불과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서』에는 낙랑태수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으며, 오직 설선(薛宣)열전에 그가 성제가 즉위할 무렵(기원전 32년)에 낙랑도위승 이란 벼슬을 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낙랑군이 46만을 다스리는 거대한 군이었다면 낙랑태수도 중요한 관직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열전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누군가는 그 직위를 담당했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직 설선이란 인물만이 낮은 벼슬을 하다가 낙랑을 통제하는 유주의 높은 벼슬아치의 눈에 들어 천거되었다는 기록만이 전하는 것을 보면 낙랑군은 초기에 대단히 미약한 군(郡)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도군에 대해서는 「소제본기」와 「천문지」에는 에 의하면 기원전 75년에 군국의 사람들을 불러내어 요동과 현도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성의 축조가 방어에 있다고 볼 때 현도군에 성을 쌓은 것은 이 무렵에 현도군에 대항하는 토착민의 공격이 거셌음을 알 수 있다.
『한서』「소제본기」에는 기원전 82년 진번군이 담이군과 함께 폐지되었다는 기록이 하나있다. 임둔군은 전혀 언급도 없지만, 진번군 역시 설치되었다는 기록도 없이 폐지되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다. 함께 폐지된 담이군은 한무제가 112년 남월을 정벌하고 만든 군 가운데 하나다. 남월은 20년간 6회의 반란이 있었다고 기록될 만큼 한나라에 저항이 강했다. 위만조선의 경우도 그러했을 것인데, 구체적인 기록이 다만 전해지지 안을 뿐이다.
진번군의 폐지란 기록은 설치 자체도 안된 군을 단순히 폐지한다는 것으로 볼 때 설치하려는 도상계획 자체의 폐지로 보는 것이 옳겠다. 하지만 이 현도군의 성 축조와 함께 이해한다면 이 무렵에 토착사회의 저항이 매우 강렬하게 일어났음을 알 수 잇다.
현도군에는 곽운이란 자가 소제시기(기원전 75년 무렵)에 현도태수를 지낸 일이 열전에 전하고 있고, 백관공경표와 영행전(佞幸傳)에 오록충정이란 자가 기원전 38면에 현도태수에 부임한 사실이 있어 비교적 군현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3개현에 고구려 현까지 통제했다는 것은 여전히 믿을 수가 없다.
나는 현도군에 속한 고구려현은 현도군이 고구려와의 교섭과 대항을 위해 만든 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고구려사회를 지배한 현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본다.
한나라의 요동, 현도, 낙랑군의 침략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예맥사회가 고구려를 중심으로 점차 세력을 결집시켜 나간 것이 기원전 1세기의 또 하나의 특징적 사건이다. 고구려의 탄생 시점을 올려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상황 때문이다.
후한서 등에서 고구려현에 대해서는 나도 지금 가설을 갖고 있지만, 꾹 참고 있습니다. 아직 검토할 것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몇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먼저 후한서는 삼국지보다 늦은 서기 5세기에 만들어진 책으로, 사서의 정확성이 조금 떨어집니다. 게다가 사기, 한서에 등장하지도 않는 고구려현을 마치 한무제 당시에 만든 것으로 기록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많습니다. 한서 지리지에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있다는 문장이 있지만, 그러나 기원전 107년에 현도군이 세울 때 고구려현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면 한서와 후한서 사이에 만들어진 삼국지를 보지요.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고구려가 한문제가 지배했던 현도군의 땅에서 생겼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다시 말해 후한서에서 고구려현이 옛 고구려땅에 만들어졌다고 한 기록은 사기, 한서, 삼국지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한서지리지에 현도군 고구려현이 있다는 것이 오직 유일한 단서일 뿐입니다.
나는 후한서의 저자가 고구려현의 연원을 스스로 추정한 것이 아닌가라고 가설을 세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도군 고구려현이 기원전 107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고구현이 고구려땅에 세웠졌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낙랑군, 현도군 등은 고조선 땅에 세워진 것이지, 고구려인들이 살던 곳에 세웠졌다는 기록은 최소한 사기와 한서, 삼국지 기록으로 볼 때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선은 여기까지만 언급하겠습니다. 이렇게 고구려현에 대해서 정의하고 나면, 많은 논란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 문제는 너무 복잡하므로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동천왕의 평양에 대해서는 이병도 선생이 평안북도 강계시를 지목한 이후로 아직도 이 주장이 우리 학계에 지배적인 견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병도 선생은 고국원왕이 옮긴 평양 동황성을 동천왕이 옮긴 평양과 같은 곳으로 보고, 국내성의 동쪽인 강계시로 비정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강계시에는 고구려의 성 유적이 없을 뿐더러, 평양이라고 볼 근거가 전혀 없다고 봅니다.
우선 동천왕 21년 기록을 보면
"동천왕이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는데, 평양은 본시 선인 왕검의 집이요, 혹은 왕의 도읍인 왕검이라 한다."
이것은 김부식이 분명 동천왕의 평양을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으로 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고국원왕 13년 기록
"7월에 왕이 평양 동황성으로 옮겨 거하니 성은 지금 서경의 동쪽 편 목멱산중에 있다."
자, 분명 김부식은 이때의 평양을 분명히 서경, 즉 지금의 평양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강계라고 보는 것은 찬성할 수 없지요. 북한 학계에서는 동천왕의 평양을 지금의 평양시 청오리산성 이나, 장안성의 북성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나 역시 청오리산성설을 지지하는데, 그 지역의 유물이 비교적 일찍 출토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 낙랑군이 평양에 위치하고 있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겠지만, 이미 낙랑군은 행정적 치소로서의 의미는 줄어들고, 교역중계소의 역활 정도로 축소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낙랑군 치소는 대동강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낙랑군이 고구려에 위협이 전혀 되지 않은 상태라서 고구려가 대동강 북쪽의 평양에 도읍을 옮기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 나는 한사군과 구별짓습니다.
다시 말해서 낙랑군은 기원전 107년에 세워진 최초의 한2군 - 낙랑군과 현도군의 낙랑군과 서기 44년 광무제가 만든 낙랑군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사군 가운데 임둔, 진번은 나는 없었고, 도상에서 한족들이 만든 것이다라고 봅니다. 임둔군은 기원전 107년이 아닌 보다 늦은 시기에 만드어졌다가 곧 사라진 것으로 그 지역은 요서라고 믿습니다.
최초의 한 2군 가운데 낙랑군의 위치는 지금의 평양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이 부분은 아직 보완할 자료가 많아서 정식으로 견해를 밝히기가 어렵습니다.
문제는 광무제가 만든 낙랑군인데, 나는 이것이 지금의 평양일대라고 봅니다. 대동강 남쪽의 평양시 토성리에는 많으 수의 낙랑유물들이 출토됨니다. 이것이 모두 가짜라고 볼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수 많은 전축분들을 비롯한 유물들을 모두 조작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이 곳의 유물은 모두 후한시기 이후의 것이라, 최초의 낙랑군이 이곳일 수는 없지 않느냐가 내 생각입니다.
자 고구려 시대에 남쪽에 낙랑군이 있었다.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역사에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낙랑군은 영역통치보다는 무역 거점, 외교 거점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낙랑군의 위치는 지금의 평양주변과 황해도 지역이라고 봅니다. 낙랑군이 분열되어 대방군이 생기지만, 이들 중국계 군현이 우리 역사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닙니다. 서기 3세기에 접어들면 이들은 거의 유명무실해집니다.
동천왕 시기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그리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평양이란 것이 낙랑군이 지배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대체로 낙랑의 평양이란 현재의 대동강 남쪽의 토성리 주변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당시 낙랑군이라는 군사적으로는 거의 유명무실한, 경제적인 교류를 위해 존속한 동방군현으로 보는 견해가 강합니다.
동천왕이 옮긴 평양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 그곳이 옛 선인왕검의 집이었다는 표현으로 볼 때도 그때의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평양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강의 건너서 고구려 수도와 낙랑군의 군치소가 있다고 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은 아빈다. 물론 동천왕의 천도는 곧 끝나기는 합니다.
앞으로 평양이란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하겠지만, 동천왕의 평양에 대해서는 나는 현재의 평양으로 보고자 합니다.
첫댓글 그냥 선생님이라 불러도 다... 알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