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속살’을 찾아서(II)(문병채)
광주야 말로 ‘관광의 보물창고’이다.
‘도심’에서만도 하루이틀 기간의 관광꺼리가 반경 2km 이내에 몰려 있다.
양림마을에서 ‘광주의 과거’을 볼 수 있고
금남로에서 ‘광주의 정신’을 볼 수 있으며,
명당터에서 ‘광주의 기운’을 받을 수 있고,
충장로에서 ‘광주의 현재’를 맛볼 수 있다.
아래는 그 코스와 해설 자료이다.
금남로->5.18민주광장->회화나무공원->충장로와 안길->구시청거리->정율성생가->펭귄마을->정율성거리->양림교회->한옥거리->호랑가시나무->우일선사택->선교사묘역->선교사사택->[저녁식당]
▶ 금남로
광주의 ‘메인스트리트’이다. 임란 때 활약한 정충신 군호에서 유래했다. 광주의 기쁨과 슬픔을 담고 있는 ‘역사의 거리’이다. 거리 밑에는 두 지하상가(충금.금남로)가 조성되 있다.
금남로는 1933년에 만들어졌다.
8년에 걸친 대공사였었으며, 보행로가 없는 좁은 2차선 넓이였다. 개설 당시엔 주변이 밭과 논이 있었으나 1940년대에 들어서 모두 집들이 지어졌다. 1968년에 비로소 현재의 넓이로 확장되었다.
5.18민주광장.
광주의 ‘광화문 광장’이다.
역사적 시기마다 집회가 열렸고, 5.18민주화운동 때도 피로 물들었다.
오월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른 공간이다. 지금도 대규모 집회는 항상 이곳에서 열린다.
기쁨이나 아픔을 국가적 힘으로 승화시켜 온 곳이다.
광주의 혈맥이다. 모든 길은 로마(민주광장)로 통한다.
광주의 중심이며 심장부 역할을 해 온 공간이다.
전남도청은 1910년에 최초로 건립되었다. 목조식 단층 건물로 건립되었다.
부지 5천여 평, 건평 482평이었다. 1930년에 현재의 건물이 건립되었다.
어쨌든, 광주 관광에서 금남로와 민주광장을 빼놓을 수 없다.
광주정신이 깃들여 있는 혼이 숨 쉬는 곳이고,
광주의 설움과 슬픔, 기쁨의 애환이 녹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 회화나무공원
5.18광장에 회화나무 작은 숲 공원, 530㎡ 터의 ‘쌈지공원(포켓파크)’이다.
걷다 보면 끝쯤(충장로1가 입구쪽)에 있다.
이 회화나무는 1925년 도청 시작과 함께 광주 고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시민의 애환과 아품을 함께 해왔던 나무다. 5.18 당시의 처참한 역사의 현장도 지켜봤다.
그 고고하던 나무는 지하철공사로 힘들어하다가 2012년 태풍 볼라벤의로 쓰러진 뒤
더 이상 소생하지 못하고 고사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2008년경 한 시민이 밑에서 자란 어린 묘목을 파다가 알뜰살뜰 가꾸어와 후계목으로 기증했다. 유전자 감식결과도 자식 나무로 판정이 났다.
이를 안타까워해서 5.18광장의 모서리 땅을 빌려 예쁘고 조그마한 쌈지공원을 조성했고
우측에 어미나무, 좌측에 자식나무를 심었다.
원래 회화나무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행운을 가져오는 귀목이다.
일반 백성은 함부로 심을 수 없었다. 과거에 합격한 자녀 집에 심었던 나무다. 대가의 뜰에 심어져있는 까닭이 그런 연유다. 옛날에 판관이 이 나무가지를 들고 재판했던 데서 기인했다.
지금도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 대문 가에 꼭 회화나무를 심는다.
그리고 유두날에 잎을 냉수에 띄워 마신다. 자식이나 손자들의 출세를 비는 마음일 것이다.
여하튼, 광주에 오면 꼭 찾아봐야 할 나무이다.
광주를 지키는 수호신 같은 나무였고 역사를 증언해나가기 위한 근간이기 때문이다. 또, 이곳에서 광주 근현대사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PS]
‘5·18세계기록문화유산 기념공원’과 너무 인접해 ‘회화나무 소공원’이 상대적으로 너무 초라하다. 옆 공원에 있는 ‘원형 화강암 덩어리’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 충장로와 그 안길
광주의 명동이다.
젊음과 낭만이 살아 쉼쉬고 가득한 쇼핑몰과 최신 유행이 있는 곳.
저녁이 되면 시끌벅적하고 훨씬 호화롭다. 카페, 맛집, 극장, 쇼핑, 오락 등이 몰려 있어, 데이트하러 오는 연인들은 종일 머무르기도 한다.
충장로 안길.
얼마 전까지 홍등가였다.
요즘, 광주 핫플레이스답게 트렌디하고 예쁜 음식점과 카페, 귀여운 소품샵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기웃거리며 구경 다니는 재미가 솔솔하다.
아늑한 게 좋아서일까.
골목골목의 꼬마 술집들이 있고 밤낮으로 번잡스럽고 인기도 좋다.
점점 청소년들의 유흥시설로 채워지고 있다.
학생회관이.
1967년부터 학생회관이 위치했다. 회관 내 도서관은 인기가 아주 좋았다.
번화가에서 실컷 놀다가 지치면 가곤 했다. 2005년 화정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존속했다.
이곳은 젊음과 낭만이 있고 유행의 트랜드가 흐르고 가장 빨리 변하고 사라지는 광주의 ‘현재가 있는 공간’이다.
이곳을 1년에 한 번도 가보지 않고 어찌 사업을 논하고 경기를 논하랴!
외국인들도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답사코스는 1가 입구에서 시작해서 3가까지 간 후, 좌회전해서 충장로안길로 돌아온다(코스 이동상).
▶ 구시청 거리
먹거리촌이 형성되어 있다. 젊은이들의 이동이 많은 곳이다. 1925~1969년 광주시청이 위치했다.
1912년부터 청년시민운동의 산실이었던 ‘흥학관’과 여러 시설이 위치해 있어, 밤이면 술문화와 담론이 펼쳐젔던 곳이고, 부모님 세대의 숱한 사연과 애환이 있는 곳이다.
이곳의 변화는 2005년 도청이 무안으로 옮기면서 한정식집과 요정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젊은이들의 음식점, 오락 카페, 소품샵 등으로 채워졌다.
이후 이태원이나 홍대입구 같은 공간으로 바뀌었다. 광주의 젊은이들치고, ‘구시청 사거리’를 모른 이가 없다.
▶ 정율성 생가터
그의 음악성은 외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외삼촌인 최흥종(수피아여고 교사)이 어린 정율성에게 축음기, 음반 등도 사주고 양림교회를 통해 서양음악과 접하게 해주었다. 중국정부가 ‘신중국 창건 100대 영웅’으로 선정했다.
그의 생가는 불노동 생가는 벤틀리호텔 앞 마당에 있다.
‘율성정’이라 이름 붙여진 우물도 있고, 그의 가계도와 관련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다.
숙소가 있어서인지, 중국인 추모객이 양림동보다 많다.
그런데 1908년에 정율성 생가터와, 그 일대(1500㎡ 정도)에 ‘사립측량학교’가 문을 열었다. 건물은 두 채의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건평은 140㎡ 정도였다고 한다(조광철, 광주드림).
이로 미루어 봤을 때, 학교 개설과 함께 그의 부친이 팔고, 양림동으로 이사 갔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얼른 지도가 머리에 그려지지 않는 대목들이 있다. 아직도 충장로, 금남로가 썩 익숙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