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의 9성에 대해서는 아래 자하린님이 말한 것처럼 예전에 내가 쓴 글을 참고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윤관의 9성에 대해서 생각할 것은 먼저 그가 동원한 군대의 규모입니다.
1107년 윤관은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을 정벌하러 갑니다.
그가 얻은 9성은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驗鎭)·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 등입니다.
자 그런데 17만이 빼앗은 9성이 지금의 함흥 일대에 불과하다면(일부 역사부도에는 9성의 범위를 지금의 2개 군 정도로 그려놓고 있더군요)
17만 대군이 겨우 그것을 빼앗으러 동원되었다면 정말 고려는 한심한 병력운영을 한 것입니다. 일반 백성이 아닌 군대가 2개 군도 안되는 지역에서 바끌거린다면, 그것은 아예 나라를 말아먹자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17만 대군이면 중원대륙 전체도 먹을 수 있는 대군입니다. 이들이 활동했던 무대가 함경남도 일대에 불과하다는 것은 군대의 규모와 운영상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생산성이 그리 높지 않은 함흥평야 일대를 되돌려받기 위해서 여진족이 그토록 애원했다는 것도 이해가 안될 뿐더러, 이 지역을 되돌려받자 여진족이 강성해졌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함경남도 설은 일본인들에 의한 역사왜곡의 결과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돌려준 땅이기 때문에 그 땅의 넓이가 무슨 중요성이 있느냐고 말할 지 모르지만, 면적의 차이는 곧 고려가 어떻게 대외관계를 했느냐에 대한 문제와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야기 시킵니다.
고려는 9성을 경영하기 위해 전라,충청,경상도의 농민들을 대거 이주시킵니다. 그런데 이들이 단시일내에 그 지역을 농경지로 달바꿈하기도 전에 여진족이 끝없이 말성을 피우면서 공격해왔기 때문에 농민들이 도망가고, 군대는 계속 전투에 신경써야 했기 때문에 결국 고려는 여진에게 돌려줄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또 거대한 9성을 개척한 윤관의 공을 시기한 당시 고려조정의 권력쟁탈전과도 연관된 문제였습니다.
결국 고려는 농경지 확보의 실패로 인해 그 지역의 가치가 국방상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떨어졌기 때문에 돌려주기로 결정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윤관의 9성 가운데 가장 북쪽의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 7백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즉 오늘날의 연변자치주의 넓은 평야가 모두 9성안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당시 고려 면적의 최소 1/3 이상에 해당되는 큰 면적이지만, 경제적 가치가 적었지요.
고려가 돌려준 가장 큰 이유는 고려가 지나친 농경중심의 단일화된 사회체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는 유목민을 지배할 다양한 지배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고려는 완전한 농경국가였기 때문에 단일한 세금구조, 단일한 군현지배를 관철하다 보니 여진족을 또 하나의 고려인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고려는 제국적 체제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돌려줄 수 밖에 없던 것입니다.
전에 쓴 글에 지도가 있으니, 9성의 범위에 대해서는 참고가 될 것입니다. 윤관의 9성 환부이후, 고려가 금제국으로 탈바꿈한 여진에게 형제의 관계를 맺고 굴복한 것은 고려사의 큰 전환이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