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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술루(Sulu) 섬과 민다나오(Mindanao) 섬, 빨라완(Palawan) 섬의 일부에서만 이슬람이 지역 주민들의 지배적 종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지역들이 이슬람권이라고 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가깝게 놓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리핀에서 성당은 유럽의 가톨릭적인 나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도시와 마을의
이 글에서 필리핀에서 큰 세력을 갖고 있는 이 신흥종교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의 예배당
이 신흥종교는 펠릭스 마날로(Felix Manalo)라는 이름을 가진 한 필리핀인에 의해 창립되었다.
사실 그의 원래 성은 이사군(Ysagun)이었다. 펠릭스가 그의 어머니 성인 ‘마날로’를 취한 것에는
‘이사군’이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 데 비해 ‘마날로’는 “승리”를 뜻한다는 해석과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특별히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종종 그 창립자의 이름을 따 “이글레시아 니 마날로”라고도 불리는데,
이 명칭은 개신교의 세계적인 교단 중 하나인 Church of Christ와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된다.
펠릭스 마날로는 1886년 5월 10일 마닐라에서 불과 수 km 떨어진 곳에 있는 깔사다(Calzada)라고 불리는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었던 그의 부모는 농사를 지으며 사는 평범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1896년 아버지가 죽자 펠릭스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학업을 그만두어야 했다.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8세가 되던 1904년에 가톨릭을 저버리고 개신교로 개종했다.
이후 수 년간 그의 개신교 경력은 복잡하게 쌓인다.
펠릭스는 처음에는 감리교단에 들어갔다가 1년 뒤에는 장로교로 옮겼으며
1908년에는 장로교를 떠나 크리스천 미션(Christian Mission)이라는 조직에 가입했다.
이 조직은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Christian Church of America가 필리핀에 세운 것으로,
침례와 만민구원을 부르짖는 매우 비타협적인 교단이었다.
펠릭스가 나중에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를 창립하고 조직을 일구는 데 있어서
크리스천 미션으로부터 적지 않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펠릭스는 1911년 크리스천 미션을 떠나 제7일안식일 재림교회(The Seventh Day Adventist Church)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1913년 중엽에 탈퇴해 버렸다.
이글레시아 측은 펠릭스가 개신교 교단 편력 중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교단들은 모두 그것을 부인한다.
제7일안식일 재림교회 측은 그가 이 교단을 떠난 이유에 대해 그가 어떤 소녀와 눈이 맞아 가출을 하고
그 외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교단의 질책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물론 이글레시아 측에 의해 완강히 부인된다.
이글레시아 측의 설명에 따르면, 펠릭스는 여러 교단들과 기독교 단체를 편력한 끝에
교회의 분열과 무신론자들의 불신앙은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사흘간 밤낮으로 골방에 자신을 가두고 금식하면서 탐구한 끝에
참된 종교는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해야 하며,
자신은 이 참된 종교를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보내졌다는 사실에 대해 통찰력을 얻었다.
” 즉 펠릭스는 기존의 기독교 교회를 부정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교회를 세우려고 했다는 것인데,
사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제7일안식일 재림교회를 떠나기 전부터 갖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펠릭스 마날로 펠릭스는 1914년 초부터 마닐라에 있는 한 공장의 근로자들 사이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이 해 7월 27일에 식민당국에 한 법인 단체로 등록했다.
이 날은 현재 이글레시아 측에서 공식적인 창립기념일로 간주되어 매년 기념행사가 거행된다.
여기서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라는 한 신흥종교가 탄생한 1914년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신흥종교의 형성이라는 하나의 문화적 과정은 그를 둘러싼 사회적 구조와
시대적 배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1910년대 전반기는 당시 미국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던 필리핀 사회에 강한 민족주의 바람이 불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 바람은 한편으로는 필리핀에서 19세기부터 나타난 민족주의적 운동들에 연결되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초부터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강력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민족주의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필리핀에서의 민족주의 운동은 동남아의 다른 나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종종 종교로부터
영감을 받거나 원동력과 추진력을 획득했다.
그것은 미얀마의 경우 소승불교, 인도네시아의 경우 이슬람이었다면,
필리핀에서는 가톨릭이었다.
그러나 미얀마와 인도네시아에서 소승불교와 이슬람이 영국과 네덜란드라는 기독교적 배경을 가진
식민 세력을 대항하여 동원되었던 이념이었다면,
필리핀에서의 가톨릭은 스페인이 필리핀인들에게 전파한 종교였다.
바로 이 점에서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의 독특한 측면이 있다.
필리핀 최초의 민족주의 운동은 대개 1841년 터진 아뽈리나리오 데 라 크루스
(Apolinario de la Cruz) 반란으로 치는데,
이 반란은 필리핀 신부들에게 서양인 신부들이 활동하는 가톨릭 수도회에 대한 가입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이 반란이 진압된 후, 스페인 사람들과 필리핀 사람들간에 적대적 관계가 증대했으며,
그 적대적 관계의 구심점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가톨릭 교회가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1872년 일어난 까비떼(Cavite) 폭동에서도 필리핀 신부들이 관여해 있었다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을 것이다.
어쨌든 스페인 식민통치 시대 필리핀인들의 가치관뿐만 아니라
그들의 민족주의적 의식과 정체성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경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형성되었다.
이 점은 19세기 말이 되면 로마가톨릭 교회를 필리핀화하려는 운동으로 발전하여,
1890년대 말 스페인 식민지배에 대항하여 일어난 민족주의 투쟁의 일환으로 필리핀 교회에 대한
통제권은 필리핀인들의 손에 놓여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1902년이 되면, 그러한 인식은 구체화되어 그레고리오 아글리빠이(Gregorio Aglipay)란
한 필리핀 신부가 필리핀독립교회(Philippine Independent Church)의 대주교가 되었다.
“아글리빠이 교회”라고도 불리는 필리핀독립교회는 불과 수 년 사이 필리핀 기독교인의
약 25%를 지지자로 획득할 정도로 급속히 성장했다.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20세기 초 기독교가 강하게 필리핀 토착화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1914년부터 자신의 신념을 전파하기 시작한 펠릭스는 점차 행동반경을 넓혀
마닐라 일대의 여러 작은 도시와 마을들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펠릭스는 1919년 미국에 갔다. 이글레시아 측이 내놓는 공식적인 설명은 그가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기독교 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1922년 필리핀으로 귀국한 그는 이글레시아의 몇몇 핵심멤버들로부터 무절제와 비도덕적 행동으로 비난을 받았으며,
교회 내부에서의 이 분규로 많은 신자들이 이글레시아를 떠났다.
그 비난의 선봉대를 맡은 자는 떼오질로 오라(Teogilo Ora)란 이름의 목사였다.
펠릭스는 그 비난을 교주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존재로 부각시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라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이사야서 43: 5-7)의 성경말씀을 내세워 자신을 하나님이 이 땅에 마지막으로 보내신 “동쪽으로부터 온 천사”라고 선언했다.
그 후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에서 그에게 도전한 별다른 내부적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선언은 그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당시 그를 따르던 교육받지 못한 근로자 계층의 사람들에게 비교적 쉽게 먹혀들어간 것 같다.
펠릭스는 1938년에 다시 미국에 갔다. 목적은 이글레시아에 대한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서 였는데,
그 소기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이글레시아의 재정이 필리핀인들의 헌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깨달아,
그후 교회 신도들에게 그들의 수입의 상당 부분을 교회에 바쳐야 한다는 인식을 심겨주기 위해 노력했다.
펠릭스는 1963년 4월에 죽었다. 이글레시아의 리더십은 그의 아들인 에라뇨 마날로(Eraño Manalo)에게 넘어갔다.
2. 이글 레시아 니 끄리스또의 구조와 조직
등록된 법인의 정관에 따르면, 이글레시아 법인의 목적은 그리스도 복음의 교리와 가르침을 필리핀 전역에 전파하는 것이며,
이글레시아의 존립은 오로지 신도들의 기부금에 의존한다고 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법인체로 등록되어 있는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의 최고 권위는 과거에 펠릭스 마날로에게 놓여져 있었던 것처럼,
현재는 그의 아들인 에라뇨가 집행목사(executive minister)의 지위에서 쥐고 있다.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의 최고권력자인 집행목사가 관장하는 집행부는 중앙복음전도자
(General Evangelist), 총무(Administrative Secretary), 회계(General Treasurer), 감사(General Auditor),
3명의 마닐라 책임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닐라를 제외한 필리핀 전역은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지역은 또 여러 구역(division)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구역은 구역 목사(Division Minister)가 관할한다.
조직의 통제권과 행정은 그것이 교회 내부의 것이든 세속적인 것에 관한 일이든 모두 중앙집권화되어 있다.
예컨대 신입 성도들에 대한 교리 주입과 설교자료들은 모두 중앙사무국(Central Office)에서 모두 준비된다.
그러므로 같은 날 모든 구역에서 목사들이 설교하는 내용은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다.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필리핀인들의 해외 이주와 더불어 외국으로 그 조직이 팽창되었다.
특히 필리핀과 깊은 정치적, 경제적 관계가 있고 필리핀인들이 이미 많이 이주해 살고있는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그 팽창은 두드러진다.
필리핀인들의 해외 이주는 근로자, 가정부, 전문인, 비즈니스맨, 유학생, 국제결혼 등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근로자나 가정부로 나가 있는 것이 수적으로 가장 많다.
이글레시아의 공식적인 정기 간행물인 Pasugo지 1998년 1월호에 나와 있는 해외의 이글레시아 교회 분포상황을 보면,
아프리카, 중동, 인도, 스리랑카, 중앙아시아, 호주, 뉴질랜드, 남태평양, 중남미,
미국, 캐나다, 중국, 대만, 홍콩, 동남아, 일본, 한국 등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과 나라들에 이글레시아의 예배당이 설립되어 있다.
한국의 경우, 광명시와 대구에 그 지부가 있다.
3. 이글 레시아 니 끄리스또의 성장의 원인 분석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1963년 펠릭스의 죽음 후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다. 그 성장의 원인은 무엇인가?
1) 이글 레시 아의 권위 에 대한 완전한 복종
1922년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일어난 지도부 내에서의 충돌로 펠릭스 가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라고 선언한 이후,
그의 권위에 드러내 놓고 도전하거나 그의 영적인 능력을 의문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사실 펠릭스의 그러한 주장은 기독교의 다른 교파나 교단에 비해 이글레시아가 참된 종교라고 믿고
이에 대해 자기만족을 찾고자 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에라뇨 마날로
펠릭스 마날로는 1953년에 자신의 아들들 중 에라뇨를 선택하여 이글레시아의 목사로 훈련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글레시아의 조직을 운영하는 실제적인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펠릭스가 죽을 때까지 10년간 에라뇨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은 셈이었다.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의 신도들은 펠릭스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믿는다면,
그의 아들은 이 마지막 선지자가 보낸 선지자라고 간주하여 역시 그의 권위에 복종한다.
이 관계에 대해 이글레시아 측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히브리서 13:17),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나니”(고린도후서 5:18) 등의 성경 구절들을 인용한다.
이글레시아 신도들의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에 대한 완전한 복종 관계는 세뇌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 교리주입과 이글레시아의 세례의식으로 시작된다.
이글레시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믿음을 심겨주는 이 과정을 통해 신도들은
이글레시아를 떠나면 자신들의 삶이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하여
결국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에 대한 맹종의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2) 선민사상과 배타적인 우월의식
이글레시아의 교리주입을 통해 신도들은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으며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내용은 이글레시아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 신도들에게 끊임없이 주입되는데,
이를 통해 그들은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의 신도인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이글레시아 신도들은 서로 “까빠띳”(kapatid)이라고 부른다.
“형제, 자매”를 뜻하는 이 칭호를 통해 그들은 신도 상호간에 공동체적 단결의식뿐만 아니라
이글레시아 신앙공동체가 다른 종교와 구별된다는 의식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신도들은 현재의 교주인 에라뇨에게도 “까(ka) 에라뇨”(ka는 kapatid의 준말)라고 부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 내에 위계질서가 없이 완전한 사회적인 평등이 구현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이글레시아 사람들은 종교적인 우월의식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가 유일한 참된 종교라고 주장하는 많은 이글레시아 신도들은
타 종교집단과의 접촉을 통해 이글레시아가 오염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글레시아의 목사들은 다른 종교집단들과 친분관계를 맺는 것을 꺼린다.
3) 교세의 비공개
이글레시아는 창립 당시 12명의 모임으로부터 1970년에는 475,000명 정도로, 1975년경에는 약 60만 명으로 신도수가 증가했다.
이글레시아 측은 결코 자신의 교세에 대한 어떠한 수치도 공개하지 않는다.
오늘날 다양한 보고서에 제시되어 있는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의 교세는
300만 명에서 1,000만 명까지 매우 넓은 폭을 보여주는데,
그 진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매스미디어는 대개 호기심과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글레시아의 교세를 부풀려 보도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글레시아 측에서는 그에 대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추측컨대 그러한 종류의 보도는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가 뭔가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급성장을 이룬다는 이미지와 이로써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가 필리핀 열도에서
정치적 및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종교단체라는 이미지를 던져줄 수 있을 것이며,
이글레시아 측으로서는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손해볼 것이 없는 그러한 이미지를 환영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자신의 교세를 정확히 밝히지 않음으로써 교세 확장의 신비성을 유지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이글레시아의 사회적 및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갖도록 한다.
이글레시아의 이러한 영향력 때문에 선거 때가 되면 입후보자들이 찾아와서 지지를 부탁한다.
그럴 경우,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유리한 입후보자를 선택하여
신도들에게 그를 찍어주도록 지시를 내린다.
이글레시아의 공식적인 기관지인 『빠수고』.교주인 에라뇨와 그의 신도들.
극히 비민주적인 방식인 이러한 행위에 대해 이글레시아 측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린도전서 1:10),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립보서 2:2-3) 등의 성경 구절을 근거로 내세우면서 이글레시아 신도들은
국가의 공직자를 선출하는 데 있어서도 단합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글레시아 측은 입후보자들에 대한 지지의 대가로 어떠한 조건도 공식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지만,
„우땅나로옵‟(utang na loob: 감사의 빚 – 은혜를 입은 사람이 그 은혜의 빚을 언젠가는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의 사회적 관계가 중시되는 필리핀 사회에서,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의 지지를 통해 당선된 정치인이나 공직자는 어떤 형태로든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가
필요로 할 때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공적이나 사적인 중요한 직책에 있는 많은 이글레시아 신도들 가운데
이글레시아의 그러한 정치적 영향력을 통해 그 지위에 오른 자도 적지 않다.
어쨌든 이글레시아의 신도들 중 행정부, 군, 사업 등에서 책임 있는 직책에서 활동하는 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의 대외적 위상은 더욱 올라갈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글레시아의 재정을 더욱 든든하게 만들 헌금이 더욱 많이 들어올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가톨 릭과 개신교 에 대한 공격
이글레시아는 처음부터 가톨릭 교회를 공격 목표로 삼았는데,
그것은 필리핀인들의 80%이상이 로마가톨릭 교회의 신도들임을 고려할 때 당연한 생존전략으로 보인다.
이 전략의 기본적인 성격은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가 로마가톨릭 교회와
어떤 종류의 교리 논쟁에서 승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세인의 관심을 이글레시아 쪽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이글레시아의 반가톨릭적인 자세와 전략은 필리핀의 정치인들 가운데
반가톨릭적 성향을 가진 자들로부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예컨대 1935-1944년간 필리핀의 대통령을 지낸 케손(Manuel L. Quezon)은 가톨릭 신자였다가
프리메이슨으로 전향한 인물로서 일찍이 펠릭스 마날로와 친분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케손 대통령은 가톨릭 교회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필리핀 내의 민족주의적 세력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러한 그에게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하나의 진정한 필리핀적 민족주의 조직으로 비쳤던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특별한 이해관계에서 당시 그는 펠릭스를 “주교”(bishop)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글레시아의 개신교에 대한 공격은 가톨릭에 대한 공격보다는 덜 과격하다.
어쨌든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기독교의 두 거대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다윗이 골리앗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에 비교한다.
이글레시아는 이렇게 함으로써 정서적으로 약자에 호감을 갖는 필리핀인들의 동정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5) 신앙공 동 체 내의 단결
공동체 내에서 상호 형제의식을 갖고 있는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외부인들의 눈에도 상호결속력이 강한 조직으로 비친다.
이글레시아는 또한 그 지도자들이 신도들의 집을 방문하여 가족간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는지
가정 내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를 점검할 정도로 신도들의 가정을 일일이 관리한다.
이글레시아는 직업훈련학교를 세워 가난한 신도들의 자녀들에게 직업기술을 배우는 기회를 제공한다.
훈련 비용은 이글레시아가 부담한다.
하지만 이렇게 기술을 배운 이글레시아 청년들이 직장에 들어가 돈을 벌면 이글레시아에
재정적인 후원을 하여 또 다른 가난한 이글레시아 젊은이들이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정부의 행정공무원 임용시험을 위해 이글레시아는 수험생들의 시험준비를 무료로 도와준다.
이 전략은 이글레시아의 사회적 영향력이 증대될 뿐만 아니라
좋은 직장에 들어간 신도들이 더욱 많은 헌금을 함으로써 이글레시아의 재정이 강화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이글레시아는 신도들이 노동연맹 등 직업적 연맹에 가입하거나 그러한 것을 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종교적 이유는 신도들이 이미 그리스도의 몸인 이글레시아 교회의 지체들이 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글레시아 신도들은 필리핀의 여러 기업들이 선호하는 노동력이다.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사회복지부(Department of Social Services)를 세워 신도들을 위한 여러가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기관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결혼한 부부들의 조직인 부끌롯(Buklod)이나
21세 이상의 미혼 남녀들의 조직인 까디와(Kadiwa) 혹은 13세 이상 21세 미만의
청소년들의 조직인 빈히(Binhi)에 속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궁핍하거나 사회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장애자 혹은 건강상 문제가 있는 자들도
사회복지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충실한 신도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생활과 복지까지 돌보아 준다.
그들은 물론 그만큼 이글레시아 교회에 더욱 더 헌신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이글레시아를 배신한 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보복이 뒤따른다.
예컨대 이글레시아 신도들이 고객의 대부분을 형성하는 사업을 하는 자의 경우 그 고객들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이글레시아는 이글레시아 교회에 불복종하고 봉사하지 않으려는 자들에 대해서는
정신적인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물리적인 제재를 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신앙공동체와 신도들 상호간 결속을 유지하는 방편의 하나로 신도들 상호간 결혼하게끔 한다.
이글레시아의 청년 남녀들은 빈히와 까디와를 통해 이글레시아 교회의 활동에 대해 익숙해질 뿐만 아니라
상호 교제를 통해 결혼 배우자를 택하기도 한다.
이글레시아의 신도는 외부인과 결혼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그 때문에 외부인이 이글레시아 신도와 결혼하려면 우선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로 개종해야 한다.
이글레시아의 배타적인 결혼 정책도 이 신흥종교가 양적인 성장을 보는 한 원인이 될 것이다.
4. 전도 방식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개개 신도들에게 포교의 사명을 주어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가족과 친척,
친구들을 이글레시아 측으로 끌어들이도록 요구한다.
이런 저런 방법을 통해 전도된 자들이 5-10명이 되면 그들에게 전도사(manggagawa)를 보내 교리에 대한 교육을 시킨다.
교육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목사가 와서 그들에 대한 교리주입을 완성하고 그들이 세례를 받기까지 돌보아 준다.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신도들 중 한 명이라도 이글레시아 교회가 없는 곳으로 이주하면
그곳에 언젠가는 이글레시아 지부를 세운다.
필리핀의 지방 곳곳으로 그리고 세계의 많은 나라로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가 팽창한 현상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인데, 이러한 조직적 팽창을 위해서는 그만큼 충분한 목사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이글레시아 니끄리스또는 매년 수백 명의 목사들을 최소한의 훈련을 거쳐 배출해 낸다.
목사 양성은 과거에는 마닐라의 본부에서만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구역 목사들도 목사를 배출할 수 있다.
사실 이글레시아 목사들은 수준 높고 광범위한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들은 이글레시아의 집행부에서 만들어 보내는 신자관리 지침사항과
매 주일의 설교문을 외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가 중시하는 또 다른 전도전략은 교리에 대한 공개토론을 벌여
이글레시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글레시아는 공개토론을 통해 무엇보다도 가톨릭과 개신교 신앙의 성격적 근거를 공격하고
이글레시아의 성경 해석을 옳은 것으로 내세우기 위해 애를 쓴다.
이를 위해 이글레시아는 예컨대 길거리에서의 공개토론 시 군중속에 이글레시아를 위한
박수부대와 상대방을 위한 야유부대를 심어두기도 한다.
이글레시아는 그밖에 TV, 라디오, 신문 등을 통해 선전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가 가장 중시하고 또 신도들이 실제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전도 방식은 가가호호 방문이다.
5. 필리 핀 사회 에 대한 이글 레시아 니 끄리스또의 영향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와 같은 신흥종교가 20세기 초에 필리핀에 등장한 것은 한편으로는
필리핀인들의 문화적 수용성의 바탕 위에서 설명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필리핀인들이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되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접근방식을 갖고 있다는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의 교세가 오늘날 수백 만에 달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이 신흥종교가 많은 필리핀인들에게 분명히 매력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이신흥종교가 비교적 단순한 교리와 신앙관을 갖고 있으며,
둘째 비정통주의적인 성경해석과 기존의 가톨릭과 개신교에 대한 공격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필리핀의 개신교 중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여주는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는 갈수록 많은
이글레시아 신도들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분포됨에 따라 그리고 신도들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그 정치적 영향력도 날로 커지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필리핀의 독재자였던 마르코스(Marcos) 대통령은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의 강력한 후원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이 신흥종교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필리핀인들의
해외 근로와 이주와 더불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있는 이글레시아 니 끄리스또가
오늘날 필리핀에서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사회적 및 정치적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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