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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파일>
보살행이 육화된 다이내믹한 휴머니즘의 감동과 해학
이경철(문학평론가)
“배롱나무 가지에/와서 앉는 작은 새//화르르 무너지는/잎들의 허공 처소//가만히/고요에 드는/저 붉은 꽃의 눈,”-「적요(寂寥)」전문
1. 풍경과 시인, 움직임과 정지 틈새에 꽂히는 시안(詩眼)
강정숙 시인의 이번 시집『천개의 귀』시편들을 읽으니 우선 환하다. 꽃이 지는 것도 환하고 산 그림자도 환하고 상심한 시인의 마음마저도 환하다. 그리고 다이내믹하다. 허공, 고요, 적멸(寂滅), ‘가만히’라는 말마저도 꽉 차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시인의 타고난 해학과 자비심이 이번 시집의 좋은 시편들에는 이렇게 환하게 베어들어 있다. 가만히 베어들어 있지 않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우리네 상심한 삶과 마음은 물론 우리 사회와 우주만물에 보시하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정관(靜觀)의 시가 아니라 대자대비를 실천하는 보살행으로서의 살아 움직이는 생물 같은 시로서.
이번 시집 시편들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시로 보여 이 글 프롤로그로 올린「적요」를 보시라. 짧은 단시조이면서도 풍경과 시간의 흐름이 역동적이어서 생동감이 넘치지 않은가.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나무 가지에 앉아 잎들을 화르르 흔드는 그 짧은 순간을 아연 억겁(億劫)의 일로 생동감 있게 살려내고 있지 않은가. 아니 억겁의 시간이 순간의 풍경으로 지금 여기서 살아나고 있지 않은가.
“화르르 무너지는/잎들의 허공 처소”라는 절구(絶句), 이 시의 눈깔을 보시라. 나뭇잎들의 위치를 ‘허공 처소’로 보는 시인의 눈도 눈이려니와 그 허공 처소마저도 화르르 무너지는 것으로 보는 심안(心眼), 시안의 내공마저도 이리 역동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다니. 절로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절창이다.
생이 지루하다고 제 몸통을 그었는가
태고사 가는 길목 깊이 금간 바위 한 채
틈새를
열어놓고서
개미떼를
풀고 있다
삶도 가끔 출렁대야 쓸쓸하지 않다며
오월 젊은 하늘이 천둥 비 쏟아내고
봄날은
공양간 열어
이팝꽃을
풀고 있다
-「틈을 읽다」전문
미당 서정주 시인은 순간과 영원, 동(動)과 정(靜) 틈새를 “하늘이/하도나/고요하시니/난초는/궁금해/꽃 피는거라”고 읽어, 일필휘지하며 난초 한 촉 그려놨는데. 그 글이 하도 좋아 그대로「난초」라는 미당의 대표시 한 편으로 통하며 많은 시인묵객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두 수로 이뤄진 위 시조「틈을 읽다」를 보니 미당의 고요한 틈새 읽기에 더해 부산한 움직임까지 들어있다. 태고의 바위도 그 영겁이 하도 심심해 제 몸을 빠개어 그 틈새에 개미들을 키우고 있다. 하늘도 고요가 심심해 제 몸을 찢어발기며 우르릉 쾅쾅 천둥 비를 쏟고 있다. “삶도 가끔 출렁대야 쓸쓸하지 않다며”며 아주 즐겁고 다이내믹하게.
이 시의 눈이랄 수 있는 둘째 수 종장을 보시라. 이팝꽃 핀 오월 환한 봄날을 얼마나 환하게, 행도 네 행씩이나 바쁘게 나눠가며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거기에 시인의 해학이며 공양간을 열어 만물을 양육하는 보살행까지 더하고 있지 않은가. 움직임, 행함, 부산함이 없는 영원이나 허공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무(無)며 공(空)이라는 깨달음의 내공, 한소식까지 들어있는 시 아닌가.
“바람이거나/그대이거나/내 등을/떠밀면/울다가 침묵하다가 가만히 잦아드는/정지와/흔들림 사이/이 한 생(生)이/무겁다”. 단시조「종」전문이다. 초장과 종장은 한 음보를 각 한 행씩 잡고 중장은 네 음보를 그대로 한 행으로 처리한 행 나눔의 형태가 우선 눈에 들어오는 시이다.
한가운데 중장이 한 행으로 길게 중심을 꽉 잡고 종 방울의 정지와 흔들림 사이를 보고 듣고 묵상하고 있는 형국을 그린 일종의 형태시로도 볼 수 있는 시이다. 그렇게 종, 절간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의 끊어졌다 이어지는 소리의 틈새에서 생(生), 살아있음의 무거운 의미를 문득 깨닫고 있는 시이다.
목석(木石)이나 그 같은 부처보다는 바람이거나 그대에게 동해 울다 침묵하다 잦아들곤 하는 저 풍경소리 같은 것이 우리네 생생한 삶 아니겠는가. 고승이나 도사의 묵언(黙言), 면벽(面壁) 수행으로 감히 말로 표현해낼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지경, 그 참진 세계에 이르려는 것이 아니라 시인은, 시는 우리네 생생한 삶의 진실은 이렇게 그냥 역동적으로 터져 나오게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시는 태생적으로 독자와의 쉽고 감동적인 소통이기에.
“햇살도/소슬바람도/거둬간 지 오래인/안부마저 닫아버린 내안의 깊은 오지/파종된 슬픔 한 촉이 덧없이 발아한다//먼데 징소리같이 더디 오는 파동인가/싹눈과 씨방 사이 물길 잠시 열더니/치명적 색을 입는다, 흰 분홍 저 알리움//에둘러 들썩이다 고요로 갈앉는다/잎잎 다 드리워도 텅 빈 그늘뿐인/만개한 꽃송이들이/지느라고/
환하다”(「꽃말에 물들다」전문).
참 환한 시이다. 시인의 각주에 따르면 알리움의 꽃말은 ‘무한한 슬픔’이다. 그 무한한 슬픔마저도 환하게 꽃으로 피우고 있는 시이다. 환하고 역동적인 동사(動詞)의 말꽃을 피워가며 마침내 “만개한 꽃송이들이/지느라고/환하다”는 절창을 낳고 있는 시이다.
세 수로 된 이 시는 각 수의 행 나눔을 달리하며 형태에서부터 생동감을 돋보이게 한다. 첫 수는 초장을 세 행, 중장과 종장은 한 행씩 잡았고 둘째 수는 시조의 정통 기사법인 한 장을 한 행씩 잡았다. 마지막 셋째 수에서는 첫째 수와는 반대로 초장과 중장은 한 행씩, 종장은 3행으로 처리해 현대시 같은 형태시학의 멋을 부리고 있다.
운율의 단속(斷續)에 의한 속도와 긴장감, 이미지의 전환과 시상 전개에서 나오는 내적 리듬 즉 내재율 등을 얻기 위한 시 자체의 내적 요구에 의해 행이나 연 나눔 등의 형태는 나와야한다. 그런 내적 필연도 없이 겉멋으로 무늬만 자유시 형태를 띠게 하면 내용과 형식이 일치해야하는 시의 진정성이 떨어진다. 이렇게 볼 때 이미지 변환과 시상 전개가 가장 역동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둘째 수에서 더 많은 행 나눔을 하고 첫째 수는 시조의 정통 기사법 그대로 놔뒀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 시이다.
첫째 수에서는 아무 것도 없는, 기미며 기별마저도 없는 태초의 태무를 “내 안의 깊은 오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 어둠 속 카오스가 하도 답답하고 심심해서인가. 슬픔 한 촉이 파종된다.
둘째 수에서는 그런 슬픔의 파종이 파동이 되어 일파만파 부지런히 알리움 꽃을 피운다. 셋째 수에서는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그 꽃송이들도 지며 텅 빈 그늘뿐인 태초의 어둠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알리움 꽃 한 송이 피는 사연과 서사를 들여다보니 티끌이지 가스인지 모를 한없이 외롭고 심심한 것들이 어둠속에 모여 빅뱅으로 폭발해 우주를 탄생시켰다 다시 블랙홀로 사그라지는 우주 탄생과 소멸 이론과 맞아떨어지지는 않는가.
시인은 꽃 한 송이 피고 짐을 바라보면서 그런 우주 삼라만상 생멸과 운항의 이치를 환하게 꿰뚫고 있는 것이다. 우리네 삶과 슬픔 또한 그러할지니, 다 우주운항의 질서일테니 하고 순응하는 자세에서 삶과 풍경을 보는 환하고 해학적이고 역동적인 시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2. 풍경의 속내와 서사
빗줄기가 슬어놓은 물방울을 바라본다
결기를 버리느라 가만 휘인 가지 끝
투명한 물 집 한 채가
아스라이 걸려있다
누구의 무슨 여망이 저토록 간절해
거꾸로 매달려서도 손 놓지 못하는 걸까
초록을 다 내치고도 꽉 들어찬 무게여
나 또한 계절로 치면 늦은 가을이겠다
오랜 노숙을 접고 저 집에 들고 싶다
지상과 천상에 걸린
부드럽고 둥근 집
-「물의 집」전문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물방울을 소재로 한 시이다. 이 글 프롤로그로 올린 시「적요」에서는 나뭇잎들의 집을 “허공 처소”라 했는데 이 시에서는 물방울을 “물의 집”으로 보고 “지상과 천상에 걸린/부드럽고 둥근 집”이라 형용하고 있다.
세 수로 이뤄진 이 시에서는 대상, 풍경을 바라보며 점차 풍경의 속내로 빨려드는 시인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첫 수에서는 물방울을 “투명한 물집 한 채”로 묘사하고 있다. 똘똘 뭉친 물방울의 결기를 버리느라 휘인 가지 끝이란 역동적 묘사로 시인의 결기, 혹은 감정이 물방울에 가만히 이입된다.
둘째 수에서는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서도 떨어지지 않는 물방울의 한계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아니 “누구의 여망이 저토록 간절해”라는 시인의, 인간의 실존상황이 그대로 투사되면서 물방울에 시인의 감정이 강하게 이입된다. 천상, 신으로부터 아무런 대책도 없이 기투된 생이면서도 종장에서 “초록을 다 내치고도 꽉 들어찬 무게여”라며 실존의 무게를 감탄으로 수용하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시인의 생래적 자세가 돋보인다.
셋째 수는 물방울의 객관적 묘사라기 보단 숫제 시인의 진술. 이제는 저 물방울 같은 부드럽고 둥근 집에 살고 싶다는 소망이다. 만사에 긍정적이고 능동적이고 인간적인 시인의 타고난 태도가 잘 드러난 시이다. 시인이 풍경의 속내에 어떻게 파고들어가고 있나를 잘 보여주면서도 시인의 주관이 풍경의 객관을 독재하는 감정이입이 너무 강해 정경교융(情景交融)의 지경까진 이르지 못한 게 아쉽다.
“사람도 물이 마르는/쓸쓸한 가을 끝머리//서둘러 당도하는/바람 끝이 아리다//내 귓속/낡은 악기도/숨죽여 오래 운다”. 가을날의 정황을 깔끔하게 묘사한 단시조 「이명」전문이다.
조그만 액자에 담아 걸어두고 오래오래 감상하고 싶을 정도로 가을날의 삽상한 심상이 깊다. 온몸의 감각과 혼으로 받아들인 심상이기에 그 정황과 시인, 삽상하게 저물어가는 계절 가을과 시인의 연륜이 그대로 일치하는, 서로가 서로를 울리는 이명(耳鳴)이란 메타포로 정경교융의 절창에 이르렀을 것이다.
다만 초장 ‘—도 —하는 — —명사종결’투의 어법은 현대시조에 와서 정형화되다시피 한 어법이니 피했으면 싶다.
“새벽안개 씻어 내린 양구는 지금 환한 대낮//잊힌 듯 엎드린 길목, 초병은 말이 없고//대암산 끈끈이주걱만 내 발목을 잡는다//두타연이 풀어먹인 억새처럼 억센 그 사내//늪의 내부 어디쯤서 요지부동 하였는가//물소리 바람소리만 광치령을 넘는다” (「양구에서」전문).
강원도 양구 최전방 민통선 안에 있어 잊힌 듯 태고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두타연과 대암산 주변 등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시이다. “초병은 말이 없”다고 했는데 그 풍경 속에 많은 이야기들이 들리는 듯하고 시인도 서사를 담으려한 노력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평시조 두 수로 된 이 연시조는 각 장을 한 행으로 잡는 정통 기사법을 취하면서도 앞 뒤 수를 나누지 않고 각 행을 공히 한 연으로 처리해 생긴 행간의 넓은 여백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풍경이 뚝뚝 끊기며 다음 풍경으로 넘어가는 그 여백은 또 그 풍경에서 길고도 많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게 한 장치일 것이다.
남북분단으로 민통선으로 남은 양구 최북단 자연지역이 환한 대낮에 하고픈 말, 끈끈이주걱이 발목을 잡으며 하고픈 말, 태고적 자연의 물소리 바람소리가 하고픈 말, 결국은 시인이 하고픈 하고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여백은 흘러나오게 하고 있다.
3. 드라마틱한 서사욕구의 다이내믹한 분출
“맨 처음 떠나온 게 오지의 숲이었나/구절초 오만하게 꽃잎 터뜨리는 날/불지른 한 생의 끝에/달랑 남은 뿌리 하나//상처를 긁어내던 벼린 손 벼린 칼끝/무늬를 맞추면서 빗금을 궁글리며/비로소 완성에 이른/환한 창가에 섰다”.
2002년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시조부문 당선작인「흔들의자」둘째, 셋째 수이다. 목재 흔들의자 하나가 나무숲을 떠나와 지금 여기 환한 창가에 의자로 놓이기까지의 이력을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흔들의자가 완성되기까지의 역동적인 내력은 곧 시인의 내력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대상과 풍경 속에 시인 자신의 내력이나 우리네 사는 이야기를 담아내려 애쓰고 있다.
일족들 제각각 제 뼛가루 싸들고
산으로 강으로 납골당에 흩어진 뒤, 벌레며 동박새 모두 노숙자가 되었다
소달구지 소로는 자동차 길이 되고 도로 옆 고가 한 채만 바람에 떨고 있다
아비가 깔고 않은 옆구리의 몇 평 땅, 외아들 놈 코앞에서 죽거니 살거니한다
태초의 소읍 하나가 유성처럼 사라진다
-「사기막골 블루스」전문
개발에 밀려 문중 선산도 팔고 대대로 내려온 집과 전답도 팔고 뿔뿔이 흩어지는 일족의 실태를 역동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이를 통해 전통사회에서 날로 현대화, 도시화 되가는 우리 삶과 사회의 어두운 측면도 고발하고 있다. 그 실태를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고 고발하려 사설시조 양식을 택했을 것이다.
선산을 팔고 조상의 뼈를 파내 산이나 강에다 뿌리거나 납골당에 안치하고 나서 유흥업소에서 블루스 추고 양주 마시는 개발바람에 신바람 난 한 소읍의 행태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선산에 살던 자연만물들은 물론 인간의 윤리마저 피폐해가는 실태도 고발하고 있다.
이 땅에 질서정연한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며 살아 왔던 전통농촌사회 소읍 하나가 별똥별처럼 가뭇없이 사라져가는 가슴 아린 실태를 고발하면서도「사기막골 블루스」라는 제목처럼 시인 특유의 해학이 번득이는 시이다. 판소리 사설처럼 해학과 능청을 부리며 맘껏 이야기 할 수 있는 사설시조라는 양식과 만나니 그 빛을 더 발하고 있다. 세 행으로 나눈 중장의 사설부분을 차라리 행 나눔도 없이, 더 주저리 주저리 반복 나열시키는 산문시 형태로 처리했으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 많던 멧새는 또 어디로 갔을까/산벚꽃, 너럭바위 구절초의 문중(門中)산/아파트, 아스팔트에 밀려 흔적마저 지워진,”.「사기막골 블루스」후속편으로 읽어도 좋을 네 수로 구성된「잃어버린 풍경」첫째 수이다. 여기서도 개발에 밀려 잃어버린 풍경들의 거처를 이렇게 아리게 다시 물어보면서 마지막 수 종장에서는 “풍경은 보는 게 아니지, 마음에 담는 게지”라며 마음속에 담고 있다.
“어머닌 밤늦도록 재봉틀 밟으시고/잠들지 않으려고 나는 책을 읽었다//세밑의 바깥풍경은/무섭고/쓸쓸했다//고요를 뒤흔들며 막차가 지나가고/뒷산의 애솔가지 뚜두둑 부러지고//아버진 먼 길 가시고/섧고 길던/그 겨울”(「그 겨울」전문).
꾸민 것 같지 않은 꾸밈이 참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시이다. 평서문의 진술도 시조의 정형에 이리 또박또박 잘 맞출 수 있다는 사실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두 수이면서도 수 나눔은 무시하고 각 수 초장, 중장은 한 행씩 두 행으로 연 처리하고 종장은 세 행 한 연으로 잡은 형태와 평서문 진술이 시조의 구각을 완전히 깨치면서도 시조 특유의 확실한 종결감을 준 빼어난 시이다.
겨울을 소재로 삼아 추억하고 있기 때문인가. 짧은 서사이면서도「그 겨울」에서는 백석과 이용악의 북방 정서와 겨울 이야기가 유장하면서도 다이내믹하게 들려나온다. 선산 다 팔고 뿔뿔이 흩어져 술 마시고 춤추는 사기막골 블루스가 아니라 시인의 마음속에 묻어둔, 춥고 배고프고 무서웠지만 부모형제 한 솥밥 한 지붕에서 같이 살던, 먼 먼 옛 고향 겨울이야기가 전설처럼 흘러나오고 있는 시이다.
“송화 가루 잔기침이 울타리를 넘으면/굽 낮은 새소리가 풍경처럼 흔들리고/당신의/흰색 고무신/정갈해서 서럽다”(「아버지」첫째 수). 댓돌 위에 정갈하게 놓은 아버지 흰색 고무신 한 켤레를 소묘하고 있으면서도 그 그림 속은 움직이는 것들로 부산하다. 송화 가루가 날리고 아버지 잔기침이 울타리를 넘고 새소리가 풍경처럼 흔들리고.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지는 공감각으로 정물화(靜物畵) 속에서도 움직임을 잡아내 기필코 어떤 이야기든 흘러나오게 하고 있다.
“바람한테 들려서라도 떠나고 싶었던/놀빛 산에 올라가서 하늘이 보고 싶었던/소라게/패각을 이고/길을 나선 여름 날//누군가 들어 올려 허공을 보여주고/냄새를 맡아보다가 아래로 툭 던져버린 후/상실된 방향감각은 옆길로만 걷게 하고//움직이지 않으면 썩고 마는 한나절/하염없이 걸었으나 물살이 쫓아오고/“돌아 와!”/부르는 그곳/집 한 칸, 파도 한 채”(「소라게」전문).
소라 같은 무거운 패각을 이고 사는 소라게를 해학적으로 그리고 있는 시이다. 무거운 삶, 붙박인 생애가 싫어서인가. 소라는 길을 나선다. “길을 나선 여름 날”이라고 첫 수를 긴장되게 명사 종결하며 마치 ‘다음 편을 기대하시라’는 투의 서사본능이 부지부식 간에 튀어나오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소라게 편력의 내력이 드러난다.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결국은 방향감각을 잃고 옆으로만 게걸음치게 됐다고. 그런 시행착오를 예감하면서도 마지막 수에 드러나듯 소라는 하염없이 걸을 수밖에 없다. 왜? “움직이지 않으면 썩고 마는 한나절”이니까. 시간만 썩힐 수 없는 게 또 우리네 인생 아니겠는가. 무거운 소라게의 옆걸음의 내력을 이야기하며 우리네 질풍노도(疾風怒濤) 같이 편력할 수 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도 빗대고 있는 시인 것이다.
그러다 마지막 수 종장 ““돌아 와!”/부르는 그곳/집 한 칸, 파도 한 채”에서 이야기는 다이내믹한 반전과 종결을 이룬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으나 돌아보니 또 그 물살, 파도 속. 결국 아무리 달아나려 뛰어봤자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그래도 살아 있음에 끊임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다이내믹한 생의 의지가 돋보이는 시이다.
4. 보살행 삶 자체가 생불(生佛)인 도저한 휴머니즘
늙은 산수유나무 귓불 닮은 열매 천 개
무엇을 듣고 있나 귀들이 탱탱하다
소리를 담아내느라 온몸이 출렁댄다
사람은 못 듣는 숲의 소리 불러 모아
발아래 미물에게 한 말씀 내리는가
쇠락한 등을 구부려 산자락을 받는 나무
산그늘이 결 풀어 그 한때를 적신다
오래된 뼈마디마다 맑은 피 차오르고
적막도 귓속을 닦아 경청에 드는 오후
-「천 개의 귀」전문
기다랗고 도톰한 귓불 같은 진자줏빛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늙은 산수유나무를 그리고 있는 시이다. 그 귓불 같은 열매 생김새의 직유와 “열매 천개”라는 진술에서 중생의 고통을 모두 다 보고 들으며 구제해주는 천수관음(千手觀音)보살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는 시이다.
세 수로 이뤄진 이 시 첫 수에서는 탱탱한 귀를 닮은 열매를 달고 출렁이는 산수유나무에서 소리를 듣고 담아내고 있는 천수관음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첫째 수에서 형상화한 이미지를 토대로 천수관음의 대자대비한 보살행을 그리고 있다.
특히 종장 “쇠락한 등을 구부려 산자락을 받는 나무”에서는 산자락으로 구부러진 고목 등걸을 산자락을 받쳐 부축하는 것으로 드러낸, 적극적 보살행위의 형상화가 돋보인다. 셋째 수 초장에서는 그런 고목에 산도 시원한 산그늘로 보답하고 있다. 서로서로 연민과 자비를 베푸는 적극적 행위에 대한 즉시발복(卽時發福)이 산수유 고목과 산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들의 풍경 속에서 즉시발복의 그 보살행을 보아내는 게 어디 수월한 일이겠는가. 셋째 수 중장과 종장에서 오래된 뼈마디에 맑은 피 차오르고, 귓속을 닦아 경청하는 것은 산수유나무이면서 시인이다. 시인은 이 대목에서 아예 산수유나무와 일체가 되어 천수관음의 보살행을 보고 듣고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시집『천개의 귀』에 실린 많은 시편들은 알게 모르게 불교 취향으로 흐르고 있다. 시인의 종교가 어떻고를 떠나서 타고난 긍정적 수용력과 낙천성, 그리고 부산할 정도로 다이내믹한 행동성이 불교의 대자대비한 보살행을 자연적으로 체득해 많은 시편들이 불교적으로 보일 것이다. 인생편력과 보이는 풍경들이 다 보살행일 정도로.
“어두워진 몸 하나가/가뭇없이 아프다//산이/산을 떠메고/생각이/생각을 부르고//전신을/주저앉히는//마음자리,/팔만사천”(「마음자리」전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삼라만상 다 내 마음자리에서 생멸한다는 불교 중심사상인 ‘유심’을 직접 제목으로 삼은 시이다.
단수로 짧은 시이지만 이번 시집 속에서 가장 본격적인 불교시로 읽힐 수 있는 시이다. 초장에서는 일체유심조란 것을 깨치지 못한 무명(無明)의 아둔하고 어두운 몸을, 중장에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동어반복, 혹은 역설이라는 불교 특유의 언어도단(言語道斷) 어법으로 참진 세계, 도(道)의 경지를 이른 것 같기도 한데 종장을 보니 다시 그걸 부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음자리가 하나로 여일해야 할 텐데 팔만사천이라고 했으니. 생각이 생각을, 마음이 마음만 부르다 전신을 주저앉힌다 했으니. 불교의 심오한 가르침에 도통한 마음자리라기 보단 아무래도 인간의 마음자리, 전신을 주저앉히지 않고 마음 가는 데로 행동하고픈 그 인간의 마음자리에 더 솔직하기에 훨씬 더 돋보이는 시이다. 무슨 한소식한 것처럼, 도통한 것처럼 불교 냄새나 풍기다 마는 트릭 같은 요즘의 적잖은 불교시 보다는.
“누군가를 절절히 사랑한다 말함은/깎아지른 암벽에 전각 하나 새기는 일/잘 벼린/마음 하나가/정(釘)이 되어/뚫어내는,//구들장을 뜨듯이 석산을 떠내어/머리에서 발끝까지 새김질을 다 해도/그래도/마음이 없는/너는 끝내/마애불,//저 홀로 어두워진 산 빛을 등에 지고/나 애써 무감한 듯 그대를 안아본다/흰 달빛/검은 침묵만/출렁이는/벽 하나를”(「저 마애불」전문).
깎아지른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을 소재로 삼은 시이다. 마애불을 절절한 신앙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긴 이의 간절하고도 잘 벼린 마음으로 보는 시인의 도저한 휴머니즘이 마애불처럼 새겨진 시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마애불을 첫 수에서는 부처님이 아니라 인간의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새긴 전각으로 보고, 둘째 수에서는 그런 마음이 없는 흔하디 흔한 돌로 보고, 셋째 수에서는 달빛과 침묵만 출렁이는 벽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그런 무심한 마애불을 애써 안으며 부처까지 포용해버리려는 시인의 그 연민과 그 인간적인 생생한 휴머니즘이 무심한 부처보다 훨씬 더 대자대비하지 않은가.
“미루나무 등걸에서 매미울음 잦아든 뒤/다급하고 재빠른 통화음이 대신 운다/온몸에 안테나 세워 타전하는 그날의 안부//벌레가 없어지면 일자리가 없어져요./분무기로 쏟아지는 독한 비도 참겠어요./찜통 속 컨테이너도 잘 견딜 수 있어요.//농약을 치는 일과 하루치 품삯 사이/언제 잡혀갈지 몰라 눈동자가 흔들리는/핫산은 방글라데시인, 불법체류 노동자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핫산」전문).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다룬 세 수로 이뤄진 시이다. 한 노동자의 다급하고 짧은 삶의 한 컷에 그들의 실태와 하고픈 이야기가 모다 담긴 시이다. 무엇보다 그것을 보고 듣고 전하는 천수관음보살 같은 시인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어 하찮은 소재와 서사일지라도 귀하게 읽히는 시이다.
첫 수에서는 매미소리 잦아든 일이 뭐 대수인데 외국인 노동자의 다급한 전화인가 하고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둘째 수에서는 순전히 노동자 육성으로 그들의 다급한 실상을 들려준다. 셋째 수에서는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빼어난 이야기 구성 솜씨로 그들의 비참한 실상을 듣고 요약해 해학과 궁금증을 유발하는 재미로 독자들에게 들려줘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사회에 환기시키는 것도 우리시대 관음보살행 아닐 것인가. 이렇듯 이번 시집에는 무심하고 침묵하는 불상(佛像) 같은 부처가 아니라 삶과 현실에서 인간적으로 깨달아가며 보살행을 자연스레 드러내고 있는 생불 같은 시편과 구절들이 눈에 많이 띤다.
“썩힌 것/쏟아내는/국립공원/화장실에//“당신이 버린 것이 완전히 썩는 데는?”/맙소사, 콜라병 일천년, 알미늄 캔 오백년 ,//잘 먹고/잘 썩혀야/잘 사는/것이라며//울 엄니 속 썩이면 꼭 썩을 년, 하셨다/욕먹고 배부른 그 말, 대물림도 마다않는” (「따뜻한 욕」전문).
속어와 욕, 표어 등 전혀 시적이지 않은 일상 언어들이 그것도 저속하게 쓰이고 있는 시이다. 그래서 시가 자연스럽고 참 재미있다. 재미와 함께 되짚어보고 싶은 지당하면서도 속 깊은 뜻과 정도 담고 있다. 그러면서 환경을 보호하자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공중화장실에 앉아 다급하게 볼일 보면서, 벽에 붙은 표어를 보는 잠깐 사이 참 많은 것을 되돌아보고 생각하며 참 많은 이야기와 뜻을 전하고 있는 시이다.
천성적으로 속 깊고 능동적이고 낙천적이고 해학적인 시인이기에 강정숙 시인의 「시편들에는 이렇게 하고픈, 보살피고픈 이야기로 넘쳐난다. 모든 면에서 긍정적이고 다이내믹한 에너지와 생체험에서 자연스레 도통하고 육화된, 부처님 같은 두루두루 속 깊은 뜻과 보살행의 휴머니즘, 그리고 넘치는 서사욕구로 현대시조에 활력 계속 불어넣어주시길 빈다.
끝으로 시인이 보낸 자기소개 말처럼, 늦은 나이에 등단하고 그 등단 십년을 훌쩍 넘긴 후에 첫 시집을 상재하는 소회이며 자기 고백적인 시 한편을 적어본다
푸른 시간의 조리개를 말없이 닫아걸며
때 되면 물이 드는 나무의 오랜 약속
그 약속 다지고 가는
바람의 떨림 모두
부드러운 혀를 가진 새들을 기다리며
산사나무 제 열매 물기 말리는 시간 모두
완성에 다다르는 일,
홀로 영어(囹圄)에 드는 일,
- 「열매의 시간」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