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천변(佛光川邊)의 산책로 / 박규환
아내가 눈 감고 떠난 지 오늘이 한 달째 되는 날이다. 내게 아내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아내 없는 새벽이 벌써 서른 번째다. 이렇게 여류세월(如流歲月)이고 보면 나마저 없을 새벽도 또한 머지않을 듯하다.
사람은 누구나 살다가 죽는다는 게 상식이고 나 또한 이따위 상식 이전의 상식에 어찌 범연했으랴마는 나나 아내가 죽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미신 속에서 살아온 느낌이다.
주위의 무수한 죽음을 보고 들어오면서 스스로도 결코 믿지 않는 이 완명(頑冥)한 미신이 어떻게 내 마음에 자리했다가 사라지면서 이 무서운 허탈을 대신 심어주는지 참으로 알 길이 없다. 결코 죽어서는 안되고 또 죽는 것을 현실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을 아내였건만, 그리고 나 또한 지금도 아내가 죽었다고는 느껴지지 않지만 실제로는 오늘도 나는 아내가 뒤따르지 않은 새벽 산책을 나서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지고 나서 3년하고 9개월 동안 우리가 사는 마을을 관류(貫流)하는 불광천변의 둑을 아침 저녁 산책길로 정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나다녔다.
이 불광천 냇물에는 우리 마을과 건너편 마을을 잇는 다리가 곳곳에 놓여있다. 우리가 걸었던 코스는 우리집에서 가까운 다리를 건너서 건너편 둑의 플라타너스의 숲이 정글처럼 우거진 보도를 따라가다가 다음 다리가 나타나면 그 다리를 건너서 집으로 되돌아오는 순서인데 이 장방형의 4변(邊)의 거리는 3천 보쯤 된다.
이 3천 보의 거리가 먼 거리는 아니지마는 살겠다고 안간힘하는 환자에겐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나를 따라오는 헐덕이는 숨소리가 혼자 걷는 나의 귀에서 사라지지 않으니 나는 지금 죽은 아내와 같이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새벽도 산책길의 노인들이 빠짐없이 눈에 띄는데 아내만이 끼지 못했고 따라서 나는 대열에서 낙오된 기러기처럼 외롭다. 여기서 자주 만나는 80의 고령인데도 아직도 정정한 노부인이 “마나님은 어쩌고 혼자냐.”고 물어오는데 나는 그만 쓸쓸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죽었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산책로는 처음은 부실한 나의 건강을 위해서 새벽마다 나 혼자 걷던 길이었는데 아내가 쓰러진 뒤에는 그의 회복을 위해 같이 걸었고 지금은 다시 나 혼자 걷는 길이 되었지마는, 이제는 결코 나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고 죽은 아내의 추억이 서린 길이기에 걷는다.
나는 이 3천 보의 거리를 조석으로 걸으면서 오래 살아야 되겠다느니, 건강이 어쩌느니 그런 것은 추호도 염두에 없다. 다만 3천 보의 발자국마다에 젖어 있을 가엾은 아내의 숨결을 더듬느라 내가 언제 집을 나서서 언제 집에 돌아왔는지 분간하지 못할 때도 없지 않다.
골목길을 나서서 다리 위에 서면 갑자기 바람이 차던 겨울 새벽, 언덕길가에 개나리 흐드러지게 핀 봄이면 아내의 여윈 손이 힘겹게 꽃가지를 꺾고자 했을 때 대신 내가 꺾어주면 그 수척한 얼굴에 짓던 고마운 표정, 여름날 석양에 갑자기 만난 소나기를 피해 길가의 남의 집 처마 밑에 들려 말없이 서 있던 우리의 모습이며 다리가 아프다면 길가에 쌓아놓은 벽돌 위에 같이 앉아 쉬던 일, 지금처럼 깊어가는 가을이면 포도를 덮은 플라타너스의 낙엽을 밟으면서 수연(愁然)해지던 계절의 애상(哀傷)…… 새벽이 점점 밝아오는데도 나의 발길이 그대로 어두움인 것은 끊임없이 고이는 눈물 때문인 듯, 지금 아내가 죽은 채로라도 되돌아와서 내 눈에 새벽을 불어넣어 줄 수는 없을까.
이 플라타너스 우거진 천변의 산책로는 물론, 나의 삶의 언저리 어는 한 곳에도 아내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니 어느 곳으로도 도망쳐야 이 아픈 추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알 길이 없다. 그런가 하면 날이 갈수록 나의 주위에서 아내의 숨결이 서린 것들이 하나 둘씩 없어져가는 것이 이렇게 허무하고 아쉬울 수가 없다.
먼 뒷날 아내가 되살아나는 기적이 생겨서 설혹 나를 만나러 오는 일이 있다치더라도 그땐 나도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알고 느낄 허탈에 때로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아이들은 저희 어머니 혹은 할머니가 죽었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다르다. 나는 그가 그냥 죽은 것만이 아니고 영원히 다시는 볼 수 없을 사람임을 생각한다. ‘영원……’ 말하기는 쉬우나 얼마나 먼 세월인가! 그 오랜 세월이 흘러도 오지 못하다니…….
십자가와 성모상을 죽는 날까지 안고 궁글던 아내의 종교에선 분명 영혼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지만 누가 영혼을 본 사람이 있는가. 영혼이란 게 있으면 또 무얼하는가. 영혼이 눈 앞에 나타나는 일도 없고 그 영혼과 이야기를 나눌 아무런 교섭도 없는 영혼이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것인가. 아내도 그걸 회의했음일까. 그의 노트에 마지막 남긴 글씨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신은 오지 않고……”라 읽혀진다. 얼마나 못 견디게 기다리다 할 수 없이 자기편에서 가야만 되었을까!
남들도 모두 당하고 겪어내는 일인데 유독 나만이 이를 객관화할 줄 모르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생사를 초월하여 절대무한의 경지에 소요코자 했다던 장(莊子)도 아내가 죽으니 항아리를 두들기며 노래했다니 그로써 나의 이 어리석은 회한을 변호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이들이 거실 한편에 십자가와 함게 아내의 영정을 모셔놓고 그야말로 ‘출필고 반필알’(出必告 反必謁)하는 절차인데 나 역시 나고 들땐 잠시 그 앞에 발을 멈춘다. 그런데 하루 아침 새벽 산책을 서둘러 나오면서 그 절차를 잊은데 생각이 미쳐 산책길을 나서다말고 되돌아와서 아내의 영정에 사과한 적이 있다. 살아 있을 때의 아내였다면 말없이 나가는 나를 그대로는 두지 않고 반드시 “어디 가느냐?”고 참견을 했을 터인데 지금은 나가는 나를 보고도 말이 없다. 그것이 죽었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돌이켜보면 젊어서 이래로 아내와 나는 겉으론 몰라도 속으론 남못잖게 다정한 부부였지만 그렇데도 무척도 많이 다투며 살아왔다. 피차에 성격적인 차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이제 생각하면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서로가 상대방에 무관심할 수 있는 아량이 부족했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그냥 나가는 나를 보고만 있었던 아내의 영정이 차라리 이상했다. 살아 있었다면 이 사소한 일로 또 다투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지난날 읽었던 헤밍웨이의 어떤 소설(킬리만자로의 눈?)이 생각났다. 정확한 건 기억에 없으나 첫 번째 아내는 지극히 사랑했는데도 끊임없이 다투면서 살아왔는데 다음번 아내는 그다지 사랑하지도 않았건만 언제나 평화롭게 살았더라는 뜻의 이야기다.
그래 나는 항시 다투면서 살아왔던 아내와의 생활이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자위(自慰)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내게서 다툴 사람이 없어진 것과 함께 사랑할 사람도 없어진 셈이다.
나나 아내가 70과 60을 넘긴 지 한참 지났으니 그 죽음을 애석해 할 이유가 희석(稀釋)되어 남들에겐 무심히 지나칠 이정표(里程標)에 지나지 않아 나의 꼴이 혹시는 노인의 청승으로 비쳐질 게 분명하지만 죽음의 아픔은 젊고 늙음과는 상관이 없으니 어쩌랴.
내 앞으로의 남은 세월이 얼마일지 모르지마는 아내가 먼저 테이프를 끊은 이상 길지 않을 것만은 분명하다. 이 나이 되면 그러기로 되어 있으니 말이다.
남은 세월, 나의 기력이 다하는 날이 오도록까지 이 불광천변의 새벽 산책길이 아내의 죽음을 조상(弔喪)하는 길이고 내가 죽지 않은 한 햇볕과 안개와 비와 바람에도 지워지지 않을 아내의 기억을 길이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