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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를 위한 신앙 이야기 3.교육자료 2010/08/15 16:20
http://blog.naver.com/shineden/60113125824
평화의 나라로 (부제: 평화열차)
제 1 편 기회편
1. 인생 정거장
2. 생일 역(驛)
3. 피난 역(驛)
4. 시험 역(驛)
5. 만남 역(驛)
6. 선택 역(驛)
7. 자살 역(驛)
8. 실패 역(驛)
9. 우울 역(驛)
10. 가난 역(驛
11. 미움 역(驛)
12. 불면증 역(驛)
13. 슬픔 역(驛)
14. 질병 역(驛)
15. 장애 역(驛)
16. 원망 역(驛)
제 1 편 기회편
이끄는 말
인생은 반평생입니다. 어릴 때는 인생이랄 것 없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철모르고 성장합니다. 젊어서는 미래를 위한 열정을 가지고 분주하게 사느라고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나가지요. 가정을 이루고 직장을 갖고 자녀를 낳고 기르는 중에 인생이 무엇이냐는 생각을 가금씩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노년이 되면 뒤를 돌아보게 되고 자신의 인생역정을 점검하게 됩니다. 그러니 실로 반평생만 인생이라는 것을 느끼며 사는 꼴이 됩니다.
마음이 평안하려면 천국이 나와 연결되어야 하고, 정신이 안정되려면 천국의 상태가 내 속에 이루어져야 하고, 육신이 건강하려면 항상 희망에 찬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희망의 근거지인 천국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 열차인 평화열차에 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평화열차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기관사인 이 열차를 타라고 기적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 정거장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인생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때입니다. 인생은 고난이라는 정거장을 통과하며 많은 것을 경험합니다.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떠날 때는 누군가가 나를 향하여 손을 흔들어 주는 장면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기차역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게도 합니다. 기차역은 많은 이야기와 추억을 안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온갖 애환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을 기차 정거장으로 옮겨 봅시다.
1. 인생 정거장
오늘도 우리는 어느 기차역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 곳의 정거장을 지나왔는지, 앞으로 몇 곳을 더 거쳐 갈지, 주위의 풍경은 어떨지 모릅니다.
기차역은 못 다한 말을 전하기 위해 뛰어가지만 그 말을 전하지 못해 눈물만 삼키는 곳, 떠나간 이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버릇처럼 서성이는 곳. 또는 보고 싶다는 말을 천만번 해도 그 그리움을 다 전할 수 없었던 이를 다시 만나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곳, 기차역은 그런 곳입니다. 지나간 추억을 돌아보며 마침표를 찍는 곳인 동시에 언젠가는 추억이 될 또 다른 이야깃거리에 관한 말머리를 끄집어내는 곳입니다.
기차역 광장에선 슬픈 이별의 눈물도 보이고, 성공을 기원하며 두 손을 흔드는 응원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가하면 고향에 내려와 옛 추억을 상기하면서 텅 빈 마음을 달래며 자꾸 뒤를 돌아보는 허전한 발걸음이 보이기도 합니다. 인생은 가만히 있거나 몸부림을 치거나 세월이라는 기차를 타고 똑같이 달려갑니다. 입춘이다 우수다 하지다 동지다 등의 계절의 바람이 스쳐 지나갑니다. 입학과 졸업, 취업과 실업, 사랑과 이별, 결혼과 이혼, 성공과 실패도 경험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첫째 이야기 : 최은정씨의 종착역
참으로 오랜만에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탄 것은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작정 나서보고 싶어서였다. 쾌속으로 달리는 바퀴소리와 함께 마음이 달리고 있었다. 연도에는 모내기가 한창이고, 둔덕에는 삘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우리의 삘기 꽃은 유럽의 ‘히이스’와 같은 느낌이라는 말을 들었다. 듬성듬성 소나무가 지나가고, 속살이 드러나는 황토들이 세차게 달리는 바퀴소리에 몸을 움츠린다.
나는 그런 것을 보면서 명상에 잠긴다. 지나간 일들이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처럼 이런 저런 일로 형상화되면서 꺼졌다간 살아나고, 다시 꺼진다. 나는 시방 여행하는 기분으로 달리는 차 속에서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것들에 시름을 놓고 있다.
얼마를 달렸을까. 정거장에 멈췄다. 극락이라는 이름이 붙은 강을 건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승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기분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현실을 떠나 환상의 나라로 가는 것과 같은 말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그런 환상 속의 꿈을 안고 살아 온 것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 멈춘 곳은 정거장 이름이 극락장이다. 나는 묘한 감상에 사로 잡혔다. 내가 정말 극락에 가고 있다는 것인가. 기차는 다시 들길을 가르며 힘차게 달렸다.
다음에 닿은 정거장도 잊히지 않는 인상적인 이름이다. 늙어서 편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늙어서 편하라는 뜻인가. 노안(老安)이다. 사람이 살다가, 가장 좋은 것이 후반이 좋아야 한다고들 하지만, 늙어서 편한 것이야 말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노안을 지나서 차창 밖으로 벌어지는 풍광은 더없이 아름다운 경관을 펼치고 있다. 푸른 둑과 지평선이 하나로 맞닿아 일망무제로 시야를 넓힌다. 나는 그 속에 빠져들며 새삼 자연의 아름다움을 실감한다. 탁 트인 시야로 인해 가슴이 후련해진다. 자질구레한 일들이 아득한 기억 속으로 모두 사라져 간다. 이래서 마음이 편해지고 몸이 건강해져서 ‘늙어 편안하다고’ 한 것일까?
나는 이 노안지대를 달리면서 마음이 저절로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질없는 것들에 매여 마음을 얼마나 어지럽게 하였던가. 하늘은 끝없이 맑게 펼쳐진다. 내 마음도 따라서 청명하게 펼쳐진다. 이러는 중에 내가 젖 먹고 자라던 영산포를 훌쩍 지났다.
영산포는 나의 수필 밭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영산포에서 추억이 넘실대는 유년 이후의 소녀시절까지를 보냈다. 그래서 그 영산포에는 아름다운 기억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몇 개의 정거장을 거쳐 학교(鶴橋)라는 곳에 닿았다. 그곳에서 나는 선로수가 찻길을 바꾸는 것을 보았다. 기차는 그 바뀌어 진 선로를 따라 달려간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인생길도 예외 아니란 생각을 하였다.
내가 부모를 떠나 결혼을 한 것도 그와 같은 것이고, 내가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도 그런 것이다. 인생은 나면서부터 정해진 길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걸어온 길이 그런 길인지도 모르나, 분명한 것은 선로수가 찻길을 바꾸듯이 인생의 삶 길에도 변화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생각 같아서는 더 바뀌어 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목포가 가까움에 따라 또 하나의 야릇한 지명과 만난다. 몽탄(夢灘)이라는 곳이다. 내 남편의 탯줄이 묻히기도 한 이곳 몽탄, 꿈 몽자, 여울 탄자라면 꿈꾸는 물이란 뜻일 텐데, 물을 인생에 비유하면 삶 또한 일장춘몽이란 뜻으로 통하는가 하면, 차라리 꿈에서도 탄식한다는 夢嘆(몽탄)이라는 느낌이 더 어울린다. 꿈에서 탄식을 한다면 생전에 그처럼 컸을 후회는 없을 것이다. 인생의 길이 고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살아가는 길에서 후회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더 없이 어려운 것이다. 이런 인생을 암시라도 하듯 누가 지었는지 몽탄이란 지명은 잘 지은 이름이다. 내가 만일 죽는다면 영원한 그 꿈속에서 무엇을 탄식하게 될 것인가 ?
다시, 몽탄을 뒤로하고 닿은 곳이 일로(一老)라는 곳이다. 이 지명을 풀어 말하면 인생은 누구나 한 번 늙는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렇다. 한 번 나서, 한 번 살다 죽음으로 간다. 나도 시방 그 길을 따라 한 번 늙는 길로 가고 있다. 참으로 묘한 지명들을 거치면서 꿈속에서 꿈을 꾸듯 나는 지금 달린다.
일로 역을 지나 마침내 기차는 목포역에 닿았다. “목포-”하는 애잔한 목소리의 노래가 들린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다. 나는 목적지도 없이 떠나 왔지만 이제 더 가려해도 갈 곳이 없다. 어느 땐가는 나의 인생길도 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종착지에 닿을 것이다. 그 종착지가 어떤 곳의 어떤 모양일지는 알 수가 없다. 극락강을 건너 극락역을 지나고, 일로 역을 거쳐 몽탄역을 거쳤듯, 내가 닿을 종착역도 그런 경로의 곡절을 안은 길임에는 분명하다. 나는 차에서 내려 유달산에 올라 이난영의 노래를 거듭 환청하면서 탁 트인 바다의 수평선을 보았다.
바다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점점이 떠서 저마다 가고 있다. 내가 걸어온 인생의 길처럼 물위에 떠 있는 배들도 파도를 가르며 저마다 제 길을 간다. 나는 오늘 호남선의 종착역 목포에 내려 기차의 종착지와 더불어 인생의 종착역도 생각해 본다.
기적을 울리며 달리는 기차는 인생열차를 연상하게 합니다. 조용한 간이역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풍경은 인생을 살아가는 현장을 느끼게 합니다. 어디로 그렇게 바쁘게 가는 것일까요? 무엇하다가 지금 오는 것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그렇게 오고 가는 발걸음이 아닌가요?
둘째 이야기; 평화열차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원로가수 최희준씨가 불러 히트시킨 60년대 후반 대중가요 한 구절입니다.
전영록 씨가 작사 작곡한 이런 노래도 있습니다.
떠나면 그만인데 울기는 왜 울어
나그네 갈 길에 웃으며 보내 주
바람이 부는 대로 정처 없이 걷다가
그대 생각이 나면 다시 찾아오리다.
이런 노래를 들으면 한없이 외로워집니다. 인간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 가장 외로워집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열차에 몸을 싣고 이리저리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에게 평화열차를 타라는 방송이 들립니다. 누구에게나 들리지만 타는 것은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여 평화의 나라로 갈 수 있도록 평화열차를 마련하셨습니다. 이 기차는 타기만 하면 목적지에 데려다 줍니다.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기차는 어떤 차별도 하지 않습니다.
이 열차의 기관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의 삼년 반이라는 짧은 삶의 순간순간은 인간을 맞아들이는 정거장으로 짜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고난, 슬픔, 눈물은 인간을 이해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경험하신 그 분의 삶입니다. 그 삶은 그 분이 우리의 인생을 알고 있다는 증거이며 우리에게 함께 가자고 내미시는 손길입니다. 그분은 자기와 비슷한 장면을 경험한 이들에게 나와 같이 평화열차에 몸을 실으라고 손을 내미십니다.
인생에서 예수님과 비슷한 고난의 경험을 하게 된 사람은 평화열차를 탈 기회가 온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방송에 귀를 기울여 평화열차에 타면 그 때부터 목적지를 향해 예수님과 함께 안심하고 갈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함께 살아가면 그것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528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2. 생일 역(驛)
생일이 기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미역국을 끓여줄 엄마가 없는 집에서는 생일이 싫습니다. 슬픔을 안고 출생한 사람은 생일이 싫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든지 사랑받을 존재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장차는 짝이 될 사랑의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복 받을 자녀들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의 꿈을 가져야 합니다.
생일에는 사실 나를 낳아준 엄마가 미역국을 잡수셔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유치원 아이들까지 친구들을 초청해서 생일잔치를 해달라고 조르기도 합니다. 철없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생일에는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몫, 사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세상에서 살아갈 시간과 공간을 갖게 되었고, 그 질이 어떠하든 먹고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만한 값을 해야 하는 몫이 있습니다.
생일에 대한 숱한 애환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출생했을 때에 일어난 일들을 후에야 알았지만 그 상황은 지금도 마음속에 그려지는 것입니다. 인생이 너무나 고달파 ‘생일을 잊어버리고 산 때도 있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일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직도 건재하니까요. 아무리 고달픈 인생이라도 생일이 주어졌다는 것은 이 세상과 관계를 맺은 것이고 또 이 세상에 보내주신 이의 뜻이 있으니까요.
생일을 맞을 때마다 나를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아야 합니다. 나의 생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는 일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생일을 맞는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첫째 이야기
어느 가정에서 곱게 자란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했던 옛날 어떤 사람이 추운 겨울에 다리를 지나가다가 애기 우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이상해서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았더니 한 엄마가 혼자서 애기를 낳고 얼어 죽어 있었답니다. 엄마는 자기 옷을 다 벗어 애기를 둘둘 말아 가마니를 덮어씌운 상태였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이 엄마의 시체를 경찰에 의뢰하고 애기는 집으로 데리고 와서 지금까지 키운 것이 바로 자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큰 충격을 입고 입을 벌린 채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아들이 엄마의 묘지를 아느냐고 물어 그곳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아들은 묘의 땅바닥을 치면서 어찌할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가슴 아픈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과거를 현재로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은 과거를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셨을 때 말구유 밖에 자리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 처지는 이 땅의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슬픈 운명일 것입니다. 출생에 있어서 자기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과 의논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제는 미래를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그 다음 인생의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은 정서가 메마르고, 감정이 칼날 같고, 눈물이 메마른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삭막한 세상이라고들 말합니다. ‘묻지마 살인사건’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은 정서가 상식선을 넘어간 증거입니다. 부부싸움에 화를 못 참아 자기 집에 불을 지른 사람도 있습니다. 그 일로 자녀들이 연기에 질식해서 죽도록 한 사건은 감정을 순화시키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는 증거입니다. 유산을 주지 않는다고 어머니를 고소한 아들을 검찰에서 구속한 것은 가정의 윤리가 무너져가는 증거입니다.
출생의 고통을 알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은 본인과 같은 과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을 위해 도와주며 사는 것이 보람 있는 길입니다.
출생은 사람이 이 세상으로 오는 길입니다. 그 길이 어떠했던 이 세상에 온 다음에는 미래를 향해 힘차게 발돋움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고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매어서 사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개구리가 뛰기 위해 발을 모으듯이 미래를 향해 생각을 모으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이제 주님이 운전하시는 평화열차에 타서 기구한 말구유의 출생지를 갖고 계신 예수님과 새로운 미래의 인생을 함께 계획하는 시간을 가져봄이 좋을 것입니다.
둘째 이야기 : 모태신앙(母胎信仰)
H대학교 K 교수의 간증입니다.
나는 기독교 가정 출신이나 중3때까지만 교회에 나갔습니다. 성도들의 분쟁과 교회의 여러 부끄러운 행위를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성경기록들이 문학과 철학의 합리적 사고를 전혀 만족시켜 주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떠난 지 24년, 세 아이 엄마인 아내의 위암 수술 위기를 만났습니다. 나는 성경을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재발 확률 50%, 의학과 철학이 책임질 수 없는 이 문제를 하나님은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성경과 기도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입원한 병원에서 출근하려고 광화문 쪽을 향해 걷고 있었는데 선명한 문장이 번뜩이며 지나갔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린도후서 4:18) '보이는 것을 찾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찾으라. 보이는 것은 사라지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나는 그 문장이 고린도후서에 있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그 후 성경관점이 달라지면서 말씀의 광맥을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속히 답변해 주셨고, 주신 말씀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으며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 주시고 그 분의 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소위 모태신앙이라고 말하는 기독교가정의 자녀들 가운데 이미 기독교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귀한 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업이나 기술이나 어떤 분야라도 새로운 것은 그것에 기반을 잡을 때까지는 수다한 고생과 갈등을 경험해야 합니다. 초보자는 당면한 일에 대한 어려움과 주위환경에서 오는 많은 갈등을 다 겪어야만 합니다. 그러니 모태신앙의 부모들은 신앙의 길에서 이러한 모든 고난을 먼저 다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후대에는 똑같은 갈등을 갖지 않도록 해 놓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예수님의 탄생은 이미 인간 구원을 위한 방향을 정해 놓고 평화의 나라로 출발한 것입니다. 모태신앙자도 자신의 삶을 평화 열차에 쉽게 탈 수 있는 조건이 주어졌음을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위에서 주는 자극과 영향에 너무 민감하지 말고 부모로부터 전해진 신앙의 큰 물줄기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모태신앙이란 유리함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누가복음 2:1-7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 하라 하였으니 이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 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 이러라”
이 땅에서 출생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외롭고 쓸쓸했던 베들레헴 말구유의 모습을 상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아무도 그 분의 생일을 축하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스스로도 자기의 생일에 대해 일체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직 평화의 나라인 천국의 선포에만 열중했습니다. 큰 사명 안에서 생일 같이 작은 것들은 다 녹아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과거에 붙들려 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과거는 아무리 불행하거나 화려해도 현재를 좌우하지 못합니다. 미래를 새로운 페이지로 삼고 인생의 그림을 그려 나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찬송가 114장(1절)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저 하늘의 별들 반짝이는데 그 어린 주 예수 꼴 위에 자네
3. 피난 역(驛)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
이 노래를 들으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옛 고생하던 시절 생각에 잠기는 이도 있습니다. 피난살이 50년이라고 처량한 노래를 부르면서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나뭇짐을 지고 사는 노인부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6.25 동란 이후, 북한의 고향을 그리면서 통일이 되면 고향에 빨리 돌아가겠다고 한 발자국이라도 고향땅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은 곳이 강원도였답니다. 노부부는 그렇게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고향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그곳에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피난의 애환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잠잘 곳이 없어 새우잠을 자며 고생하던 시절, 먹을 것이 없어 쓰레기통을 뒤지며 눈물과 한숨으로 피난살이를 했던 옛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로 세월을 낚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나면 이제 인생의 한 고비를 넘어 평화의 나라를 생각할 단계입니다.
첫째 이야기
피난생활의 서러움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나를 살려주신 것을 간접적으로 느낀 것은 6.25를 만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피난 갔다가 돌아와 보니 집은 모두 불타 버렸고 곳곳에 시체와 파편덩어리 뿐이었습니다. 판잣집을 만들어 집이라고 꾸미고 사는데 아이들을 제일 유혹하는 것이 엿장수의 가위소리였습니다. 엿 사먹을 돈은 없고 유일한 방법이 포탄 껍데기를 주워 오면 엿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집 건너편 친구가 운 좋게 좀 큰 쇳덩어리를 주웠습니다. 아마 그 정도면 제법 엿을 많이 바꾸어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방망이 수류탄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분해하려고 돌멩이로 치다가 폭발해서 두 손이 날아가 버렸고, 얼굴은 형체를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피투성이로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나도 그 때 그가 포탄을 주워온 것을 알았으면 그 옆에 가서 엿을 얻어먹으려고 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 친구의 상황은 그 후로 영영 듣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가 포탄 주운 것을 몰랐던 것이 다행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자리를 피한 것이 오늘의 나를 존재케 했습니다.
피난생활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고 삶의 형태를 바꾸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깨달을 때 예수님의 평화열차에 타라는 정거장임을 알고 용단을 내면 그 때부터 운전사이신 기관사이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6.25의 참상은 통계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6.25가 남긴 이 땅의 전쟁고아가 59,000명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피난길에 애기를 낳은 후 간호자를 얻지 못해 핏덩이만을 놓아두고 죽은 엄마도 있었습니다. 그 뒤 애기만 고아원으로 넘겨진 예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살아 있다면 지금 이 사회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 피난 중에 애기를 낳아서 그런대로 목숨은 구했으나 그 후에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서 슬픈 결단을 한 부모들도 있었습니다. 부잣집 앞에 버리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버린 아이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들이 전쟁고아로서 외국에 입양되고 또 이 사회 어느 구석에서 홀로서기를 하면서 다 외로운 눈물의 길을 걸어왔던 것입니다. 전쟁 세대는 피난 보퉁이를 등에 메고 군중들의 흐름에 따라 무조건 피난을 했던 상처 입은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학도 의용군으로 325개교의 2020여명이 희생을 당했으니 그 가족들이 오늘의 젊은이들을 볼 때 어떤 마음으로 보겠습니까? 6.25로 인해 평생토록 장애인인 상이용사들이 71만 7083명이나 됩니다. 그중에는 지금도 병원 침대에서 다른 사람이 도와주어야만 거동을 할 수 있는 전상자가 많으니 이들이 6.25를 맞는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6.25로 인해 운명이 바뀐 이들도 많습니다. 굶주림과 추위에 떨던 생각으로 내 자식에게는 이런 고통을 주지 않아야지 하면서 뼈아픈 고생을 감수하는 부모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절약해서 먼저 집을 장만하고 양식을 모아두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기성세대는 6.25로 인해 젊은 시절을 잃어버렸고 문학이나 예술을 말하면 밥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기준을 두었던 시대적인 불운아들입니다. 이들은 지금이라도 평화열차에 타서 예수님의 피난생활의 고통을 함께 해야 합니다.
둘째 이야기
고뇌의 운명을 겪으며 산 사람이 있습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8월 28-1832년 3월 22일)는 프랑크푸르트 출생으로,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자로서 세계적인 문학가이며 자연 연구가이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상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법률가이며 황실 고문관으로서 엄격한 성격이었고, 시장의 딸인 어머니는 명랑하고 상냥하여 아들의 훌륭한 이해자였습니다.
7년 전쟁(1756∼1763) 때에는 프랑스에 점령되어 평화롭고 부유했던 괴테의 집도 프랑스 민정장관의 숙사가 되고,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계획 역시 중단되었으나, 괴테는 자유롭게 프랑스의 문화에 접할 기회를 얻었으며, 15세 때 그레트헨과의 첫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녀는 후일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머무르면서 J. G. 헤르더를 알게 되어 종래의 로코코 취미의 문학관은 철저히 분쇄당하고,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근처 마을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과 목가적인 사랑을 하였고 약혼까지 하였으나, 결국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했습니다. 그 후 회한과 마음의 부담 속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이 때 겪은 내적 체험이 훗날 그의 시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만년의 문학작품으로 <파우스트>는 한 인간의 생애가 전 인류의 역사에 뒤지지 않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엄한 드라마입니다. <파우스트>는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831년에야 완성된 생애의 대작이며, 세계문학 최대걸작의 하나입니다. 그는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가였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의 피난생활을 경험했지만 평화의 나라를 흠모하며 방향을 흐트러뜨리지 않았으므로 역사에 길이 남을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위대한 성공자들은 거의가 핸디캡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했습니다. <실낙원>을 쓴 밀턴은 시각장애자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시를 썼고, 베토벤은 귀머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작곡을 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그의 비극적 결혼으로 인해 자살 직전까지 가는 아픔을 겪었기에 그 놀라운 교향곡 <비창>을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스티븐 호킹 박사는 1962년 루게릭병에 걸려 전신마비가 되었지만 자신의 연구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기에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24세 때 전쟁터에서 불구의 몸이 되었고 28세 때는 포로가 되어 5년간이나 수감되었습니다. 오랜 좌절 끝에 세금 징수원이 되었으나 영수증을 잘못 발행하여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58세 때 감옥 안에서 불후의 명작 <돈키호테>를 집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핸디캡이나 불행을 플러스로 바꿀 줄 알았던 것입니다. 뺄셈을 덧셈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모든 성공의 열쇠입니다. 골프공의 겉 부분은 울퉁불퉁합니다. 원래는 아주 매끄러웠지만 표면에 홈을 파서 굴곡을 만든 것이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는 원리가 발견된 후로는 굴곡 있는 공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사람에게는 거센 시련과 실패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련과 실패 후에도 다시 굳건히 일어나는 패기입니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선물입니다. 이 믿음이 시련을 이기게 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함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과감하게 평화열차에 탄 것입니다.
마태복음 2:13-15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급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급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급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피난생활이란 어떤 종류이든 고달픈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릴 때 피난생활을 했습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런 환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말구유에서 시작하여 피난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과거에 경험했던 피난시대를 원망하면 무엇합니까? 환경을 한탄하면 무엇합니까? 과거를 고칠 수 있는 위인은 없습니다. 시급한 일은 지금부터 빠른 시간 내에 나의 생각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돌리는 일입니다.
피난의 쓰라린 경험을 느끼는 사람은 바로 그 때가 예수님의 생애에 동승하는 기회입니다. 예수님이 운전하시는 평화열차를 타고 그 다음의 순서를 기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좋은 그림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찬송가 438장(3절)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4. 시험 역(驛)
이 땅에 있는 인간은 그 누구나 다 시험을 받습니다. 그 시험이 한 단계를 올라가기 위한 시험이든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든지 인간은 안팎으로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신은 인간을 시험이라는 틀을 통해서 사명을 주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시험을 나쁜 것으로만 보지 말고 하나의 치러야 할 단계라고 보는 이에게는 새로운 미래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중에는 시험에 실패했다고 마치 인생이 실패한 것인 양 죽음을 선택하는 이도 있습니다. 시험은 글자 그대로 시험일뿐입니다. 인생의 한 계단을 올라가는 단계일 뿐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길에 영향은 주지만 결정을 하지는 않습니다.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딛였다고 인생 전체가 망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길 앞에는 많은 종류의 시험지가 있습니다. 내가 머뭇거리는 일 앞에는 항상 생각하라는 신호가 주어집니다. 온갖 종류의 시험을 겪으면서 승리의 길로 매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며 평화열차에 오르십시오.
첫째 이야기
기독교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소년시절을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한번은 아버지와 함께 수영장에 갔습니다. 그는 두 팔을 힘차게 내저으며 “아빠 날 봐요 날 봐요!”하고 외쳤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지금 물 위에 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한 발을 수영장 밑바닥에 붙이고 물에 떠있는 척 아버지에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 철인은 회고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한 발로 땅을 짚고 물에 떠 있는 척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는 이런 믿음을 “시험되지 않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유혹이 있을 때, 환난에 처하였을 때, 나에게 희생이 요구될 때 여러 가지 시험을 거쳐서 마침내 합격된 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앞에 분명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은혜를 못 느끼는 것은 은혜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은혜가 가려진 것입니다.
둘째 이야기
모범적인 사업체인 유한양행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이 회사는 1926년 고 유일한 박사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1962년 주식을 상장했습니다. 대표적인 제품으로는 의약제품으로 ‘안티푸라민’(외용 진통소염제)같은 것이 있습니다.
고 유장로님은 신앙본위로 이 회사를 경영했습니다. 그는 그 사업을 하나님이 주신 사업으로 알고 진실되게 경영했습니다. 그 진실이 오히려 정부기관에는 비정상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어느 날 세무사찰이 내려졌습니다. 그 회사는 담담한 자세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응했습니다. 세무원들은 너무나 깨끗한데 놀라서 이럴수가 없다고 감탄하고 돌아갔습니다.
며칠 후 국세청에는 이 회사로부터 청구서가 한 장 날아왔습니다. 세무사찰을 하느라고 세무원들이 우리 회사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그 대금을 국세청은 지불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구서를 받은 국세청장은 대금 지불을 결재하면서 감탄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평화열차 일등석에 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평화열차를 타고 가는 사람은 이미 정신적으로 성숙한 자리에 올라온 것입니다. 정신적인 성숙을 위해서는 단단한 것도 먹어서 소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분별력이 없습니다. 무엇이 위험한지도 잘 모르고 우선 좋으면 다 합니다. 곧 위험이 오는지도 모르고 찻길에 달려 나갑니다. 그와 같이 어린아이 신앙자는 신앙에 위기가 닥쳐와도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의 달콤한 유혹도 자기 망하는 줄도 모르고 따라갑니다. 이단자의 유혹에도 쉽게 넘어갑니다. 우리는 모든 세상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숙을 위해서는 이해하려는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항상 자신에게도 실수가 있고, 나의 견해가 항상 옳은 것이 아님을 인정할 줄 아는 이해심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만 항상 감독자요, 지휘자가 된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성숙의 단계는 넓은 이해심을 갖는데서 나타납니다.
시험이 오는 것은 기회가 온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다음의 상황이 달라집니다. 선하게 사용했으면 선한 열매가 반드시 맺히는 법이요, 나쁘게 사용하였으면 나쁜 열매와 결과가 자기에게 오는 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흔하게 보는 장면에 유혹을 당합니다. 세상에서는 어쩌다가 일확천금을 잡고, 줄을 잘 서다 보면 한보따리의 횡재를 만나는 투기심을 자극하는 여건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도 그렇게 살려고 하고, 특히 신앙생활도 그런 식으로 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열차에 탄 사람은 길이 다르고, 방법이 다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대원칙을 정하신 하나님이 그 누구의 인생도 예외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고로 주어진 기회를 선하게 사용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4:1-1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예수님도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 분이 시험을 당하신 것은 이 세상에는 이런 저런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며 예수님 같이 시험을 이기라는 모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생은 한평생 시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나가는 것이 실패를 줄이는 길이 됩니다. 우리가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유혹과 테스트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험하신다고 하는 것은 테스트입니다. 저울에 달아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의 시험은 유혹을 의미합니다. 유혹은 인간의 지 정 의의 모든 면을 자극하고 변질시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지. 정. 의에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활환경, 성격, 신앙의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약하고, 또 이성에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인정에 약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족들의 요청에 꼼짝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오만하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점을 가지고 있는 그 부분에 유혹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약점 중에 하나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입니다. 집에서 사소한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주먹이 오가는 큰 싸움으로 변하게 되고, 어느 성도가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해서 교회에 안 나오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이 약점을 이용합니다. 그럴 때 믿음으로 대처하지 못하면 인생에 먹칠을 하는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자기의 지혜를 대결의 무기로 삼는다면 경쟁의 상대가 더 높이 밀어붙입니다.
인간이 고난을 당할 때는 바로 옆에 시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몸이 지치고 피곤할 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주변에 사람이 떠나고 외로운 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이 때 사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게 합니다. “네가 만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사용했던 용어입니다. 이것은 영적존재인 인간에게 누구에게도 유혹하는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물리치고 구원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의 용어를 빌린다면 삶의 질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떠한 경우를 당한다해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할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시험을 당하신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평화열차에 타고 간다면 그 인생은 반드시 승리로 가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그리스도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평화 열차에서 방송하는 하늘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찬송가 342장(1절) 너 시험을 당해 죄짓지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치라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 주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
5. 만남 역(驛)
독일의 시인 한스 카롯사는 "인생은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만남이 인생을 좌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만남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 언제 만나느냐, 어디서 만나느냐? 하는 여러 조건들 때문에 불행하게 사는 이도 있고 인생을 복되게 사는 이도 있다. 인생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을 종교라고 하고, 이성을 만나서 동반자로 살아가는 것을 가정이라고 하고, 그 어떤 계기를 이루어 일하는 여건을 얻게 되는 것이 직장이요 사업처이다. 우리의 지나온 발자취를 지울 수 없는 인생의 길 -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길도 두 번 반복이 없는 유일한 시간의 길을 우리는 무수한 일들을 이루어 가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재벌의 아들이 여행 중에 바닷가에서 어느 여자를 만나 마침내 부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자는 팔자가 아주 좋은 여자라고 말합니다. 어떤 남자가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느 회사 사장의 무남독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 회사를 이어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류 뉴스감이요, 급행열차를 탄 그 남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인간의 만남 속에는 여러 가지 증명할 수 없는 이끌림과 인연과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부의 만남, 스승과 제자로서의 만남, 친구로서의 만남, 동역자로서의 만남, 이웃으로서의 만남, 교우로서의 만남 등 정말 신비한 인간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팔자라고 하고, 운명이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섭리라고 합니다.
인간의 삶을 생각하면 신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도 모르는 시간에 부모에 의해 내가 출생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갔는데 나는 그 숱한 가시덤불을 비집고 오늘까지 자라났습니다. 많은 풍파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알게, 모르게 많은 만남을 통하여 여기까지 도달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의 글에 한 남자가 여인을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를 연구해 보았더니 그 여인이 사용하는 화장품에서 나오는 냄새가 자기 어머니에게서 나오는 냄새와 동일한 것이었다고, 그래서 그 여인을 사랑하게 된 것이라고 하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만남이란 시작이 단순할 수 있어도 내용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한 여인이 그 남자를 만났기 때문에 자기의 운명이 달라졌고, 한 남자가 그러한 여인을 만난 것이 그의 일생에 방향을 결정지은 예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인생의 일은 다시 되돌릴 수도 없고, 연극과 같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신비함 속에 들어있습니다.
첫째 이야기
스페인이 낳은 축구스타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경기 중 부상을 입어 1년 반 동안 몸의 절반이 마비되어 병원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병이 나아도 축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축구가 생명인 그는 미래가 암담했습니다. 어느 날 그를 간호하는 간호사가 기타를 갖다 주며 "심심할 테니 기타나 배워보라"고 했습니다. 이글레시아스는 음악에 재미를 붙이고 열중하여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취미가 그의 인생을 바꾸는 역전의 원인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는 퇴원 후 더욱 음악에 심취하여 마침내 싱거가수로 나섰고 그 후에는 유럽을 흔드는 대 팝싱거 가수가 되었습니다. 아주 단순한 만남 속에서 간단한 말 한마디에 한 사람의 미래가 바뀌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평범한 것을 가볍게 여기기 쉽습니다. 평범한 것 속에 비범이 있다는 것을 잘 받아드리려 하지 않습니다. 기적이란 빨간색을 띄고 사람들이 잡을 수 있도록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들 속에 섞여 있습니다. 인생의 변화는 하늘의 소리에 민감한 사람에게 옵니다.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진리의 이야기 속에 자신의 인생의 기적이 될 만한 것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비한 일들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평화열차에 타라는 방송에 귀를 기울여 과감한 결단을 할 때 인생에 금자탑을 이루는 일이 시작될 것입니다.
둘째 이야기 : <배꼽>이란 책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한 젊은이가 노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옛날의 그 황금시절에는 사람들이 눈으로 신을 보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신을 만났고, 신은 땅 위로 걸어 다녔다고 했습니다. 신은 사람들을 불렀고, 사람들은 신과 아주 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렇지 않은가요? 왜 신은 이 땅을 버리셨는가요? 왜 신은 이제 이 땅 위로 걸어 다니지 않으시는가요? 왜 신은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지 않으시는 걸까요?”
노 스승이 젊은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신은 지금도 도처에 계시단다. 그런데 사람들이 신을 볼 수 있을 만큼 낮게 구부리는 법을 잊었느니라. 구부려라……. 인간은 구부리는 법을 잊었다. 인간은 너무나 거만하게 서있다. 인간은 신과 따로 떨어진 채 서 있다. 인간은 스스로 섬이 되어 있다. 인간은 이미 우주의 부분이 아니다. 전체의 한 부분이 아니다. 신은 여전히 그 곳에 있다. 신은 여전히 그대의 손을 잡으려 하는데 그대가 뿌리치고 있는 것이다. 신은 여전히 그대를 마주보고 있으나 그대가 옆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신은 여전히 거기서 그대를 부르고 있으나 그대는 자기 자신의 소리로 가득차 있다. 자기 속의 말, 의식의 재잘거림으로 그대는 수다쟁이가 되어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신을 만날 많은 기회를 잃고 살아가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삶의 복잡한 소리에 사로잡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벗어나 평화열차를 타라는 기적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평화열차를 탄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기적은 오늘날도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들판의 초록색을 좋아하면서 그것을 구하려고 한가지만을 고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파란색과 노란색이 만나면 초록색이 되는 비결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그 만남의 의미를 생활 속에서는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예수님이 이끄시는 평화열차에 타면 그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7-30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 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자는 비밀도 많고 남에게 알려지기를 꺼리는 인생을 살아온 여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쑥덕거리는 소리에 지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인생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러한 만남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을 만난 것이지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자기의 인생이 새롭게 변화된다면 그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산 것 이상의 큰 기적인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평화열차에 타도록 올려 세워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를 얻었습니다. 어떤 이는 질병을 통해서, 어떤 이는 가난을 통해서, 어떤 이는 외로움 때문에, 어떤 이는 사고를 통해서, 어떤 이는 가까운 이의 권고로 하늘의 소식을 접한 이도 있습니다. 그 만남을 성공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인생에는 중요한 세 가지의 만남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둘째로 사람과의 만남이며, 세 번째는 일과의 만남입니다. 이 세 종류의 만남을 통하여 인간은 웃고 울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고민하고 눈물짓기도 합니다. 평화열차는 오늘도 기적을 울리며 나를 위해 시간을 재촉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적을 체험하라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찬송가 523장(1절) 어둔 죄악 길에서 목자 없는 양같이 모든 사람 길 찾아 헤맨다 자비하신 하나님 독생자를 보내사 너를 지금 부르니 나오라 이때라 이때라 주의 긍휼 받을 때가 이때라 지금 주께 나아와 겸손하게 아뢰라 구원함을 얻으리 얻으리
6. 선택 역(驛)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수많은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선택에는 현실적인 일이 있지만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영적인 일도 있습니다. 다른 것을 선택했다면 다른 여건을 맞이하게 되었겠지요. 현실적인 일에 두 가지를 한꺼번에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외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택의 모험 앞에서 늘 고민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무지개는 일곱가지 색깔이 어우러져 아름답게 보이지만 인생은 그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색칠을 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다가 주위의 다른 색깔과 잘 어우러질 때 그 사람은 돋보이게 됩니다. 어떤 색깔도 버릴 것이 없고 어떤 색깔도 혼자만으로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성취를 이루는 것이므로 나의 선택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러한 선택을 잘하려면 삶을 조명해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평화열차에 타면 인생을 조명해 볼 줄 아는 안목이 생기게 됩니다. 그때부터 인생의 수지타산을 잘 조절할 줄 아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첫째 이야기
진천관광호텔을 운영하던 이 씨는 매각하는 과정에서 사기에 휘말려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습니다. 환갑의 나이에 지병인 당뇨병과 심장병 때문에 주치의로부터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진단을 받는 고난이 겹치기도 했습니다. 병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었지만, 눈앞에 스쳐가는 가족들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마라톤 대회에 나갔던 한 사람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스쳐가는 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달리다 죽으면 보험금이라도 탈 수 있겠다 싶어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살려고 달린 것이 아니라 죽고 싶어 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죽자는 마음으로 달렸더니 죽기는커녕 건강이 회복되고 의욕이 되살아났습니다. 소송을 통해 잃었던 사업체도 다시 찾았습니다. 달리기도 향상되어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수 있을 정도의 행복한 마라토너가 되었습니다. 달리기를 하면 불치병이 나을 수 있느냐는 환자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죽기 위해 마라톤을 했기 때문에 살게 된 것이요, 살기 위해 마라톤을 했다면 며칠 못했거나 계속했다면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역시 살고자하면 죽고 죽고자하면 산다는 법을 알았습니다.”
인생길에서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점을 쳐주는 점쟁이도 자기 머리 위에서 돌이 굴러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평화열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내 귀에 해결의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그 줄을 잡으면 그때부터 내 인생은 새로워집니다.
둘째 이야기
미래 산업은 국내 벤처 기업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이 회사를 일으켜 세운 분은 정 사장입니다. 처음 이 회사를 시작한 후 불경기와 경쟁사들의 덤핑경쟁에 밀려 한 때 부도위기에 몰리기도 했습니다. 모든 재산을 투자하여 만들어낸 제품은 물론 제품 생산을 위해서 설비한 모든 장비들의 투자금도 건질 수 없는 위기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자살까지 생각하는 절망으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소주와 수면제를 들고 산에 올랐습니다. 하늘은 냉담했고 세상은 자기형편과는 아랑곳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이라도 무너져 같이 죽었으면, 전쟁이라도 일어나서 모두 불타버렸으면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설움에 북받쳐 울며 몸부림치며 스스로를 한탄하던 그에게 한순간 오기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실패한 인생으로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실패는 했지만 그 동안 쌓은 기술이라는 귀한 밑천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맞아. 나에게는 실패를 통해 얻은 신기술이 있잖은가” 그는 다시 산에서 내려와 불철주야 신기술 개발에 매진했고 끝내 재기의 감격과 기쁨을 맛보며 자랑스러운 벤처 회사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보는 눈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눈으로 보이는 것 이외의 장면과 상황이 있음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평화 열차를 타고 새로운 세계를 가늠해 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한때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심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기 위함이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잠깐 동안 수치와 부끄러움에 두심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기 소망을 삶의 현장에 성취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셋째 이야기
어느 스승이 제자에게 중요한 경험을 하게 하려고 돌멩이 하나를 주면서 “이것을 시장에 가서 팔려고 하되 팔지는 말아라.” 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들고 시장으로 나갔습니다. 시장 어귀에다 깨끗한 하얀 보자기를 펴고 그 위에 돌멩이를 올려놓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그를 보고 비웃었습니다.
하루 종일 돌멩이를 앞에 두고 서있는 청년이 불쌍해서 어떤 노인이 물었습니다. “이 돌멩이를 얼마주면 팔겠소?” 제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내가 5천원을 줄 테니 이 돌멩이를 나한테 팔고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구려.” 이 제자는 팔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만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청년은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돌멩이 하나를 두고 가격 흥정을 시작했습니다. “오만 원, 육만 원, 팔만 원, 이십만 원, 오십만 원” 5천원으로 시작된 돌멩이 값이 오르니까 사람들은 그 돌멩이가 신기한 것인 줄 알고 서로 사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마지막으로 처음의 그 노인이 비장하게 말했습니다. “백만 원을 줄 테니 나에게 파시오.” 사람들은 입이 딱 벌어져서 포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 돌을 팔 수 없습니다. 단지 시세를 알아보려 여기에 나왔을 뿐입니다.”
제자가 돌아오자 스승이 그를 보고 말했습니다. “알겠느냐? 사람들이 가격을 정하고 가치를 정하는 기준이 얼마나 헛되다는 것을 …….”
인간의 선택이란 심히 허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평화열차에 타고 깊이 생각한 다음에 행하는 선택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기 때문에 허무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맹인 박사인 강영우 박사는 “내가 만일 정상인이었다면 미국 유학이나 박사가 되는 일은 꿈도 못 꿀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중도에 실명을 하여 맹인이 되고 보니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자신이 뭔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고통의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었습니다.
장애자인 아들을 위해 발명가가 된 사람도 있고, 투병 중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의사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고난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선택을 함으로 전화위복의 결과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서로에게 여러 가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향을 받는 사람의 결단에 따라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고, 실패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세상의 변화라기보다 사람의 변화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광의 길을 안내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영광과 존귀로 바뀌었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희생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영광을 맛볼 수 있습니다. 죽고자하는 마음으로 고난과 싸울 때 사는 결과가 안겨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택에 따른 영광의 비결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인간의 선택에 빛을 주려하심이요, 실패와 낭패의 구렁텅이 속에 있는 인간에게 평화열차를 타서 더 이상 멸망의 자리에 빠져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후회를 줄이며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 되는 길입니다.
찬송가 532장(3절) 주께로 한걸음씩 주은혜 받으라 기회를 잃지 말고 네마음 정하라 한걸음씩 한걸음씩 주께 나오라 주님께 아뢰이면 너 복을 받으리라 값없이 주는 은혜 너 거절 말아라
7. 자살 역(驛)
“죽긴 왜 죽어!” 이 말은 인생을 오래 경험한 사람들이 충고하는 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없이 내뱉는 말이 죽고 싶다는 단어지요. 오늘은 몇 번이나 ‘죽고 싶다’는 말을 사용했습니까? 그 말대로라면 몇 번이나 죽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인생은 고달픈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만 사는 곳이 아니며 더불어 사는 것이기 때문에 맞추어 간다는 것이 어렵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움을 참지 못한다면 더불어 사는 세상 속에 살 자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일이라도 속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살하면 안 되는 것은 변화무쌍한 인간의 삶에 동물에게도 주지 않은 선택의 자유를 하나님이 주신 까닭입니다. 그만큼 신은 인간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을 마음대로 쉽게 끊는다면 신은 그 사람의 출생을 후회할 것입니다. 나를 위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내가 존재합니다. 그런고로 나는 이 세상에 무엇인가 기여하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이 권한을 갖고 결정할 일이 있는 반면에 자기에게 속한 것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될 것도 있는 것입니다.
첫째 이야기
미국 역사 중에 모든 미국인들의 생활에 경종을 울렸던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1923년 어느 날 시카고에 있는 에드워드 비치호텔에서 그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라고 불리는 7명의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들의 재산을 모두 합친다면 미국 전체의 국고를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문 기자가 시카고에서 모였던 그 날로부터 시작해서 정확히 25년이 지난 후에 그들의 생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추적하여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었던 강철회사 사장, 찰스 슈업은 25년 후 무일푼의 거지가 되어 죽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인 알써 카튼은 밀농사로 거부가 된 사업가였는데 그 역시 파산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쓸쓸하고 고독한 가운데 혼자 임종을 맞이하고 죽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인 리차드 위트니는 뉴욕 은행의 총재였지만 자기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이 잘못되어 감옥에서 고독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인 엘버트 홀은 미국의 재무장관까지 지냈지만 감옥에서 막 풀려 나와 집에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사람인 웰스프리트의 회장이었던 J. C. 리버모아는 인생의 끝을 자살로 마쳤습니다. 여섯 번째 사람인 국제은행 총재였던 리온 프레이져 역시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쳤습니다. 일곱 번째 사람인 이반 크루컬은 부동산 업계의 거부였지만 자살 미수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미국인들에게 부의 허무를 알려주는 커다란 충격과 교훈이 되었습니다.
둘째 이야기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거리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70세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살을 한 것이었습니다. 앰블런스가 와서 할머니는 곧 병원으로 실려 갔고 뒤이어 달려온 경찰들이 사람들을 해산시키고는 자살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할머니의 아파트로 올라갔습니다.
실내는 온갖 고급 도구와 사치스런 장식품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왠지 썰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이 정도 살림으로 보았을 때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닌 것 같고, 혹시 건강상의 이유나 불치병 때문일지도 몰라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할머니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건강했다고 말했습니다. 골똘하게 고민하던 경찰관은 책상을 뒤져 할머니의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수첩을 펼쳐보던 경찰관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 하고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의 수첩엔 365일 동안 똑같은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오지 않았음.”
사람은 외로움을 느낄 때 자살 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실상 모든 사람은 다 외롭습니다. 다만 서로 만나고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인간은 세상에 올 때도 혼자 왔고, 세상을 떠날 때도 혼자 갑니다. 오직 이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했고 이 세상을 떠날 때도 결재하시는 하나님께 의지하며 사는 길이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그 길은 평화열차에 타는 것입니다.
셋째 이야기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미국 샌디에고 외곽 지역에 있는 어느 호텔에서 한국전쟁에서 돌아간 청년이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머니! 제가 돌아왔어요." "빨리 집에 오지 왜 전화를 하는 거냐?" "아뇨, 제가 호텔에 있는데요, 이제 갈 거예요. 어머니, 그런데 만나기 전에 드릴 말이 있습니다. 제게 아주 절친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부모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저와 같이 전쟁을 하다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장님도 됐고요. 두 손이 다 없습니다. 우선 내가 데리고 가서 일 년이라도 같이 살려고 합니다. 어머니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는 "뭐, 괜찮지" 하고 소극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며칠 있으면 힘들어질거다. 네가 집에 데리고 온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몸도 피곤하게 되고 마음도 괴로워질 거다. 얘야, 그러지 말고 어서 집으로 들어오렴." 아들은 "잘 알았습니다."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다음날, 해군 본부로부터 그 어머니한테 전보 한 장이 날아들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호텔 12층에서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달려가 보니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눈멀고 두 팔이 없어진 사람은 바로 자기의 아들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말하고 고민하기도 합니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정면으로 부딪치면 오히려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홀로 고민하고 나쁜 방향으로 결론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멀리해도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분은 나에게 평화열차에 타고서 인생의 고뇌를 함께 의논하자고 하십니다.
나에게 닥친 자살의 충동은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로 옮길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바로 이웃입니다. 행복과 불행도 바로 옆에 있습니다. 삶과 죽음도 바로 옆길입니다. 인생은 늘 새로운 그림을 그리며 살라고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떤 경우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림이 달라질 뿐입니다.
누가복음 4: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사단은 예수님에게 모험을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시면서 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스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었어도 바로 깨닫지 못하면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방문하여 어떤 도시에서 간증을 하고 말씀을 증거하고 나오는데 여자 교우 한 분이 테레사 수녀를 붙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자살을 결심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어요.” 이 말을 듣고 테레사 수녀는 이런 권면을 했습니다. “그러나 자매여, 자살하기 전에 내가 자매에게 한 가지만 요청하고 싶어요. 내가 있는 인도의 캘커타에 와서 나와 같이 한 달만 일하고 난 후에 자살을 하세요.”
이 여자 교우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테레사 수녀를 따라서 인도의 캘커타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오랜 기아와 질병으로 까맣게 말라 비틀어 죽어가는 그들을 붙들고 부지런히 간호하고 치료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살고 싶어졌습니다.'내게도 살 만한 보람있는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이 여자 교우는 자살의 유혹을 극복하고 테레사 수녀와 함께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도 아니요 가난한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수다한 세상 유혹 특히 자살로 인간을 멸망의 길로 유도하는 사탄의 세력까지도 다 물리치신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인생을 살아간다면 새로운 길이 보일 것입니다. 평화열차에 타고 언제나 변함없이 신실하신 예수님과 의논하며 사는 자는 모든 역경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는 하늘권능을 공급받습니다.
찬송가 527장(1절)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8. 실패 역(驛)
이 세상에 실패의 쓴잔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업의 실패이든, 인간관계의 실패이든, 가정의 실패이든, 신앙의 실패이든 나름대로 실패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에 넘어지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배우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실패는 걸음마를 배우는 한 과정입니다. 역사의 주인공치고 실패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잔잔한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늘 평온한 날씨일 것 같아도 어느 날엔가 역풍이 불 때도 있음을 늘 생각하고 갑니다. 인생의 길에도 역풍이 있습니다. 역풍은 실패라는 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앙의 길에도 역풍이 있습니다. 늘 순탄한 길만 놓여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도 모르는 마음의 역풍으로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실패라는 쓴잔을 마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시련의 골짜기를 다 지나보면 결국 하나님이 섭리하심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련을 피하려고 애쓰기보다 어떻게 시련을 이겨 나가느냐가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패를 경험한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모든 근심을 내려놓은 것을 보면 거기에 새로운 길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이 운전하시는 평화열차에 올라타고 다시 정리해 보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첫째 이야기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은 많은 실패의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아마 거의 포기할 정도로 인생의 나락에 떨어졌지만 그는 실패 속에서도 든든히 서가는 신앙인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실패경력을 보면 1831년 사업을 하다가 실패했습니다. 1832년 주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는 실의에 빠져 있다가 다시 사업에 뛰어 들었으나 1834년에 그 사업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실패의 연속에 고민하던 그는 마침내 1841년 신경쇠약증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꿈을 접지 못하고 다시 정치에 뛰어 들었습니다. 1843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기 위해 애썼지만 공천 받는데 실패했습니다. 1855년에 그는 다시 상원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보기 좋게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1858년 다시 상원 의원 선거에 도전하였으나 또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이만한 실패의 경력 소지자는 대개 모든 것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링컨에게 실패는 다만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전화위복의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실패란 헤엄을 칠 때에 마시는 물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공을 위해 자꾸 반복하면 어느 날 바뀌어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1860년에 그는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어 미국 200년 역사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내가 죽지 않는 한 실패는 끝이 아닙니다. 끝이라고 낙심하는 그 사람의 기회가 끝이 되어 갈 뿐입니다. 실패는 자신을 한번 돌아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방법을 한번 돌아보고, 자신의 목적설정을 다시 생각해 보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사는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이야기
미국에서 광고 대리점을 대상으로 2500명에게 설문 조사를 하는 가운데 이런 문항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실패했습니까?” 그런데 30가지 이유 중 가장 많은 것이 “망설임과 결단력의 부족”이었습니다.
스티븐 코비 박사가 성공하는 사람들과 실패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실패하는 사람들은 대게 별로 중요하지 않는 일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T. V 보는 시간이 너무 깁니다. 전화하는 시간도 너무 깁니다. 한 시간 반 동안 전화하고 난 다음에 끊으면서 “얘, 안되겠다.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자”라고 합니다. 또 컴퓨터 게임에 너무 매달립니다. 쓸데없는 참견에 너무 시간을 보냅니다. 해결점 없는 고민과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사람들이 인생을 실패하며 살아가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반면 성공하는 사람들은 긴급한 일이 아니라 가치 있고 중요한 일들에 관심과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건강이나 사건이나 예방에 관심을 갖습니다. 지도력을 개발합니다. 주변의 사람들, 윗사람, 아랫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새로운 기회를 발굴합니다. 자신의 인격과 신앙향상을 위해 최대의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하루에 15분 정도의 자투리 시간을 정확하게 활용할 수 있다면 1년에 책 한권을 쓸 수 있습니다. 1년에 악기 하나를 배울 수 있습니다. 1년에 중급정도의 외국어 회화 실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40년간 하루에 15분을 낸다면 1000권의 책을 읽을 것입니다. 대학을 5번 다녔을 것입니다. 하물며 하루 1시간 중요한 일들을 위해 시간을 낸다면 여러분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시간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시간이 돈이라고 하지만 시간은 생명입니다. 시간은 피와 같은 것입니다.
일 년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암 선고를 받고 일 년 후 죽을 여인에게 물어 보십시오.
한 달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한 달 먼저 미숙아를 낳은 어머니에게 물어 보십시오.
일주일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주간지 편집자에게 물어 보십시오.
하루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막노동 자에게 물어 보십시오.
1분의 소중함을 알려면 1분 차이로 집에 가는 막차를 놓친 사람에게 물어 보십시오.
1초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1초 때문에 교통사고를 면할 수 있었던 사람에게 물어 보십시오.
0.01초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0.01초 차이로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단거리 육상선수에게 물어 보십시오.
이러한 특별한 제안에 한번 쯤 귀를 기울여 봄이 좋지 않을까요? J. 라 브뤼예르라의 <지금 하십시오> 라는 시가 있습니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아닐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렐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지면 노래 부르기에 너무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지금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5:1-1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뛰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베드로가 지난밤의 실패의 마음을 안고 예수님을 만났으나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함으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이것이 평화열차에 과감하게 올라서는 장면입니다.
현대문명의 95%는 감각문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온갖 감각적인 스크린, 술, 스포츠, 스릴에 마취되어 보려고 애쓰고, 광란의 음악에 자신을 심취해 보려고 하고, 환락의 자리에 자신을 내어 맡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쾌락이 지난 다음에는 가슴을 파고드는 허무와 환멸로 인해 인간은 괴롭기만 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쾌락은 인간을 천하게 만들 뿐이며 바닷물을 마신 뒤와 같이 더 심한 갈증을 느끼게 할 따름입니다.
누가 나를 도와준다면 일어설 것이고, 누가 나에게 확실한 방법을 제시해 준다면 그대로 해 볼 것이라는 미온적인 자세를 갖지 말고 온 인류를 위해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담대하게 평화열차에 타는 일이 중요합니다.
찬송가 432장(1절)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 이 풍랑에 배 저어 항해하는 이 작은 배 사공은 주님이라 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9. 우울 역(驛)
우리들이 사는 삶의 현장에는 끊임없이 숨 가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병원에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이유 없이 우울하고 머리가 아프답니다. 심장에 통증이 옵니다. 술 담배가 늘고 아내도 의심스럽답니다. 가족 친지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고 직장 생활을 회고하면 울화가 치민답니다. 여기에 대한 의사의 진단은 “은퇴 증후군” 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여건들이 많습니다. 가까이는 우리 사회에서, 멀리는 중동전쟁이 우리의 생각들과 생활에 까지 짜증과 우려를 낳게 합니다. 이라크에 의해 폭파되어 불탄 쿠웨이트 유전에서 발생한 검은 연기가 2주안에 중국과 북미지역 상공까지 밀려온다고 기상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매년 약 2천만 명의 성인들이 피곤함, 슬픔, 무기력증과 같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우리 주위에 알로에, 영지버섯, 녹혈, 녹용 등의 건강식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아무 병이 없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를 못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약 제1위가 ‘잔탁’이랍니다. 이것은 위궤양 치료제입니다. 2위가 ‘레니텍’인데 이것은 고혈압 저하제입니다. 3위가 ‘프로작’인데 이것은 항우울증 치료제라고 합니다. 그런 약이 많이 팔린다는 것은 바로 그런 병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질병의 요인은 대개 정신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유일한 처방은 평화열차에 타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날씨가 흐리기만 하면 허리가 쑤시고 무릎이 아프다고 합니다. 장마가 온다고 하면 걱정이 태산입니다. 지루한 장마철에는 우울증의 기간도 길어 괴롭기만 하답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 괴로움을 호소하기 전에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날씨가 흐린 것은 구름이 가렸기 때문이요 장마가 오는 것은 구름이 진하여지고 뭉쳐지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구름너머에는 여전히 하늘은 푸릅니다.
기후 따라 몸이 쑤시고 아픈 것은 인간의 몸이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기후의 영향을 받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이 옵니다. 마음에 구름이 드리워지면 몸의 상태를 떠나 정신적인 차원으로 생각을 옮겨야 합니다. 장마철에도 때로는 강열한 햇빛이 구름을 뚫고 땅으로 내려 비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생각이 빠른 아낙네들은 빨래를 널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울증을 해소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도 햇빛이 내려쬐는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우울증은 주기에 따라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햇빛처럼 맑고 환한 정신이 올 때 그 날을 즐기십시오. 장마철에는 산 속에서, 바위 위에서 비를 기다리는 식물들이 한없이 행복해 합니다. 일 년을 두고 기다리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최대한 물기를 저축합니다.
인간도 느긋한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세계를 상상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울함은 지나가는 뭉게구름입니다. 구름 위는 항상 맑습니다. 그리고 바람 부는 어느 날 구름을 싹 걷어갑니다.
첫째 이야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우울증으로 고생한 기록이 있는데 우울증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짓누르는 우울증이 루터를 떠나지 않았다. 루터는 이것에 대해 기도도 해 보았고, 하나님께 따져보기도 했고, 믿음으로 이겨보려고 애썼으며 의사와 상의도 해보았다. 그러나 짓누르는 우울증의 고통은 루터를 떠나지 않았다. 어떤 때는 너무 절망적이어서 차라리 목숨을 끊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고기를 써는 칼을 드는 것조차 꺼려질 때가 있었으며 혹시 그 칼로 자신의 목숨을 끊지나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수년 동안 우울증을 극복해 보려고 여러 가지 수단을 다 썼다. 어떤 때는 기분이 아주 좋아져서 우쭐해질 때도 있었고 아내나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기도 했다. 기분이 좋아지면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농담도 하며 심지어 배고프지 않은데도 음식을 먹기까지 했다. 또는 자신이 하는 일에 몰입함으로써 우울증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무시해 보려고 했다. 상담자의 도움을 구하기도 했고, 교회에서 주는 도움도 받았으며 위로를 찾아 종종 성경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울증을 물리치는데 세 가지 법칙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첫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둘째, 분노를 밖으로 나타내는 것, 셋째, 여자의 사랑이다.’
루터는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서 싸울 때는 생명의 위협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서서 싸웠습니다. 우울증이 심할 때는 신앙적인 헌신의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선한 데로 활용하면 큰 기쁨으로 바꾸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열차에 타는 것입니다.
둘째 이야기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도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신을 저주했던 적이 있으며, 여자 하인을 범하여 낳은 자식이 바로 키에르케고르였습니다. 그 후로 아버지를 포함해서 가족들 대부분이 33세를 넘지 못하고 죽었으며 그는 그것을 벌의 징조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에는 항상 죄의식이 심어져 있었습니다. 등에 짊어진 그의 죄의식은 사랑하는 약혼녀 레기네 오르센에게 약혼파기를 선언할 정도로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너무 깊은 죄의식에 빠져 있었고 그것은 곧 삶의 포기를 의미하는 절망이었으며 그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부친의 유산을 무위도식하여 탕진하고 무일푼이 되었을 때 마치 예정되었던 듯 그는 1855년에 37세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죄의식에 빠지면 절망하게 되고 절망하면 곧 죽게 되므로 죄의식은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학문도, 철학도, 종교도 이 죄의식을 씻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죄책감이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떨쳐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평화열차를 타고 모든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울증이 올 때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창조적인 일을 하십시오. 그 때에 기발한 생각이 떠오를 때입니다. 우리 앞서 우울증을 가진 이들 중에는 위대한 작품을 남긴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평화열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인간은 자기 자리를 쟁취하는 것보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의 현장은 정신적인 것이 반사되어 나타납니다. 건강한 정신이 공급하는 심오한 영향력을 인정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36-50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요즈음 같은 우울한 시대에 신나고 감격적인 일이 있습니까? 만약 기쁨과 감격을 맛보는 길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다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 성경에 한 초라한 여인, 외로운 여인, 주위에서 죄인이라고 소외시키는 한 여인이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감격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 여인이 얼마나 남모르는 마음의 상처를 갖고 살았겠습니까? 그녀의 우울함을 아신 주님께서 그의 곁으로 다가가셔서 그 마음을 어루만지시며 가벼운 마음을 갖도록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파격적으로 속죄를 선언하시고 감격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평화열차를 탔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심리학자 코니 닐은 우울증의 신앙적 원인을 네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멀어짐입니다.
둘째, 죄와 죄책감입니다.
셋째, 사단의 영향입니다.
넷째, 이중적인 삶입니다.
평화열차에 타고 조그마한 생각에서부터 키를 돌리면 인생전체가 새롭게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감격을 체험하게 됩니다. 평화열차에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격들이 줄을 이어 나타날 것입니다.
찬송가 345장(4절) 아버지여 이 죄인 굽어보사 성난 풍랑 잔잔케 하시고 이 불쌍한 인생을 살리소서 오 우리 하나님 우리 하나님
10. 가난 역(驛)
새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은 날아다니는 일을 통해 먹을 것을 구하라는 명령입니다. 날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새에게 행복한 곳일까요? 그러다가 날 수 있는 능력마저 쇠퇴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일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곳이 행복한 곳일까요? 생물들은 먹는 것이 1 순위이기 때문에 그곳이 행복한 곳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먹는 것만이 모두가 아니기 때문에 그 다음의 일을 하기 위해서 가난이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서러움을 느끼는 것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에 가난해서 먹지 못하는 서러움이 가장 큽니다.
이 세상에 가난은 항상 있는 것인데, 사람이 선한 마음을 갖고 서로 도와주면 해소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잘 사는 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돕는 마음을 갖는다면 얼마든지 고민을 해결할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한 것은 가난은 언제든 면할 수 있고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 말은 언젠가는 가난을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난은 삶의 한 과정이지 평생의 운명이 아닌 것입니다. 운명이 아닌 것은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이 운전하시는 평화열차에 타는 일이 시급한 순서입니다.
첫째 이야기
한때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는 미국의 유명한 흑인 가수이자 맹인 가수인 스티비 원더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너무도 가난한데다 소경이어서 세상을 살아갈 희망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라디오를 통해 레이 찰스의 노래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때 그는 마음속에 한줄기 환한 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레이 찰스가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난 맹인이었지만 피아노를 배우고 노래를 불러 유명한 가수로 성공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스티비 원더는 자기와 똑같은 환경과 처지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레이 찰스처럼 될 것을 다짐하고 피아노 연습과 노래 연습을 했습니다. 좋지 않은 여건 속에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결국 그는 성공하게 되었고, 미국의 유명한 가수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훗날 스티비 원더는 말하기를 “레이 찰스는 나에게 빛을 주었다”라고 했습니다.
‘빛을 주었다’는 말은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새 희망을 가지게 하였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참 빛이 세상에 왔으니 곧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그 빛은 우리를 성공하게 하는 빛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인간의 구원을 위한 빛입니다. 우리 주위에 빛줄기를 느끼거든 빨리 그쪽으로 시선을 옮겨야 합니다. 가난이 왔을 때 멈추라는 신호로 보지 말고 결심하라는 신호로 보고 평화열차에 타서 예수님의 안내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인생이 변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둘째 이야기
경상남도 울산, 가난한 농촌 마을에 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하였지만 시험에 낙방했습니다. 가정 형편도 어려운데 시험에 낙방했으니 할 수 없이 집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가는 친구들을 보며 절망하여 모든 소망과 꿈을 다 버렸습니다. 인생이 이렇게 끝나버리는가 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런 중에 마침 친구의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출석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도하고 찬송하며 새 삶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꿈과 소망도 살아났습니다. “하나님, 나에게도 믿음을 주시고 꿈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도 공부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는 꾸준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독학을 하여 마침내 농사를 지었던 산 경험을 가지고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농업대학교까지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학생들보다 경험도 많고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드디어 하와이로 유학 가서 박사학위를 받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 아프리카로 가서 그곳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옥수수 재배만 전문으로 연구하는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상을 받았고, 아시아 혁신은상, 대통령표창, 국제농업연구대상, 아프리카국가연합의 농업 연구상을 받았으며 북한까지 가서 북한 사람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옥수수 재배를 가르쳤습니다. 이 분이 바로 옥수수 박사라고 불리는 김순권(金順權) 박사님이십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존경받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내가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이 새롭게 시작할 때입니다. 평화열차에 타고 예수님이 안내하시는 성경지도를 펴고 새롭게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의 창밖에 비치는 감격적인 장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셋째 이야기
미국의 제 26대 대통령 루즈벨트는 파란 많은 일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미국 대통령으로 두 번이나 당선되어 정치가로, 저술가로, 웅변가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후 실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때 한 말이 “인생은 매우 고단하다. 청춘은 안전성이 없으며 중년은 끝없이 자기추구의 시기요, 노년은 실망과 후회로 가득 차 있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는 그의 훌륭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환멸을 느낀 슬픈 늙은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영적인 생을 외면하고 살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의 삶이 험악하고, 실패와 좌절을 많이 경험했다 할지라도 신앙으로 마음이 풍성하면 인생은 달라집니다. 만일 사람을 대하는 가슴이 넉넉하고, 가난하여도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그는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른 사람입니다. 평화열차에 탄 사람은 모두 한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비행기 트랩에서 내릴 준비를 하는 사람같이 새로운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다음에 더 잘하기 위한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가난은 징벌도 아니고 운명도 아닙니다.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조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자들에게 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를 놓아주며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누가복음 4:18)고 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래 전에 나에게 복음이 들어왔는데 내가 예수의 교리를 믿을 때에 삶 전체가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이젠, 내가 예전에 원하던 것을 원치 않게 되었고, 내가 예전에 바라던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고, 이전에 옳게 보이던 것이 나쁘게 보이고, 과거에는 나쁘게 보이는 것들이 옳게 보였습니다. 나의 삶과 욕망은 전적으로 변했습니다. 선과 악의 의미가 바뀐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의식이 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문밖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은혜의 체험을 하지 못하고, 믿음의 기적도 보지 못하고 삽니다. 주어진 은사도 쓸 줄을 모르고 신앙의 축복에서는 손님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에 대해서는 여우와 새만도 못한 처지였으나 오직 바라보는 분명한 방향이 있으니 그쪽으로만 매진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권하시는 삶의 원리를 따르면 반드시 가난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형편을 잘 아시는 그분이 운전하시는 평화열차에 타고 예수님과 함께 가난 후에 주시는 신비한 기적을 경험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찬송가 83장(2절) 무거운 짐 등에 지고 인생길을 가는 자 힘이 없어 쓰러지려 할 때에 능력 있는 팔을 펴서 나의 손을 붙들어 나를 구해줄 이 누가 있을까 주예수 주예수 주예수 밖에 누가 있으랴 슬퍼 낙심될 때에 내 친구 되시는 구주 예수밖에 다시없도다
11. 미움 역(驛)
사람이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히면 마지막에는 자기의 존재도 미워집니다. 남을 생각하는 만큼 자신의 마음도 그만큼 점령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일이 미워지다가 다음에는 그 사람이 미워지고, 그 후에는 그와 연관된 모든 것이 미워집니다. 그럴 때 비판, 질시, 공격, 투쟁의 순서로 자기를 가눌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 들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어느 곳에든 치우쳐 있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가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인심이 점점 강퍅해져 가는 현상을 이기려면 신앙으로 향하는 마음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 선한데 마음 쓰는 시간, 생각하는 시간, 회개하는 시간을 틈틈이 가져 자신의 마음이 강퍅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호해야 합니다. 세상의 강한 자극을 그대로 받으면서 살아가면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상처가 되어 마음속에 어떤 틈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인 자극을 더욱 강하게 가지도록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거룩한 열매를 맺으려는 노력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합니다.
첫째 이야기
안델센의 동화 중에 유명한 <미운 오리 새끼>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래 오리가 아니고 백조였던 미운 오리새끼는 오리 세계에서 늘 외로웠습니다. “너는 걸음을 왜 그렇게 걷느냐?” “오리 소리가 왜 그러냐?”는 등 얼마나 미움을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미움을 받으면 그때부터 생각하는 모든 것이 엇나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시험입니다.
우산이 처음 나왔을 때 우산을 쓴 사람이 길거리에 나오면 사람들은 돌팔매질을 했다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세상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종류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갖는 것이 오리세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위의 평판이나 여론을 전혀 무시하고 살기는 어렵지만 그것에 목을 맬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판이나 여론은 항상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니까요. 여기에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길은 평화열차를 타고 평화의 나라로 향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생각을 가다듬고 자신을 조명해 보는 시간을 가질 때 세상에서 주는 자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이야기
일본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빙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주인공은 소설의 끝머리에 가서 자신이 사생아라는 것을 알고 절망합니다. 자신의 출생을 알게 됨으로써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어머니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에 찬 주인공은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려 결심하고 몹시 추운 날 눈 덮인 산을 오릅니다. 산등성이에 올라온 그는 돌아서서 문득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을 바라보게 됩니다. 분명히 자신은 앞만 보고 똑바로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은 비뚤고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자기가 걸어온 눈 위의 발자국, 분명히 똑바로 걸어왔다고 생각했지만 흐트러져 있는 그 발자국을 보면서 이제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의 지난 과거도, 또한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자신의 어머니도…….
용서란 타인을 너그럽게 봐주는 것이 아니라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환원시키는 일입니다. 용서받은 자만이 인생의 마지막에 갈 본향을 알게 됩니다. 천국은 용서받은 사람, 용서해 준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평화열차에 타야합니다. 거기서 함께 탄 사람들과 좋은 대화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언어의 순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말로서 상처를 입고, 말로서 위로를 받습니다. 오랜 동안의 상처도 한마디의 말로서 해소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적인 교만과 우월감을 버리고 좋은 관계를 이루는 말을 해야 합니다.
또한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해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면 화해는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응어리가 계속 있도록 두고서 어떻게 복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이루는 일에 최후의 결정적인 것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실수를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용납해 주고, 부족함과 허점을 질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허점을 보듯이 남도 나의 허점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위해 우리는 계속 수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수련을 쌓을 때 빛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게 합니다. 남을 용서하게 만듭니다.
일본의 사상가인 우찌무라 간조는 일찍이 “성서 자체를 읽어라. 성서에 관하여 많이 읽지 말라. 생명은 바로 성서에 있으며 성서론에 있지 않다. 성서에 대하여 많은 의심을 품는 자는 대개가 성서 자체는 적게 읽고 성서에 관하여 많이 듣고 읽은 자이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것에 생각을 하지 말고 단순한 생각을 갖고 평화열차에 타고 차근차근하게 인생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이 지구를 다 방문할 수 없고, 우주의 모든 것을 다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부분적으로 알고 경험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미움과 함께 사랑의 원리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원리도 그러합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악을 따라 심판을 하려고 하면 남아나는 것이 없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십계명에 따라 인간을 심판하셔서 몸의 일부분씩을 떼어 버린다면 아마 지체가 다 떨어져 나가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심판 때 하나님이 인간 지으셨음을 후회하신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원리 위에서 고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것은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건 없이 기쁘게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 받을 조건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존재인데도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있습니다. 고침을 받을 수 없는 대상인데도 고침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요, 이것이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긍휼하심의 원리입니다.
요한복음 10:7-15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께서는 양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평화열차에 탄 사람은 이 문으로 왕래하는 자입니다. 문이란 어떤 문을 여느냐에 따라 이어지는 순서와 풍경이 달라집니다. 어떤 종류든지 그것은 이미 시작 때부터 방향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은 반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을 열기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이 스스로를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을 연다는 것은 어떤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는 양은 예수님 안에서 바르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거기에 영적안전과 배부름이 있습니다. 그 문 안에는 편안함이 있습니다. 그 문 안에는 내일이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열차를 운전하시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의 삶을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음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교육을 받아서 아는 믿음이란 상급학교의 입학시험에는 합격이 될지 모르나 인생을 아는 일에는 미흡합니다. 진리란 인생을 깨달아 아는 깊은 경지입니다. ‘이렇게 살면 되는구나!’ 하고 감사와 기쁨을 호흡하는 경지입니다. 이 진리를 알면 살아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산다는 값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살면 생명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됩니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그 길을 인도하시려고 선한 목자로 오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미움을 느낄 때 이 평화열차를 생각하십시오. 미움을 떠나 새로운 생명을 느끼는 삶이 바로 평화열차에 타는 것입니다.
찬송가 407장(2절) 맘속에 시험을 받을 때와 무거운 근심이 있을 때에 주께서 그때도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 하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 만 바라봅니다.
12. 불면증 역(驛)
불면증(insomnia,不眠症)은 수면을 이루지 못하는 수면장애 증세를 말합니다. 정확히 말해, 적어도 1개월 이상 잠들기가 어렵거나, 잠이 들더라도 자주 깨는 일이 한 주에 3번 이상 나타나며, 이러한 까닭에 낮 동안 매우 피곤함을 호소하는 등 수면부족으로 인한 장애들이 나타나는 경우를 일컫습니다.
그 증상으로 습관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며, 짧고 단속적인 수면, 얕은 수면, 꿈을 많이 꾸는 수면 등 수면의 양이나 질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해당됩니다. 만성 불면증으로 이어지면, 두통과 소화 불량을 일으키며, 짜증을 잘 내는 등 일반적인 신경쇠약 증세가 나타납니다. 정신병의 약 30%는 불면이 주증세가 되는데, 불면이 아닌데도 불면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면증은 성인 세 명 중 한명이 시달리고 있을 정도로 널리 퍼져있는 질환입니다. 수면은 식사, 운동, 약물, 질환, 스트레스, 불안, 우울 등에 영향을 받습니다. 음식만 잘 가려 먹어도 불면증을 상당 부분 떨쳐버릴 수 있다고 합니다.
불면증의 고통이 왔을 때 평화의 나라를 생각해야 합니다. 평화열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창밖에 스쳐지나가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 나의 인생의 그림을 그려보아야 합니다.
첫째 이야기
저는 불면증으로 1년 반 동안 고생하고 있습니다. 결혼 전에는 잠이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바로 임신이 되고 시댁식구들에게 많이 시달리다 보니 탈모증과 불면증으로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있어요. 잠을 자려고 하면 정신이 더욱 멀쩡해지며 시댁식구들에 대한 미움으로 생각이 복잡해 다시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많은 생각하다 4시나 5시에 잠이 듭니다. 어떤날은 아예 꼬박 새울 때도 많습니다.
잠만 잘 자는 남편을 보면 더욱 눈물이 납니다. 그러니 자연 늦잠을 자게 되구요. 낮잠을 또한 자게 됩니다. 그러나 낮잠을 안자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날은 남편이 불면증 약을 사와 먹었더니 오히려 많은 꿈을 꾸며 시간 시간 잠에서 깨어 잠만 설쳤습니다. 가끔 아주 피곤한 날만 빼곤 항상 이런 식이예요. 가끔 제가 혹시 정신적인 문제가 있나 싶을 때가 있어요.
지난 일인데 시어머니 생신날 많은 스트레스로 힘이 들어 울며 잠을 못자고 있는데 남편이 갑자기 미워져 저도 모르게 남편인줄 알고 다른 시댁식구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일어나라고…….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평소 남편에게 그런 적도 없고 부부사이도 무척 좋은데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 일만 생각하면 죽고 싶어요.
내가 왜 그랬을까?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그 일로 인해 더욱 잠을 못자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병원에 갈 만큼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참을 수가 없어요.
오늘날 전문가나 의사들이 여러 가지 처방을 해 줍니다. 주변에서 가르쳐 주는 말씀들을 다 해 보아도 소용이 없으면 이제 평화열차를 타고 새로운 계획을 세워봄이 어떨는지요. 사시절의 변화와 같은 인생길에 재미있고 좋은 계획을 세워 날짜를 기록하여 거울 앞에 붙여두고 그 날의 신나는 장면을 생각하고 자주자주 읽어봅니다. 자신의 인생 일기장에 올릴 수 있는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계획들을 세밀하게 적어둡니다. 그리고 준비과정, 도움 되는 일, 조그마한 일의 성취 등 일이 성과를 이루었을 때마다 그곳에 표식을 하며 보람을 느낍니다. 평화열차에는 이러한 사람들을 다 치유시켜 준 사례들이 있기 때문에 좋은 도우미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이야기
이 실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시간은 새벽 5시였습니다. 윤이는 친구 집에서 나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너 거기 어디냐?” “여기? 응, 생맥주 집이야.” 친구 집이면서도 이렇게 엉뚱한 말을 했습니다. 전화기 저편의 어머니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잔인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가 대화를 하자고 붙들고 집안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윤이는 눈물이 범벅이 되어 부모에게 못할 욕을 하고 괴성을 질러 대며 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들고 난 후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할까? 하는 절망적인 죄책감이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내가 미쳐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 안에 악한 신이 있는 것일까?
결국 엄마는 윤이를 정신과 치료를 받게도 했고, 기가 약해서 그렇다고 기공사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상태는 악화되어 마침내 다리가 마비되는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교회로 데리고 갔습니다.
윤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 오른쪽도 아니고, 이쪽 왼쪽 가슴에요. 이곳, 이 속에 내가 울고 있어요. 밖의 내 얼굴은 항상 웃고 있지만 내 왼쪽 가슴에 있는 나는 너무 슬퍼서, 너무 슬퍼서 한없이 울고 있어요. 이렇게 울다가 결국은 죽을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두 번째 딸로 태어났는데 할머니가 아들이 아니라고 엄마를 박대하고 윤이를 애물단지라고 하면서 외면했습니다. 세살 때 아버지의 재판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윤이가 너무 우니까 할머니는 화가 나서 비가 오는 대문 밖 진흙탕 속에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까지도 그걸 보고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무섭고 슬펐던 마음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를 슬프고 괴롭게 하는 마음의 원인이 되었고, ‘엄마마저도 나를 버린 집은 내가 살 곳이 아닌’ 곳처럼 생각되어 항상 밖에서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저는 제 왼쪽 가슴에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느끼곤 해서 내가 아무래도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제 알고 보니 내 마음속의 그치지 않는 이 울음은 엄마를 부르는 울음이었던 것입니다. 울면서 나는 엄마를 미워하게 됐다는 것도 알았어요. 하지만 나는 정말 너무도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었어요. 자라면서 나는 엄마의 착한 딸이 되려고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너무도 사랑을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제 어두운 진흙 속에 울고 있는 어린 내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파 소리를 지르는데 주님이 엄마를 용서하라고 하셨어요. 엄마 기도를 하는데 가슴의 통증이 사라지고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너무나 따뜻했어요. 그러다 보니 제 왼쪽 가슴속에 울고 있는 그 울음이 없어진 거예요.”
윤이의 잠재의식 속에 있던 바늘 같은 병의 원인이 드러나고 그것이 치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윤이는 평화열차를 타기 위해서 너무나 먼 길을 돌아서 왔습니다. 그동안 많은 시간과 정력을 허비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비판적인 자세로 종교를 생각하려 합니다. 평화열차는 그렇게 해서는 타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이 만나듯 손을 잡아야만 만나는 것으로 생각지 말고 마음으로 전하는 언어로 만나야 합니다. 정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감동으로 만나질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뜨거운 전율이 와서 만나기도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할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텔레파시로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자지간에는 꿈으로도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평화열차는 영으로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마가복음 4:36-41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인간은 자기 사고의 틀 안에서 모든 것을 상상하고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근심이 자기를 사로잡을 때 거기서 헤어 나오지를 못합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가을바람을 느끼며 들녘에 꽃이 예쁘다고 말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먹고 살기에 바빠서 계절을 모르고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이 살아가는 이도 있습니다. 이것은 삶의 질 문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같이 보여도 실제로는 엄청난 차이의 삶의 모습입니다.
풍랑을 만난 배 위에서도 잠을 잘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살면 쉽게 치료됩니다. 예수님 같이 마음을 비우면 해소됩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면 해결됩니다. 어서 속히 평화열차에 타야합니다.
찬송가 406장(1절)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일어도 안전한 포구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가든지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함이라
13. 슬픔 역(驛)
어느 누구도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슬픔을 몇 번이나 얼마나 깊이 경험하는가의 차이 뿐입니다. 높은 산을 올라갈 때 우거진 잡초를 헤집고 올라가듯이 인생의 가파른 길을 가노라면 몸에 상처를 입어 살갗이 찢어지고 옷에 구멍을 낼 때도 있습니다. 맑은 공기를 호흡하는 길도 있지만 숨을 몰아쉬며 땅만 바라보고 걸어갈 때도 있습니다. 인생길도 그렇게 가는 동안 슬픔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필요한 모든 것이 있는 반면에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잡동사니도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중에도 슬픔이 모든 사람의 주변에 닥쳐옵니다. 이 슬픔을 잊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만 해소되지 않아 슬픔에 슬픔을 더해가는 이도 있습니다.
슬픔은 없는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지금 내 앞에 닥쳐온 것입니다. 누구나 당하는 슬픔이기에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마음을 던져 봅시다. 슬픔을 당할 때는 많이 울어야 합니다. 누구를 붙잡고 울든지 실컷 울어봅시다. 그러나 인간에게 안전한 위로와 시원함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도 나와 똑같은 슬픔을 경험할 사람들이니까요.
슬픔을 당할 때는 인간은 결국 나 혼자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슬픔은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적게 보이고 내게는 가장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슬플 때는 다른 사람에게 나의 슬픔을 강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감정을 똑같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비슷한 슬픔을 생각하고 울어주는 것입니다. 슬픔은 계절의 변화와 같이 여러 가지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루 빨리 평화열차에 타고 주님께 마음을 맡기는 일이 필요합니다.
첫째 이야기
전주 예수병원 원장이셨던 구레인 박사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구레인 목사님은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호남 지방의 선교에 많은 공을 세우셨습니다. 한번은 이 구레인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가 어떤 시골 교회에서 임시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참으로 비참한 장례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 교회 장로님의 아들 형제가 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급류에 배가 뒤집혀서 모두 익사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에 집에 불이 나서 집과 함께 전 재산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장로님의 아내는 불에 타 죽었습니다. 잿더미가 된 집 앞에서 물에 빠져 죽은 두 아들과 불에 타 죽은 아내의 시신을 앞에 놓고 장례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두 아들과 아내의 관 앞에서 장로님은 넋을 잃고 서 있었습니다.
구레인 목사님은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도대체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졸지에 당한 참변이 너무나 비참하여 감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한참 만에 구례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장로님! 당신은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려면 얼마든지 원망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려면 얼마든지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은 너무나 크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선택은 장로님의 자유입니다.” 그랬더니 그 장로님은 눈물을 흘리며 “목사님, 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야기
어떤 부인이 남편과 아들 3형제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직업은 선장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바다에서 폭풍에 휘말려 배와 함께 최후를 마쳤다는 비보가 왔습니다.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때에 큰아들이 남편의 뒤를 이어 배를 탔다가 또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둘째 아들도 어머니가 한사코 말렸는데 몰래 선원이 되었다가 얼마 후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막내아들이 배를 타겠다고 나섰습니다.
이 부인은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이 부인은 이웃에 사는 목사님께 찾아가 그 원인을 알아봐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그 집에 들어서자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는 들어서자마자 가슴을 설레게 하는 시원한 바다그림이 걸려 있었고 선장 차림의 멋진 모습의 아버지 사진이 걸려 있어서 아들들의 마음을 바다로 향하게 했던 것입니다. 부인은 목사님의 제안으로 즉시 그 그림을 떼고 산과 농촌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린 그림을 걸었습니다. 얼마 후, 막내아들은 선원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고 대신 농부가 되어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듣는 것이 무의식중에 우리의 마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자기 암시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한시 바삐 평화열차에 타고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셋째 이야기
영국이 낳은 세계적 문학가이자 목사였던 존 번연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돈독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열심히 교회 출석을 했고, 기도 생활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가 16세 되던 해 가장 의지하고 사랑하던 어머니를 여의었고 한 달 후 그의 여동생을 잃는 불운을 맞이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옥바라지와 사역을 위해 고생하던 아내가 죽자 장님이 된 딸과 철없는 두 아들을 부양하며 교회 일을 꾸려 나가야 했으며 마침내는 가엾은 딸 메리마저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영국 성공회의 탄압으로 60년의 생애 동안 12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집필했습니다.
젊어서 한 때 그는 땜장이였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목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틈틈이 익힌 지식과 문장력으로 <천로역정>을 비롯해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체포되어 가는 중에 교인들을 위로하기를 “조금도 두려워 마십시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기회를 빼앗겼지만 하나님의 진리가 실패를 당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박해자가 되는 것보다 박해를 당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나 당당한 삶입니까?
괴롭다는 말을 반복하면 더욱 괴로워집니다. 인간은 무엇을 반복하느냐에 따라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은 밤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하십니다. 새벽이 되면 일이 새롭도록 하십니다. 문제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1:17-35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께서도 슬픔을 당한 가정에 가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것은 슬픔을 나누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슬픔을 해결해 주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과 치유의 눈물이니까요.
평화열차에 탄 마르다의 가정은 예수님의 은총으로 오라비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신 감격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기적을 가져옵니다. 큰 기적, 작은 기적들이 신앙자들의 주위에 깃들여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과 관계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부활했다고 대단한 것 아닙니다. 여리고의 과부의 독자가 부활했다고 대단한 것 아닙니다. 그것은 육신의 생명이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영생의 능력이 주어지는 부활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 하늘나라 삶이 시작되는 새로운 인생의 부활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죽음 이후에 나타나는 모델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아무리 삶이 이렇고 죽음이 이렇고 말해도 그것을 모델로 보여주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설에 지날 뿐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똑같이 일어나는 새로운 삶의 모델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에게는 소망과 기쁨이 됩니다. 그분의 약속과 그분을 믿고 그대로 따르면 그분의 나라에 이르게 되고, 그분이 가졌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평화열차에 타면 이런 기적들이 차창 밖으로 보입니다.
찬송가 458장(1절)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주가 위로해 주시리라 아침 해같이 빛나는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가라 참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가라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받네
14. 질병 역(驛)
길을 지나가다 보면 걸음걸이만 보아도 질병이 있는 사람은 표가 납니다. 앉았다 일어설 때 ‘에구구’하고 힘들어하면 노인의 질병이요, 장성한 아들인데도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잔소리를 하면서 걸어가는 엄마의 소리를 들으면 정신 장애자 아들인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질병을 경험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몇 차례 병으로 앓을 때가 있습니다. 그 병이 고칠 수 없는 악성이 될 때도 있고, 인생을 바꾸어 버리는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질병 앞에는 정직해야 하고, 담대해야만 합니다. 질병에 대해서 체면을 세우고 가리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병이 마음의 병으로 옮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전북 순창에서 열린 '세계 장수지역 석학초청 국제 심포지엄'에서 석학들은 "장수하려면 건강한 식생활과 적당한 신체활동, 질 높은 수면(휴식)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벨기에 루이사 살라리스 교수는 "100세 이상 노인들의 삶을 분석한 결과 즐겁게 살며 적당히 먹고 마시고, 끊임없이 신체활동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습니다. 일본 류큐대학의 타이라 카주히코 교수도 "건강을 지탱하는 주요 3대 축은 식생활, 신체활동, 휴양 및 수면"이라고 했습니다.
경북지역 100세 이상 노인들의 장수 비결은 "낙천적이고 적게 먹으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가족관계가 원만하다."라고 말합니다. 음식과 더불어 운동, 수면은 물론 마음가짐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늘 화를 내고 고집불통이면 병에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무병장수의 비밀은 성격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관장하는 신경계가 장기의 기능을 조절하는 역할도 병행하기 때문에 건강한 몸을 위해서는 체력 향상뿐 아니라 건강에 좋은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첫째 이야기
지난 1998년 미국 샌디에이고 시에서 미주대각성운동이 열렸습니다. 그 때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젊은이들에게 “아멘”을 외치게 한 63세의 노신사 김춘근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최초의 한인 미국 정치학 박사입니다. 그는 76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간경화와 간염으로 죽음을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와이 미?(Why me?)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제가 왜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죽어야 합니까?”라고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회개했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는 다메섹의 바울처럼 그리스도인으로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 살 것을 작정했습니다. 그는 16년간 알래스카에서 그리스도인 교수로서 충실하게 사역하며 최근에는 미주 내 1.5세대와 2세대들에게 “주인의식을 갖고 미국을 위해 기도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했어도 그것이 인생의 훈련인줄 아는 이가 적고,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을 얻었어도 그것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라는 신호인줄 아는 이가 적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했어도 그것이 자신의 목표를 점검하라는 하나님의 교훈인줄 아는 이가 적고,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과 사고를 당했어도 그것이 하늘의 소리를 들으라는 기적소리인줄 아는 이가 적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한평생 살아도 100년을 넘기기 어려우면서도 영원한 하늘나라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들고 조금만 인생을 생각해 보면 하늘나라의 길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들아! 인간은 대해에 떠있는 하나의 조각배 일뿐이야!” 오늘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제 평화열차를 타고 평화의 나라로 힘차게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이야기
전북 부안에 사는 한 주부가 얼마 전에 암으로 죽었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 남편은 폭행으로 교도소를 제집처럼 드나들었습니다. 부인은 5살 난 아들을 등에 업고 늙은 시어머니를 수발하면서 살림을 혼자 책임져야만 했습니다. 삶에 지쳐 피곤하고 고단하여 몸살인가 하여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이 여인은 악에 받쳐 살았습니다. 남편과는 동네가 떠나도록 부부싸움을 했고, 97년 남편이 수감되자 시어머니에게도 대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교도소에서 남편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남편은 교도소에서 “이제 신앙을 갖고 새 각오로 세상을 살겠소.” 하고 편지를 보냈지만 부인은 “이제 별짓 다하네.”하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어느 날 남편을 전도한 도르가회에서 이 부인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들은 그 남편이 부인의 병든 소식을 듣고 구구절절 애틋한 말과 함께 쓴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제 와서 어쩌자는 것인가? 부인은 암이 온 몸에 퍼져나갔고, 한숨으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은 이 부인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남지 않은 것을 알고 다른 병상의 환자를 격려하고 걱정하면서 남은 생을 보람있게 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남편과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부인은 숨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다면서 자신의 안구를 기증하고 남편이 칫솔대로 깎아 만든 십자가를 두 손에 꼭 쥔 채로 하나님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워드 크라인벨 박사는 인간의 모든 치유는 지식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인간의 몸에 전자파가 1분에 10번 이상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500회까지 돌아간다는 실험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질병도 물러나고 항균체가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복음은 어떤 고정관념을 가졌든지, 어떤 세계관을 가졌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바뀌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마저도 바꿉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4:7) 마음과 생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뀝니다. 운명이 바뀝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도 바뀝니다. 영벌에 처해질 사람들이 영생으로 인도됩니다. 사람의 힘과 지혜로 할 수 없는 일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평화열차를 타라는 소리입니다.
요한복음 5:1-9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인간은 이 땅에 살면서 여러가지 문제로 많은 고민과 갈등과 고뇌를 하면서 삽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해주는 곳이 어디 있는지 찾기도 하고, 누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면 내 마음의 무거움이 사라질 수 있을는지 시도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실패로 끝나고 말며, 체념하기 일쑤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예수님의 이 질문은 우리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무한한 위로와 희망의 말씀입니다. 이 땅에 사는 인간에게 그 누가 이런 물음을 던질 자가 있습니까? 인간에게는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 생활면에도 변해지고 나아졌으면 좋을 일들이 수두룩합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문제를 기꺼이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은 하나의 종교적 문제이지 인생의 긴급한 문제와는 별로 상관을 지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의 어려운 문제에 ‘도와줄 사람’이 생기기를 바라고, ‘신통한 방법’을 바라는 수준에 그칩니다. 그러나 평화열차에 몸을 싣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의 나라를 경험할 때 놀라운 기적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 388장(3절) 전능하신 예수께 나의 소원 있으니 병든 자와 맹인을 고쳐주심 빕니다 나에게는 죄악이 가득하게 찼으나 예수께는 진리와 은혜 충만하도다
15. 장애 역(驛)
인간은 어떠한 종류로든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심한 경우에 우리는 장애자라고 말합니다. 유엔에서 규정한 장애인의 개념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간에 신체적 정신적 결함으로 인해 일상의 개인 혹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혹은 부분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는 장애자의 개념보다 자신이 장애를 얼마나 극복하느냐에 따라 장애의 영향은 달라집니다.
인간은 세 가지의 불구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적인 불구요, 다른 하나는 마음의 불구요, 또 하나는 영적인 불구입니다. 육적인데서 마음으로, 영적으로 불구가 심화될수록 절망의 골은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그럴듯하게 보인다고 다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 본다고 다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끼니걱정 없이 살면서도 사는 것답게 살지 못하는 이가 많으며, 두 눈을 버젓이 뜨고 사물을 보면서도 보아야 할 것을 바로 보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열차를 타고 함께 장애를 극복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이야기
스웨덴의 복음가수 레나 마리너는 두 팔과 한 다리가 없는 선천성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창조의 뜻을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시 139:13-14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장애인 올림픽의 수영 4관왕이며 세계적 복음가수로 선교적 사명에 불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미남 청년과 결혼해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내는 행복한 여자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20세기 최고의 여류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소르본대학에 재학 중이던 18세 때 ‘슬픔이여 안녕’ 이란 소설을 발표한 천재 작가요 미녀이며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피드 광증 때문에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으며 두 차례의 이혼과 도박․알코올 중독, 약물 남용으로 비참한 삶을 마감하면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고 자학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신을 사랑할 자유도 주시고 파괴할 자유도 주셨습니다. 자유가 내 뜻대로 사용되면 자유는 나를 파멸시키는 공해물질이 됩니다. 자유가 하나님을 향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동기와 수단을 공급받습니다. 평화열차를 놓친 결말은 파멸뿐입니다.
둘째 이야기
아버지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아버지는 죽고 아들은 살았지만, 두 눈을 잃고 실명하여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멀쩡하던 두 눈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아이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보다는 자신이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자포자기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말할 수 없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아들에게 기쁜 소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렇게 기쁜 일이 어디 있니?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너를 위하여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고 나섰단다” 깊은 절망감에 빠져 살던 소년은 기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어차피 한쪽 눈이 없는 애꾸눈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에 두려움과 함께 부끄러운 마음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으로 이 소년은 한 쪽 눈 이식 수술을 마쳤습니다. 수술 후 한동안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소년은 자신을 간호하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어떻게 애꾸눈으로 살아가느냐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소년의 눈에 감겨져 있던 붕대를 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붕대를 모두 풀고 가늘게 세상의 빛을 받아들이는 순간 아들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한쪽 눈만 가진 어머니가 애틋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년의 눈과 어머니의 눈에서 동시에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인간이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내 주위에서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큰 아픔입니다. 앞으로 자기에게 주어질 놀라운 미래의 기적을 준비하신 예수님이 앞서 가셔서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는 일이 복음입니다.
요한복음 9:1-7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소경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에 혁명을 일으킨 고마우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육적인 장애자, 마음의 장애자, 영적인 장애자들의 그 괴로움을 아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육적인 장애자 보다 마음의 장애자가 더 불쌍하고, 마음의 장애자 보다 영적인 장애자가 더 가련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하루 생활을 생각해 볼 때 무엇인가 얻으려고 동분서주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교훈은 이 소경같이 고난을 안고 있다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방향으로 나가면 새로운 삶의 길이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문제를 푸는 열쇠를 가까이에서 찾으려고 노력하십시오. 이것이 평화열차에서 인간에게 주시는 복음의 소리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당한 어려움을 다른 사람의 핑계로, 부모의 잘못으로, 운명의 장난으로 생각하고 원망하며 괴로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발전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는 단계로 넘어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한 고개만 넘어가면 그 다음은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이가 많습니다.
이제 평화열차에 타고 세상생활의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천국에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의 사는 방법이 같지 않습니다. 우유가 치즈로 바뀌고 나무가 종이로 바뀌며 모래가 유리로 변하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범위가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신앙생활 하는 방법을 완전한 것으로 알고 이렇게 해도 나는 얻은 것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기 방법에서 얻은 결론이지 하나님이 제시하신 온전한 믿음의 방법이 아닙니다. 이제 평화열차에 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십시오. 그리고 그에게서 응답을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새로운 변화의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찬송가 549장(3절) 내주여 뜻대로 행 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16. 원망 역(驛)
사람에게 오는 기회는 하기에 따라 변해지는 경우도 있고, 아무리 해도 변경시킬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을 자기가 변경시킬 수 있습니까? 만약 부모가 자녀들의 주인이라면 죽음도 부모가 변경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합니다. 의사가 죽음을 변경시킵니까? 그러면 못 고칠 질병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생명을 주관하는 이를 조물주라고 하기도 하고, 창조주라고 하기도 하고, 신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경험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경험하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내가 모르고 사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가 경험하지 못했다고 없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모른다고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이 없다고 고함을 지른다고 해서 있는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구가 돌아가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지구가 멈추어 서는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냇물이 흐르듯 진리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어 주지 못해서, 믿도록 행동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인간관계 문제들, 가정의 문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문제가 극치에 이르면 살인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사랑이 없어서,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고독하고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방탕하거나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조금만 사랑해 주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사람이 변해지고, 인생이 새로워질 터인데 그것이 잘 안되어 사회 구석구석에 절규와 원망이 가득합니다.
첫째 이야기
어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경찰서장이 있었습니다. 헌금도 잘하고 목사님께 기도도 부탁하고 교회행사에도 잘 참석했습니다. 그가 까닭 없이 경찰병원 과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했는데 좌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망했습니다. “교회에 충성해봐야 별 수 없더라.”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야말로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교회도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후에 그 사람이 목사님에게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좌천시켜 주셔서 원망했는데 이제는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100만원을 헌금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알고 보았더니 그가 경찰서장으로 있던 지역에 탈옥수 신창원이 나타났는데 그를 잡지 못해서 자신의 후임 서장이 파면조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계속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파면 당했을 것을 생각하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야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 사모가 병원에서 위암 판정을 받고 입을 굳게 다물고 마음도 열지 않았습니다. 한창 나이에 이 지경이 된 것은 개척교회 시절의 극심했던 고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히 남편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싹터 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모의 남편인 목사님은 그가 존경하는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얼굴이 어둡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목사님은 형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노트를 한 권 사다가 아내에게 주세요. 그 노트에 감사할 일만 생각나는 대로 적으라고 해 보세요” 목사님은 즉시 노트와 볼펜을 사들고 아내에게 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짜증을 내면서 “이 마당에 무슨 감사할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방을 나서자 한참 후에 사모는 한두 줄씩이나마 노트에 감사할 일을 써 내려 갔습니다. 아주 평범하고 작은 일부터 적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사모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찾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통증이 사라지고 다리에는 힘이 생겼습니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암세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암을 치료하는 약이 감사 약임을 이전에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수수께끼를 원망만 하면서 살 것입니까? 그렇게 원망하는 시간에도 자기에게 주어진 시절은 기다려 주지 않고 흘러만 갑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망각의 세계로 흘러갑니다.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고, 몸부림쳐도 소용없습니다. 가장 지혜 있는 일은 지금이라도 역사를 알고, 인생을 알고,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겸손하게 새로 깨닫는 일입니다.
인생에는 위험한 병이 있습니다. 때문에 라는 병, 한번쯤이라는 병, 열등의식이라는 병, 죽으면 그뿐이라는 병, 호기심이라는 병, 이러한 병들만 잘 이겨 나가면 반드시 인생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는 손댈 수 없지만 앞으로의 시간은 내가 하기에 따라 변경시킬 수 있습니다. 지나간 실패를 원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0:1-16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육 시와 제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십 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 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나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오늘날의 인생현장은 장터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장터에 나와서 이것은 내가 만든 것이라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멀리 가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이 진짜라고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내 것만 강조하는 사고방식이 굳어지면 모든 일들을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을 바로 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광장은 장터에서의 사고방식만으로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고방식을 바꾸라고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놓고 “억울하다, 섭섭하다”라는 감정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감정 처리에 인생을 많이 소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감정처리의 방법도 믿음으로 하는 예수님 식을 빨리 배워 보람과 기쁨의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느 선교단체의 잡지에 <주님, 제가 이렇게 못났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제가 운전을 하면 보행자가 얄밉고, 제가 걸어가면 운전자가 못돼 보입니다. 제가 남들 앞으로 끼어들 땐 남들이 야속하고 제 앞으로 누가 끼어들면 그가 무례해 보입니다. 제가 물건을 팔 때는 손님이 얄팍해 보이고, 제가 물건을 살 때는 상인이 미덥지 않습니다. 제가 전화를 걸때는 저의 신분 밝히기를 꺼려하고 제가 전화 받을 때는 그 사람이 신분을 안 밝힌다고 불쾌해 합니다. 제가 며느리 일 적에는 시어머니 공경이 귀찮고 제가 시어머니 되어서는 며느리가 원망스럽습니다. 주여, 용서하소서.”
어느 철학자의 말이 “사람은 천사와 짐승으로 오가면서 산다.”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보면 짐승 같은 생각과 생활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천사와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제 모든 원망을 접고 평화열차에 몸을 싣고 자신의 생각, 마음가짐, 결단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고 새로운 시작을 하면 반드시 인생이 새롭게 변해질 것입니다.
찬송가 503장(2절)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 받기 원하네 어떤 이는 고통과 근심 걱정 많으니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하도다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하도다.
맺는 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간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생애도 인간구원의 활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분은 인간이 당하는 수많은 각종 어려움들을 보시면서 말로, 손으로, 심지어는 성령으로 연결하시고 기적을 베푸시며 어려운 자를 일으켰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즉 어려움을 기회로 삼으라는 교훈입니다. 믿음의 세계란 인간세상의 관점으로만 보지 말고 하늘의 세계에서 보는 관점으로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두 세계를 의식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평화의 나라로 향해가는 평화열차에 타야합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고향 가는 길이니까요.
그래서 인간에게 정거장을 의식하도록 했습니다. 그 정거장이 곧 어려움을 당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그 정거장을 그의 생애에서 보여 주시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평화열차를 타라고 손짓하십니다. 평화열차에서 많은 것을 주님과 의논하고 경험하면서 평화의 나라로 힘차게 매진하라고 하늘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소식입니다.
인간이 당하는 어려움은 결코 슬픈 소식이 아니며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기회인 것을 인지하기 바랍니다. 다음 편은 <은혜편>으로 평화열차에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들을 점검해 보겠습니다.
제 2 편 은혜편
1. 꿈에서의 지시
2. 세례 받은 자의 신비함
3. 천국을 소유하는 은혜
4. 하나님의 위로
5.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
6. 긍휼의 복
7. 하나님을 만나보는 은혜
8.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은혜
9. 하나님의 보호
10. 기도의 상
11. 작은 선행에 큰 보상
12. 병든 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13. 소외된 자를 살피시는 예수님
14. 하늘의 평안
15. 고향 잃은 사람들
16. 임마누엘의 약속
17. 사람은 푼돈, 하나님은 목돈
18. 집 없는 사람에게 주시는 위로
제 3 편 사명편
1. 예배드리는 일
2.선교하는 일
3. 교육하는 일
4. 봉사하는 일
5. 친교 하는 일
6. 계명을 지키는 일
7. 순종하는 일
8. 노래하는 일
9. 예술 하는 일
10. 섬기는 일
11. 관심을 갖는 일
12. 결단해야 할 일
13. 남을 즐겁게 하는 일
14. 기뻐하고 감사할 일
15. 선한 일
16. 추수에 기여하는 일
17. 어려운 자를 돕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