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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교수의 앎과 삶이 하나 되는 생활
최재천 스타일 도서 ‘최재천 스타일’은 우리 시대의 지성인 최채천 교수의 일상과 책, 취향, 그리고 세상을 보는 관점을 담아낸 인문 감성 에세이다. 인문학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 지식인의 지형도에서 자연과학자 최재천은 ‘학문’과 ‘생활’의 자연스러운 공존을 이루고 있다. 그는 단독 주택에 살면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잔디와 전쟁을 하고 보일러 공사를 감독하고, 열 마리의 개를 기르며, 일도 학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앎과 삶이 하나 되는 생활’을 실천하는 그에게 ‘지적 생활인’이라는 호칭은 매우 자연스럽다.
지적생활인 최재천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스타일로 살까? 또 어떻게 세상을 바라볼까?’ 통섭학자로 유명한 그는 ‘시인의 마음을 가진 과학자’다. 그는 동물들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며 이해하고 사랑한다. 또 매일 밤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아버지’ ‘거짓말’ ‘호기심’ ‘복제인간’ 등 자신의 인생을 그만의 언어로 표현한 키워드를 통해 독자에게 생활지표와 자극을 제시한다. 그 중 몇 키워드에 주목해 본다.
스무 살이여, 방황하라! 지금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평생 적어도 다섯 여섯 번은 직장을 옮기게 될 것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같은 직종에서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는 게 아니라, 아예 번번이 새로운 직종으로 갈아타게 될 것이다. 대학에서 착실하게 직업 훈련스타일로 공부한 학생들은 분명히 첫 직장을 얻는 데는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직장에서 과연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최근 추세로 볼 때 기껏해야 10-20년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 첫 직장에서 쫓겨난 다음에는 어찌할 것인가. 같은 직종의 다른 직장에 자리를 얻으면 다행이겠지만, 그 또한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보다 더 새로운 교육을 받은 잘난 후배들이 끊임없이 치고 올라 올 테니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지금 대학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90세를 넘길 것이다. 첫 직장에서 등 떠밀려 나온 다음 적어도 40- 50년을 더 먹고 살아야 한다. 경영학계의 석학 피터 드러커는 21세기를 ‘지식 사회’라고 규정했다. 지식 사회에서는 정규 교육기관에서 배운 걸로 평생토록 써먹는 게 아니라 늘 새로 배워서 쓰고 또 배워서 쓰면서 살게 된다. 최재천은 대학생들에게 종종 ‘방황’하라고 주문한다. ‘방탕’하라고는 하지 않는다. 방황은 젊음의 특권이다. 가족을 부양하면서 방황하면 그 것은 죄악이다. 하지만 대학은 방황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 너무 좁게 미래를 보지 말고 대학의 문을 나가기 전에 온갖 다양한 세계로 당당하게 방황하라는 것이다. 졸업 후에 살아야 할 그 긴 세월 동안 대학시절의 방황은 하나도 버릴 것 없는 귀한 양분이 될 것이다. 스무 살이여, 방황하라!
인생을 이모작하라. 평균 수명이 나날이 길어져 이제 머지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100세를 살게 될 것이라는 전망에 비춰볼 때, 은퇴 후의 삶을 잉여 인생으로 간주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길어지고 있다. 인생을 두 번에 나누어 살자는 것이다. 자식을 기르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번식기’와 자식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번식 후기’를 따로 설계하여 적극적으로 살아보자. 그래서 인생을 제1 인생과 제 2의 인생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름이 마땅하지 않으면 그린에이지(제1 인생)와 골든에이지(제2 인생)로 부르자. 그 누구도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색을 떠올리게 하는 ‘실버’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골든에이지가 마음에 든다. 고령화에 대한 말, 9988이냐 8899냐? 99세까지 팔팔하게 사느냐, 88세까지 구질구질하게 사느냐라는 뜻이다. 우리 정부가 뒤늦게나마 훌륭한 고령화 대책을 마련하여 사회 전반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위기를 넘긴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어 일찌감치 병원 중환자실에 눕는 신세가 된다면 모든 게 다 의미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여 개인의 건강을 챙기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생명과학자가 꿈꾸는 가장 완벽한 인생 100세 시대는 아마 다음과 같은 삶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100세까지 살되 지금처럼 말년에 상당기간을 병원에 누워 있거나 병원 문턱을 드나들며 인생을 끝내는 게 아니라, 100세 생일 날 새벽에 골프장에 나가서 18홀을 좋은 성적으로 가뿐하게 돌고, 저녁에는 자손들이 차려주는 생일잔치를 즐긴 다음 “그동안 너희들과 참 즐거웠다. 잘 있어라.” 하며 아무런 걱정 없이 훌쩍 떠나는 그런 세상이 바로 인생 100세 시대의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인생 100세 시대는 반드시 온다.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열 명에 한 명꼴로 100세인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와 있다. 그러나 인생 100세 시대가 온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저절로 100년을 살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100년을 살 준비를 해야 한다. 그 긴 세월을 무얼 먹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걱정하는 다분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마음가짐으로 인생 100세 시대를 맞이할 수는 없다. 누가 뭐래도 ‘나는 100세 인생이 되리라’ 스스로 격려하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인생 100세 시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수명 연장에 대한 사람들의 허황된 꿈을 부추기는 온갖 약물과 비법은 세상에 널려 있다. 하지만 아직 그 어느 것도 믿을 수 없다. 예전에 우리는 사랑을 가슴으로 하는 줄 알았다. 뇌 과학 덕택에 이제 사랑도 머리로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예전에 우리는 육체와 마음은 별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육체를 쥐고 있음을 안다. 뇌 과학이 진정한 인생 100세 시대를 열 것이다. 인생을 이모작하라.
최재천은 사전에서 ‘은퇴’와 ‘정년’이라는 단어를 빼 버리자고 제안했다. 정년은 근대 산업 사회의 산물이다. 예전에 우리 농경사회에서 은퇴라는 걸 했던가? 수명은 늘고 있는데 일찌감치 은퇴하여 뒷방노인네 신세로 긴 여생을 마감해야 하는 사회구조는 이제 현실적일 수 없다. 은퇴 없는 삶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과학 지식 시대에 살고 있다. 알아야 먹고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알아야 오래 살 수도 있는 세상이다. 명석한 두뇌를 썩히지 말고 철저하고 적극적으로 인생 100세 시대를 맞이하기 바란다.
스마트 시대 우리는 스마트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라는 말은 원래 ‘똑똑하다’ ‘맵시 있다’ ‘고급스럽다’ 등의 뜻을 가진 말이었는데, 이제 여기에 ‘컴퓨터로 조절되는 것’이라는 뜻이 합쳐져 ‘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이라는 뜻의 새로운 단어로 거듭났다. 그런데 그 스마트시대를 살아갈 우리는 점점 덜 스마트해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스마트폰을 깜빡 집에 두고 나오면 자기 집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하고 내비게이션 없이는 여행을 떠날 엄두도 못 낸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스마트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 보다 성공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면 왜 스마트해지는 노력을 하지 않는가? 최근 50년간의 인지과학 발달 덕택에 우리는 우리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 스마트해지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하나의 관점을 더 보탠다면. 스마트 시대를 살게 된 사람들은, 흔히 하고 있는 다중작업은 컴퓨터에게 맡기고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일에 매진해야 하는 것이다.
스마트 시대의 지침 첫째, 고품질의 지식을 습득하고 필요할 때 그걸 쓸 줄 알아야 한다. 둘째, 그러기 위해 훌륭한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인터넷에 널려있는 값싼 정보들 말고 진짜 유용한 지식을 얻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인터넷 강국이라고 우쭐대지만 정작 남들이 만들어낸 정보를 신속하게 뒤지며 즐기는 일만 잘하는 게 우리의 참 모습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은, 널려 있는 구슬을 꿸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단 구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남의 구슬을 돈 주며 가져다가 열심히 꿰기만 하고 있다. 너도 나도 열심히 인터넷 서핑에만 정신 팔린 이 시점에서, 진실한 연구와 공부를 해야 한다. 조직 사회의 스마트 싱킹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이제 조직의 성공은 성원들이 자유롭게 스마트 싱킹을 하고 그 결과들을 거리낌 없이 공유할 수 있도록 얼마나 유연한 소통과 통섭의 환경을 조성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점에서 개인주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워하는 서양보다, 천성적으로 나보다 우리를 앞세울 줄 아는 우리의 조직문화가 빛을 발휘할 때 소통과 통섭이 가능할 것이다. ‘내가 우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라.’
(2018.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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